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韓國 漢字
:
朴婉緖,
1931年
10月 20日
~
2011年
1月 22日
)는
大韓民國
의
小說家
이다. 本貫은
潘南
(潘南)이며
京畿道
開豐郡
出生이다. 40歲의 나이에 《
여성동아
》 長篇 小說 公募展에 〈
羅牧
〉(裸木)으로 當選되어 登壇하였다.
[1]
登壇한 以後 꾸준히
小說
과
散文
을 쓰며
作家
로 活動하였다.
그女의 作品은 "戰爭의 悲劇, 中産層의 삶, 女性問題"를 다루었으며, 自身만의 文體와 視角으로 作品을 敍述하였다.
[2]
韓國文學作家賞,
李箱文學賞
, 大韓民國文學賞,
이산文學賞
, 中央文化大賞,
現代文學賞
,
東人文學賞
,
大山文學賞
, 萬海文學賞 等을 受賞하였다.
[2]
2011年
1月 22日
에 持病인
膽囊癌
으로 死亡하였다.
[3]
享年 79歲. 小說家
정이현
은 追慕의 便紙에서 "‘韓國 文壇에 박완서라는 存在가 있다’는 事實이 수많은 女性作家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希望이었는지 先生님은 아실까요"라고 적었다.
[4]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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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京畿道
開豐郡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태어나 세 살 때
盲腸炎
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일곱 살 때
서울
로 移住했다.
[5]
1944年
에
淑明高等女學校
에 入學하였고, 擔任 敎師였던 小說家
박노갑
에게 影響을 받았다.
[5]
1950年
에
서울大學校
國文學科에 入學하였으나 그 해 여름
韓國 戰爭
이 勃發하였고, 戰爭으로 叔父와 오빠를 잃는 等 집안에 悲劇的인 事件들이 겹치면서 生活苦로 學業을 中斷하였다.
[2]
[6]
1953年
4月 21日에 職場에서 만난 호영진(扈榮鎭)과 結婚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1男 4女가 태어났다.
[5]
40代에 접어든
1970年
에 《
여성동아
》 長篇 小說 公募展에 〈
羅牧
〉(裸木)으로 當選되어 登壇하였다.
[1]
公募展에 當選될 때 그女는 다섯 아이를 둔 40歲의 專業主婦였다.
[4]
[7]
이 小說은 戰爭 中 老母와 어린 조카들의 生計를 위해 美軍部隊 肖像畫部에서 勤務할 때 만난 畫家
朴壽根
에 對한 內容이다.
天主敎人이며 洗禮名은
정혜 엘리사벳
이다.
[8]
家族을 잃은 衝擊에 박완서는 1988年에
서울
을 떠나서
釜山
에 位置한 분도수녀원에서 지내기도 했고, 美國旅行을 다녀오기도 했다.
[9]
박완서는
2011年
1月 22日
午前 6時 17分에 持病인
膽囊癌
으로 鬪病하다 享年 79歲로 世上을 떠났다.
[3]
2011年 1月 25日 午後 1時에 京畿道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天主敎 龍仁公園墓園의 墓地에 安葬되었다.
[10]
京畿道 구리시는 ‘박완서 文學館’을 建立하기로 했다. 2020年 開館을 目標로 討平圖書館 옆 1720m²에 地上 3層 規模로 建立推進豫定이다.
[11]
世界
[
編輯
]
作品 傾向은 自身의
戰爭
體驗을 바탕으로
韓半島 分斷
의 悲劇을 執拗하게 다루거나 小市民的 삶과 物質中心主義와 女性抑壓問題를 그린 內容이 많다.
[1]
後期 作品 亦是
1988年
에 病死한 男便을 看護하며 쓴 看病記 形式의 《여덟 個의 帽子로 남은 當身》(1991)을 비롯해 어린 時節과 戰爭 中 經驗을 敍述한 自傳的 小說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山이 正말 거기 있었을까》(1995) 等 自身이 直接 겪은 經驗을 土臺로 한 作品이 主를 이룬다. 評論家 황도경은 그女의 作品 世界에 對하여 "戰爭과 分斷으로 인해 일그러진 個個人들의 삶의 肖像, 都市文明 社會의 不毛性과 그 안에서의 虛僞的이고 物神主義的인 삶의 樣態, 권태롭고 無氣力한 小市民의 日常, 억눌린 女性 現實, 죽음과의 對面과 克服 等 그女의 文學이 담아낸 世界는 實로 놀랄 만큼 다양하다"라고 言及하였다.
[7]
體驗談(體驗談)
[
編輯
]
오빠와 男便과 아들의
죽음
으로 인해 겪은 個人的인 아픔이 作品에 影響을 주었다.
[12]
그女의 오빠는
6.25 戰爭
때
義勇軍
으로 나갔다가 負傷을 입고 돌아와 죽었으며, 이것은 그女에게 戰爭의 傷處이자 文學을 始作한 理由가 되었다.
[6]
박완서는 文藝誌 〈文學의 文學〉과의 對談에서 "6.25街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6.25街 안 났으면 先生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고, "힘든 時期를 겪고 남다른 經驗을 하면서 이걸 잊지 말고 記憶해야겠다, 언젠가는 이걸 쓰리라"는 생각을 했다고 言及하였다.
[6]
男便과 아들이 죽은 後에는
天主敎
를 믿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山이 正말 거기 있었을까》(1995), 《너무도 쓸쓸한 當身》(1998) 같은 自傳的 小說을 통해 삶에 對한 觀照를 드러내었다.
[6]
그女는 自身의 經驗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生活語法의 살아있는 文章으로 그려" 讀者들과 疏通하였다.
[1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실린 '作家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런 글을 小說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純全히 記憶力에만 依支해서" 글을 썼다고 告白했으며, 글을 통해서 "仔詳하고 眞實된 人間的인
證言
"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14]
또한 그女는 "쓰다 보니까 小說이나 隨筆 속에서 한두 番씩 우려먹지 않은 經驗이 거의 없었다"라고 적어, 1940年代 무렵의 經驗이 自身의 小說과 隨筆에서 活用되었음을 言及하였다.
[14]
文學的 成就와 文學觀(文學觀)
[
編輯
]
박완서의 文學的 成就는 "7,80年代
民衆民族文學
과
모더니즘
으로 兩分된 文學界에서 看過됐던
中産層
의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12]
崔元植
仁荷大
人文學部 敎授는 "中産層의 꿈과 中産層의 俗物性까지도 銳利하게 派해친 그것이 바로 이 분의 作品世界의 核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2]
小說家
정이현
은 박완서에 對해 "人間의 五臟六腑에 숨겨진
爲先
(僞善)과
虛僞意識
을 한 치도 숨김없이 太陽 아래 까발리고, 共感하게 하고, 그리하여 위로 받게 하던 評했다.
作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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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間 關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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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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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首相 및 徐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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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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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
나
다
“뉴시스, 小說家 박완서氏 別世”
. 2016年 3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22日에 確認함
.
- ↑
가
나
다
박완서 (1992年 10月 15日).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닷컴. 表紙쪽.
ISBN
89-01-01760-1
.
- ↑
가
나
“國民日報‘羅牧’ 作家 박완서, 膽囊癌 鬪病 中 別世”
. 2011年 11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22日에 確認함
.
- ↑
가
나
中央日報,‘韓國 文壇엔 박완서가 있다’는 事實, 얼마나 든든한 希望이었는지요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
가
나
다
박완서 (1994年 4月 25日). 《박완서 小說全集 7 엄마의 말뚝》. 世界史. 443쪽.
ISBN
89-338-0054-9 03810
.
- ↑
가
나
다
라
SBS, 小說로 '治癒의 삶' 살았던 故 박완서
- ↑
가
나
東亞日報, 小說家 박완서의 作品世界
- ↑
아시아투데이, 故 박완서 作家 哀悼..鄭鎭奭 樞機卿 ″훌륭한 분″
- ↑
박완서 (1994年 4月 25日). 《박완서 小說全集 7 엄마의 말뚝》. 世界史. 448쪽.
ISBN
89-338-0054-9 03810
.
- ↑
“뉴시스, 故 박완서 男便과 아들 곁에 永遠히 잠들다”
. 2015年 7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26日에 確認함
.
- ↑
中央日報, 小說家 박완서 生前 居住하던 구리에 文學館 建立 推進
- ↑
가
나
다
이승은 (2011年 1月 22日 21:04).
“苦痛을 疏通으로 治癒한 '이야기꾼' 박완서”
. YTN
. 2011年 1月 22日에 確認함
.
- ↑
“서울經濟, 小說家 박완서 他界…그女의 作品世界는”
. 2011年 11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23日에 確認함
.
- ↑
가
나
박완서 (1992年 10月 15日).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닷컴. 6-7쪽.
ISBN
89-01-01760-1
.
外部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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