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극가
(閔克可,
1788年
~
1840年
1月 30日
)는
朝鮮
의
天主敎
迫害
때에
殉敎
한
韓國 天主敎
의
103位 成人
中에 한 사람이다.
洗禮名
은
스테파노
(Stephanus)이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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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극가는
仁川
의 한 非天主敎
兩班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剛直하고 溫和한 性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中年日 때, 민극가는 아버지와 兄弟들과 함께
洗禮
를 받았고, 充實히 信仰生活을 이어 나갔다. 그는 結婚했지만, 그가 20歲 때, 夫人이 世上을 떠났다. 그는 再婚을 願치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와 親舊들이 그가 다른 敎友 女性과 結婚토록 說得했다. 後妻 또한 6~7年만에 世上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後妻와 함께 얻었던 딸 마저도 運命을 달리했다.
그 後 민극가는
漢陽
,
仁川
,
富平
,
水原
等을 떠돌면서 筆寫한 冊들을 팔아 生計를 維持했다. 그는 매우 篤實했으며
慈善
에도 熱心이었다. 그의 模範으로 인해 많은 非信者들이 改宗하게 되었다. 그는
敎理
先生
으로 任命되고부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非信者들을 改宗시키는데 더 큰 努力을 쏟았다.
민극가는
1839年
己亥年의 迫害
로
앵베르
主敎
와
宣敎師
들이
逮捕
되자 會長으로서 各地의 敎友들을 찾아 慰勞하고 激勵하였다. 그는 12月에
漢陽
近郊에서
逮捕
되었다. 그는 酷毒한
拷問
과 誘惑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自身의 信仰을 證言했다. 그는 여러 次例 주리를 틀리고 꼬챙이로 찔리는 苦痛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萬 臺의 매를 맞는다 하여도, 決코
하느님
을 否定할 수 없습니다. 當身께서 저를
釋放
시킨다면, 저는 信仰生活을 繼續할 뿐만 아니라 그 信仰을 널리 傳播할 것입니다." 刑吏들은 그를 더 極甚하게 매질했다. 그는
大棍
40餘臺를 맞았다. 그는
監獄
에 있는 동안 줄곧 背敎者들의 마음을 돌리고 그들의 信仰을 다시금 告白하도록 그들을 說得하였다.
敎理
敎師
민극가는 다시 法廷에 세워졌고
棍杖
30餘臺를 더 맞았다. 몇 日 後
1840年
1月 30日
에 그는
漢陽
의
捕廳
監獄
에서
絞首刑
을 받아
殉敎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歲였다.
諡福 · 詩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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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극가 스테파노는
1925年
7月 5日
에
聖 베드로 廣場
에서
敎皇
비오 11歲
가 집전한 79位
[1]
諡福式
을 통해
福者
품에 올랐고,
[2]
1984年
5月 6日
에
서울特別市
汝矣島
에서
韓國 天主敎
創立 200周年을 記念하여 訪韓한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가 집전한
미사
中에 이뤄진 103位
諡聖式
을 통해
成人
품에 올랐다.
參考 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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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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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