이신애 (獨立運動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신애 (李信愛, 이자경 (李慈卿), 1891年 ( 高宗 28年) ~ 1982年 , 平安北道 構成 出生)는 韓國 女性 獨立運動家 , 女性啓蒙運動家이다. 本貫은 全州 (全州), 아버지는 이세건(李世建)이다. 1963年 建國訓長 독립장 이 追敍됐다.

生涯 [ 編輯 ]

1913年 호수돈女學校 (好壽敦女學校) 3學年에 在學 中 結核 에 걸려 中退하고 그 다음해 4月 元山聖經學校(元山聖經學校)를 卒業했다. 그 後 元山 루씨女學校(樓氏女學校) 두남리(斗南里) 分校의 敎師로 在職하면서 學生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1918年 孫貞道 (孫貞道) 牧師 를 만나 獨立運動을 決心하고, 그 해 12月 敎師職을 辭職한 뒤 서울 에 올라와 3·1運動 에 參加했다. 5月 에는 女性 獨立運動 團體인 血性婦人會 (血誠婦人會)에 加入한 뒤 幹部가 되어 張善禧 (張善嬉) 等과 함께 상하이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軍資金을 募金했으며, 9月 에는 강우규 (姜宇奎)의 사이토 總督 暗殺을 支援했다. 10月 에는 獨立大同團 (獨立大同團)에 入團해 事務를 擔當하는 한便, 機關紙인 《帶同信保(大同申報)》의 刊行에 關與했다. 11月 에는 團長 전협 (全協)의 指示를 받고 의친왕 (義親王)의 상하이 亡命 을 周旋했으나 12月 의친왕의 亡命이 失敗해 團員 4名과 함께 日警에 逮捕되었다.

逮捕된 뒤 西大門 刑務所 에서 未決囚로 服役 中 1920年 3月 柳寬順 (柳寬順)과 함께 3·1運動 1周年을 記念해 獄中에서 萬歲運動을 展開하였다. 이 事件으로 柳寬順은 拷問을 받던 途中 死亡하고, 이신애는 乳房 이 破裂되는 深刻한 負傷을 입었다. 그 後 懲役 4年을 宣告받고서 3年 8個月間 服役하고 出監했다. 1945年 光復 이 되자 忠南 公州 에서 韓國婦人會(韓國婦人會)를 組織해 女性啓蒙運動에 힘썼다.

關聯 作品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