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동 (喜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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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
出生 1935年 6月 8日 ( 1935-06-08 )
大韓民國
死亡 1987年 4月 1日 ( 1987-04-01 ) (51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道峰區 한일병원
國籍 大韓民國
職業 코미디언
活動 期間 1961年 ~ 1987年

이기동 (李起東, 1935年 6月 8日 ~ 1987年 4月 1日 )은 大韓民國 喜劇 俳優 이다.

略歷 [ 編輯 ]

1960年代 中盤, 軍將校로 轉役한 이기동은 當時 最高의 코미디언이었던 구봉서 를 찾아가 같이 活動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付託하였고, 이 때부터 公演舞臺에서 活動을 始作하였다. 1970年代 '땅딸이'라는 別名으로 이대성 과 콤비를 이루며 最高의 人氣를 謳歌하였다. 이기동은 1980年代 新軍部의 演藝人 淨化運動 의 餘波로 TV 出演이 禁止되자 事業을 벌여 機動産業을 세우고 基動詞와 땅딸이 요쿠르트 等을 生産했다.사회에 物議을 일으킨 企業人이라는 理由로 三淸敎育隊 에 끌려가기도 했으며 50代에 世上을 떠났다.

코미디 [ 編輯 ]

MBC의 ' 웃으면 福이와요 '에서 눈알을 빙빙 돌리다 뒤로 자빠지는 演技나 敬禮할 때 손을 龍鬚鐵 튀기듯 네다섯番 程度 위아래로 反動을 주는 演技로 人氣를 끌었다. 美女 코미디언 권귀옥 과 함께 '땅딸이 이기동과 늘씬美女 미스 卷'으로 안房 劇場을 주름잡았다. '저멀리 가고 싶구나'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꿍따라 닥다 삐약삐약'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구나' '아 괴롭고 싶구나' '존간나세끼' '安寧이노모하시므레이까' 等의 流行語를 퍼뜨렸다.

死亡 [ 編輯 ]

1987年 3月 28日 에 새벽 밤業所 出演을 마치고 歸家하던 中 갑자기 쓰러져 病院에 入院했으나 回復하지 못하고 肝硬化와 糖尿 合倂症으로 4月 1日 에 死亡했다 [1] . 享年 52歲.

映畫 [ 編輯 ]

가요 [ 編輯 ]

일화 [ 編輯 ]

  • 개그맨 金美花 는 이기동을 보며 개그맨의 꿈을 키웠다고 告白한 적이 있다.

三淸敎育隊 拷問 後遺症으로 死亡說 [ 編輯 ]

1993年 8月 時事뉴스(舊 시사정경)라는 雜誌는 `삼청敎育이 이기동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題下의 記事에서 同僚 喜劇 俳優 배삼룡 의 證言을 引用해 `이기동이 1980年代 삼청교육대에서 苦楚를 겪은 後遺症으로 50代 나이에 他界했다'고 傳했다. 이 雜誌에 따르면 이기동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表面的인 理由는 ‘社會에 物議를 일으킨 經濟人’이라는 것이었다. 이기동과 배삼룡은 當時 人氣를 끌었던 사와(요구르트의 一種)를 만들어 파는 企業을 運營했지만 두 사람 다 經營 不實로 不渡를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裵 氏는 "이는 쿠데타로 政權을 잡은 新軍部들의 허울좋은 핑계였다"며 事實은 배삼룡, 이기동이 3金氏 中 金鍾泌 의 支持者였기 때문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고 主張했다. 배삼룡은 이 雜誌와 인터뷰에서 "李 氏는 敎育修了 後 精神的인 屈辱感과 鬱憤을 참지 못하고 每日을 술로 지새우며, 結局은 合倂症으로 죽어갔다"고 主張했다.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