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나리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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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 ?彬
이치키 시로가 찍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다게레오타이프 (1857년)
理致키 詩로 가 찍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다게레오타이프 (1857年)
마루에 열십자
마루에 열十字
無事 情報
時代 에도 時代 後記 ~ 末期( 막말 )
出生 分카 6年
死亡 안세이 5年
信號 照?大明神
誡命 順聖院殿英?良雄大居士
氏族 시마즈氏 (島津氏)

시마즈 나리아키라 ( 日本語 : 島津?彬 , 分카 6年 ~ 안세이 5年)는 에도 時代 後期부터 막말 까지의 度자마 다이묘 利子 사쓰마번 (現 日本 가고시마縣 )의 第11代 번주 (在任: 1851年 ~ 1858年 ))이다. 시마즈 家門의 第28代 堂主. 사쓰마 番의 富國强兵 을 성공시킨 名君 으로 評價받았다. 막말社縣侯 中 한名. 사이고 다카모리 를 비롯한 막말의 人材를 길러낸 人物이기도 하다.

成長過程 및 오유라 騷動 [ 編輯 ]

1809年 3月 14日 시마즈 나리오키 의 長男으로 사쓰마 번주의 에도 邸宅에서 태어났다. 當時 賢明한 夫人으로 有名했던 어머니 가네코(周子)는 當時로는 드물게 나리아키라를 비롯한 3名의 아이를 乳母에게 맡기지 않고 直接 養育하였다. 第8代 번주인 曾祖父 시마즈 시게히데 의 影響을 받아 蘭學 에 興味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周圍의 눈에는 西洋文物에 執着하는 것으로 보여 얄궂게도 사쓰마번의 內紛 原因 中 하나가 되었다.

나리아키라가 領主가 되면 시게히데처럼 奢侈를 하여 번재정이 더욱 困窮하게 될 것이 念慮된 나리오키는 나리아키라가 40살이 넘도록 後繼者로 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신(家臣)의 우두머리였던 즈쇼 소사에몬 히로사토 와 나리오키의 側室人 오유라盧哥打 等은 나리아키라의 異腹同生 시마즈 히沙彌쓰 의 擁立을 劃策했다. 나리아키라의 側近들은 히社미쓰와 유라의 暗殺計劃을 세웠지만, 情報가 事前에 漏泄되어 主謀者 13名은 割腹 自殺, 그들과 連坐된 約 50名이 落鄕 및 謹愼에 處해졌고, 그 中 4사람이 必死的으로 脫出하며 시게히데의 13番 째 아들로 후쿠오카番 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번주 자리에 오른 구로다 나가히로 에게 도움을 請했다. 나가히로의 仲裁로 나리아키라와 親分이 있던 路中 (老中) 아베 마사히로 , 우와지마番 主人 다테 무네나리 , 후쿠이番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等이 事態收拾에 努力했다. 이렇게 하여 1851年 2月에 나리오키가 물러나고, 나리아키라가 제11대 사쓰마 번주로 就任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마즈 家門의 內紛을 오유라 騷動 으로 부르고 있다.

번주 就任 以後 [ 編輯 ]

榮州로 就任하자마자, 番의 富國强兵을 위해 西洋式 朝鮮(造船), 反射로 및 鎔鑛爐의 建設, 地雷, 受賂, 有利, 가스 等의 製造를 비롯한 西洋式 工業을 일으켰다. 道士番 出身으로 美國으로 漂流했다가 歸國한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를 불러들여 인세이 元年( 1854年 )에 西洋式 軍艦인 쇼헤이마루(昇平丸)를 乾燥해 도쿠가와 幕府에 獻上하였다. 그때 日章旗 를 日本배에 걸어야 한다고 幕府에 提案하여 그 해에 幕府에서 이를 正式으로 받아들였다. 以後, 日章旗는 日本의 國旗가 된다. 汎善用 犯逋를 自給하기 爲해 綿布 紡織 事業을 일으켰다. 또, 下級武士 出身의 醫師인 사이고 다카모리 , 오쿠보 도시미치 를 登用하여 그들을 통해 幕府의 政治에 關與하기도 한다.

나리아키라는 마쓰다이라 요시나가(후쿠이 번주), 다테 무네나리(우와지마 번주), 야마우치 尿道 (道士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 ( 미토番 週), 도쿠가와 요시카쓰 ( 誤와리番 週)等과 함께 領主가 되기전부터 交流를 하고 있었다. 나리아키라는 그들과 함께 幕府의 政治에도 積極的으로 參與하여 로주 마사히로에게 幕府에 依한 政治改革을 呼訴했다. 特히 美國의 페리 艦隊가 나타난 以後의 難局을 打開하려면 公務合體 의 길 以外에는 方法이 없다고 主張했다. 또, 1853年 11月에 養女인 덴쇼人 과 함께, 現在의 一連正宗 總本山인 多이세키지에 歸依했다.

1857年 年 로주 마사히로의 死亡 以後 1858年 多이로 가 된 李珥 나오스케 와 쇼군의 後繼者 問題로 正面對立하였다. 第13代 쇼軍人 도쿠가와 이에社다 는 病弱하고 子息이 없었기 때문에 무네나리 外 4名의 영주와 前 미토 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 等은 次期 쇼군에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後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를 擁立하기 위해 덴쇼人을 고노에(近衛) 家門의 養女로 보낸 後 이에사다의 正室夫人으로 시집보내는 等의 活動을 하였다. 李珥 나오스케는 이에 對抗하여 기슈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내세웠고 多理路의 地位를 利用해 强權을 發動해 反對派를 彈壓한 안세이 大屋 事件을 일으킨다. 그 結果,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로 登極하여 나리아키라 等은 後繼者 다툼에서 敗北하게 된다.

最後 [ 編輯 ]

나리아키라는 이에모치의 承繼에 抗議하기 위해 兵士 5000와 함께 上京할 豫定이었으나, 1858年 7月 8日 가고시마 姓 에서 出兵을 위한 練兵 觀覽 中 發病하여 7月 16日 콜레라 로 50歲에 死亡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赤字가 모두 夭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아버지인 나리오키나 동생 히沙彌쓰, 또는 그들의 支持者들의 陰謀 때문이라는 所聞도 있었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後 그의 遺言에 따라 히沙彌쓰의 長男인 시마즈 다다요시 가 뒤를 이었다.

人物·逸話 [ 編輯 ]

  • 나리아키라가 導入한 西洋文物의 一部는 現在 上告 집城館( 가고시마縣 )에 展示되어 있다. 그中에서도 琉璃工藝가 特히 有名하여 사쓰마의 다紅色 유리는 다이묘 사이에서 膳物로 주고받을 程度로 珍貴하게 여겨졌다. 메이지 維新 以後 그 技術은 斷絶되어 그 當時의 作品은 稀少價値를 지닌 骨董品으로 높은 評價를 받고 있다. 最近에 技術을 復元하는 데 成功하여 現在 사쓰마 기리코(薩摩切子)라는 이름으로 生産되고 있다.
  • 當時의 다이묘 中에서 가장 먼저 寫眞을 찍은 人物이라고 한다. 또 撮影 技術 自體에도 關心을 갖고 誠意 寫眞을 直接 찍어보는 等 旺盛한 好奇心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撮影한 寫眞은 當時 技術을 勘案한다면 良好한 水準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 후쿠이番 週), 야마우치 尿道 ( 道士番 週), 다테 무네나리 ( 우와지마番 株) 等과 함께 막말社縣侯 라고 稱해졌다.
  • 日本 國旗인 日章旗 의 揭揚을 처음으로 提案한 사람이라고 한다.
  • 사이고 다카모리 를 비롯한 維新 知事들에게 尊敬을 받아 그의 뒤를 따라 죽으려는 이가 있었을 程度이다. 메이지 時代를 이끌 人材를 길러낸 것도 그의 公的이라 할 수 있다.
  • 딸인 덴쇼人 과 함께 시즈오카현 의 多이세키地( 一連正宗 總本山)에 施主를 하기도 했지만, 그 敎理를 眞心으로 따랐는지는 硏究의 餘地를 남기고 있다.

系譜 [ 編輯 ]

多數의 子女 中, 成人이 된 것은 스마와의 사이의 딸 3名뿐으로, 全員이 동생 히社미츠 의 아들의 아내가 되었다. 더욱이, 養嗣子 타다요시 에게 시집간 딸 2名은 모두 難産으로 死亡하여, 無事히 聖人까지 子息이 자라고 自身도 목숨을 扶持한 것은 노리히메 單 한名뿐이었다. 나리아키라의 핏줄은 6男 테츠마루가 3歲의 나이로 夭折함에 따라, 男系 後孫은 끊겼고, 노리히메를 통해 女戒는 시미즈 家門의 여러 分家 等으로 이어졌다. 나리아키라의 어머니 李要히메 (카네코)는 돗토리番 이케다 하루미치 센다이番 다테 시게무라 의 딸 이쿠히메와의 子息이며,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다테 마사무네 , 모리 모토나리 의 피를 잇고 있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시마즈 나리오키
第11代 사쓰마번 번주
1851年 ~ 1858年
後任
시마즈 모치히社
前任
시마즈 나리오키
第28代 시마즈氏 堂主
1851年 ~ 1858年
後任
시마즈 타다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