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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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人
身上情報
出生 1836年 2月 5日 ( 1836-02-05 )
사쓰마번 가고시마視
死亡 1883年 11月 20日 ( 1883-11-20 ) (47歲)
性別 女性
國籍 日本
別稱 亞쓰히메

덴쇼人 ( 日本語 : 天璋院 , 1836年 2月 5日 ~ 1883年 11月 20日 )은 막말 메이지 時代 의 女性으로 도쿠가와 幕府 13代 將軍 도쿠가와 이에社다 (德川家定)의 正室夫人이다. 通稱 亞쓰히메 ( 日本語 : 篤? )로 불린다.

아버지는 사쓰마번 시마즈 家門의 分가인 이마이즈미 시마즈 다다타케 (島津忠剛). 어릴 때 이름은 가쓰 (かつ)이고 成年 以後 스미코 (敬子)라고 했다.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彬)의 養女가 되었을 때 아쓰코 (篤子)라고 改名을 했고, 右大臣(右大臣) 고노에 다다히로 (近衛忠熙)의 養女가 되었을 때는 후지와라노 스미코 (藤原敬子)라는 이름을 썼다.

生涯 [ 編輯 ]

街에이 6年( 1853年 ),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養女가 되어 그해 8月 21日에 가고시마 에서 出發, 쿠마모토 를 거쳐 에도 邸宅으로 居處를 옮겼다. 以後로 가고시마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나리아키라의 養女가 된 것은, 쇼군 街에서 시마즈 가로 婚談이 들어와 幕府에의 出嫁를 念頭에 둔 것이었다. 當時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正室夫人들이 次例次例로 夭折하고, 이에社다 自身도 病弱하여 子息이 한名도 없어 시마즈가 出身의 情實을 맞아 長壽하고 子息도 많이 두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 (?川家?)를 본받고자 했다고 한다. 다만, 다이묘의 親딸이었던 高다이인 (?大院)에 비해 아츠코는 시마즈(島津) 家門 가운데에서도 分家 出身이어서 히토츠바시派 內에서조차 「 美다이도코로 (쇼군 情實)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身分이 아니냐」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한便, 아츠코가 번주에게 政治的 任務를 받고 에도城에 갔다는 말도 傳해진다. 當時 쇼군의 後繼者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도쿠가와 요시노부 )를 支持하는 勢力과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 도쿠가와 이에모치 )를 支持하는 勢力으로 나뉘어 對立하는 狀況에서 요시노부를 後繼者로 만들기 爲해 아츠코를 토쿠가와街에 출가시켰다는 것이다.

안세이 3年 ( 1856年 ), 右大臣 고노에 다다히로 의 養女가 되어 그 해 11月에 쇼군과 婚禮를 올렸다. 그러나, 안세이 5年( 1858年 ) 7月에 養父인 나리아키라, 8月에는 이에사다가 急死하고 14代 쇼군에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就任하게 되어 그 使命을 完遂할 수 없었다. 이에사다의 죽음으로 削髮하여 以後 덴쇼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幕府는 公務合體論을 내세워 分큐 2年(1862年) 쇼군 이에모치와 고메이 天皇 (孝明天皇)의 女同生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和宮親子) 皇女의 婚姻을 決定하게 된다. 사쓰마 番은 덴쇼仁義 歸鄕을 請하지만, 덴쇼人 自身은 이를 拒否하고 에도에 남는 것을 選擇하였다. 한便 쇼군의 夫人이 된 갸즈노미야 內親王과 덴쇼人은 一種의 「媤어머니」와 「며느리」關係가 되었지만, 皇室出身과 武家出身의 慣習 差異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가 後에 和解했다고 傳해진다.

가쓰 가이슈 (勝海舟)도 參加한 會談에서 元來 自身이 擁立할 豫定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와는 險惡한 雰圍氣에서 만났다고 하며 1866年 에는 요시노부의 嗷嗷쿠 (쇼군의 邸宅) 改革에 가즈노미야(이에모치 事後 세이칸人노미야(??院宮)으로 불림)와 함께 抵抗한다. 한便, 게이오 3年( 1867年 )에 요시노부가 臺정봉환 (大政奉還)을 實施해 에도幕府가 消滅하고 에도城에 政府軍이 無血 入城할 때, 自身의 親가인 시마즈街에 歎願하여, 朝廷에 歎願한 카즈노미야와 함께 토쿠가와가 救濟 및 요시노부의 救命에도 힘썼다고 한다.

하지만 요시노부와의 個人的인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理由는 첫 番째로, 이에모치와 이에사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 에 依해 毒殺당했다고 생각한 것과. 두 番째로, 요시노부가 初期에 意圖的으로 쇼軍職을 拒絶했다고 생각한 것. 마지막으로, 後期에 半幕府勢力과의 戰爭 때, 요시노부가 兵力을 그대로 두고 에도城으로 돌아와 蟄居해 버린 것 때문이었다.

메이지 時代가 始作된 以後, 이에사다의 生母인 婚主인 , 이에모치의 生母인 짓歲인 , 多야스 가메노스케 [1] 와 함께 살았다. [2]

메이지 時代에는 도쿠가와 가의 援助를 받았으나, 사쓰마 街의 元祖는 拒絶했다. [3] 어려운 財政에도 不拘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養子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英國으로 遊學보내고, 이에사토의 約婚者인 고노에 야스코 [4] 의 神父 授業을 돕는 等 이에사토의 養育에 힘썼다.

메이지 16年 (1883年) 11月 20日에 도쿄의 히토쓰바시 邸宅에서 腦溢血로 쓰러져 며칠 後 享年 48歲로 死亡하였다. 도쿄 다이토구 우에노사쿠라기 의 節 ?永寺(間에이지)에 있는 男便 이에社다 무덤 옆에 埋葬되었다. 賣場은 實質的으로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親母 役割을 했다는 貢獻에 對한 특별한 禮遇로 쇼군式으로 埋藏되었으며 墓 옆에는 生前에 덴쇼人이 좋아했다고 하는 枇杷나무가 심어져 있다. 自身의 所持金을 節約해서라도 아랫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臨終時에 所持金은 約 3엔(現代의 3萬-4萬 엔)밖에 없었다고 한다.

에피소드 [ 編輯 ]

  • 개를 좋아해서 結婚前에는 재패니즈 스파니엘 (재패니즈 칭)을 여러 마리 키웠지만, 개를 싫어하는 男便 때문에 嗷嗷쿠 에 들어와서는 고양이(이름은 사토히메)를 기르게 되었다. 이 고양이를 돌보던 이는 오스카 마세코(大岡ませ子)로 當時 덴쇼人을 도와 誤오쿠를 總括하는 오토視料理였던 多키야마 의 조카라고 한다.
  • 메이지 時代에 斷髮令/肺도령이 施行된 以後, 自進해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 한다.
  • 메이지 時代, 가쓰 가이슈와 함께 要시와라, 卽 遊廓에 간 적이 있다. 덴쇼人은 오이란 (花魁)에게 宏壯한 興味를 보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5]
  • 生에 두 番 旅行을 하였다. 첫 番째 旅行은 사쓰마 에서 에도 로 媤집을 간 것. 두 番째 旅行은 하코네 度勞使와 溫泉으로의 旅行이었다. [6]
  • 가즈노미야 지카코는 逃奴사와에서 덴쇼人보다 일찍 死亡하였는데, 덴쇼人이 이를 追憶하며 불렀다는 와카 [7] 와 日記 [8] 가 남아 있다.

關聯 作品 [ 編輯 ]

小說 [ 編輯 ]

  • 『天璋院篤?』: 미야誤 도미코(宮尾登美子) 作 , 고단샤, 1984年 - 2008年 NHK 大河드라마 아츠히메 原作.
  • 『天璋院敬子』 : 禹메모土 이쿠코(梅本育子) 作, 1997年

텔레비전 드라마 [ 編輯 ]

各州 [ 編輯 ]

  1. 多야스 가메노스케는 後에 세이칸人 (가즈노미야)의 支持를 받아 도쿠가와 가의 後繼者로 指名되어 그 이름을 도쿠가와 이에사토 (德川家達)로 改名하고 도쿠가와 宗家 16代 正式 後繼者가 되었다.
  2. 가쓰 가이슈 의 3男 우메타로와 結婚한 클라라 화이트닝의 日記인 クララの明治日記(클라라의 메이지日記)에 言及되어 있음
  3. "나는 이미 도쿠가와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 理由였다.
  4. 덴쇼仁義 第2養父 고노에 다다히로의 孫女
  5. 가이슈 語錄
  6. 덴쇼인의 日記
  7. 君が?とどめかねたる早川の水の流れもうらめしきかな
  8. 日記의 一部 : 度老子와에서 가즈노미야가 죽었다는 建物을 보았다. 북받쳐오르는 悔恨에 넘쳐 흐르는 눈물로 소매가 젖는 것을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