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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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히로코 ( 日本語 : 近衛熙子 , 間分 (?文) 6年 陰曆 3月 26日 ( 1666年 4月 30日 ) ~ 乾脯 (?保) 元年 陰曆 2月 28日 ( 1741年 4月 13日 )은 日本 에도 바쿠후 (江?幕府) 6代 쇼軍人 도쿠가와 이에老父 (?川家宣)의 情實이다. 아버지는 구게 (公家)인 고노에 모토히로 (近衛基熙)이며 어머니는 高미즈노誤 天皇 (後水尾天皇)의 딸인 쓰네코 內親王 (常子?親王)이다. 出家 後의 이름은 덴에이인 ( 日本語 : 天英院 텐에이인 [ * ] )이다.

生涯 [ 編輯 ]

1679年 當時 고후(甲府) 번주인 도쿠가와 쓰나도요(후일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老父 )와 婚姻하였다. 이 婚姻에 對해 덴에이仁義 아버지 모토히로는 自身의 日記인 「모토히로 空氣(基熙公記)」에서 「無가(武家)와의 婚姻을 禁하는 先祖의 遺言을 거역하게 되었다」라고 記錄하며 「設令 乞食을 하게 되더라도 (婚姻을) 承諾할 수 없다」라고 덧붙여 딸의 婚姻이 自身의 本意가 아님을 分明히 하였으며, 이에老父와의 婚談에 앞서 實際로 미토(水戶) 도쿠가와 家門에서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 (?川光?)의 後繼者인 도쿠가와 쓰나에다 (?川綱條)로부터 婚談이 들어왔을 때는 이를 拒否하기도 하였다. [1] 이러한 背景과는 別個로 夫婦 關係는 圓滿하여 이에老父의 고후 번주 時節 동안 長女 도요히메(豊?)와 長男 무게쓰인(夢月院)이 태어났으나 두 子女는 모두 夭折하였다.

1709年 이에老父가 6代 쇼군으로 就任하면서 美다이도코로 (御台所)가 되었으나 以後에는 子女를 얻지 못하였다. 1712年 이에老父가 死亡하자 削髮한 뒤 援護를 덴에이인이라 하였다. 이에老父의 側室 겟코인 (月光院)李 낳은 아들 도쿠가와 이에쓰구 (?川家?)가 7代 쇼군이 되면서 朝廷으로부터 種 1位(?一位)의 官職을 下賜받아 「이치이 님(一位?)」으로도 불렸다.

이에쓰區의 生母인 겟코인과는 사이가 나빠 에지마 - 이쿠시마 事件(江島生島事件)을 일으켜 겟코인의 心腹이자 當時 嗷嗷쿠 (大?) 總責任者였던 에지마 (?島)를 逐出, 겟코인의 勢力을 약화시켰으며 로주 (老中), 후다이 다이묘 (譜代大名)들과 結託하여 當代의 權力者들이었던 소바要닌 (側用人) 마나베 아키後嗣 (間部詮房), 아라이 하쿠세키 (新井白石) 等의 失脚을 꾀하는 等 政治的인 影響力 또한 行使하였다. 그러나 以後 겟코인과의 사이는 어느 程度 回復되어 이에쓰謳歌 病으로 危篤한 狀態에 빠지자 겟코인을 直接 慰勞하기도 하였다.

1716年 이에쓰謳歌 死亡한 뒤 기슈(紀州) 번주인 도쿠가와 요시무네 (?川吉宗)가 8代 쇼군으로 就任하는 데에도 影響力을 行使하였다. 이러한 功績과 더불어 요시무네에게 살아 있는 情實이 없었던 탓에 以後 生涯 全般에 걸쳐 嗷嗷쿠 內에서 權力을 維持하였다.

1741年 享年 76歲로 死亡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그러나 모토히로의 伯母 고노에 히로코(近衛尋子)가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情實이었으므로 實際로 고노에 家門에 巫歌와의 婚姻을 禁하는 先代로부터의 遺言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