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다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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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 戰鬪
카이사르의 內戰 의 一部
날짜 紀元前 45年 3月 17日
場所
문다 (現在의 스페인 南部)
結果 카이사르 의 完璧한 勝利
카이사르 內戰의 終結
交戰國
카이사르 民衆派 元老院
指揮官
율리우스 카이사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페디우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마우레타니아의 步구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兵力
8個 ( 軍團 )
8,000(騎兵)
約 40,000名
13個 ( 軍團 )
約 70,000名
被害 規模
7,000 30,000

문다 戰鬪 는 紀元前 45年 3月 17日 히스파니아 南部의 문다에서 平原에서 벌어진 카이사르 民衆派와 元老院派 間의 戰鬪이다. 로마 共和政 末期 카이사르의 內戰 의 마지막 戰鬪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는 이 戰鬪에서 完璧하게 勝利함으로써 約 5年間의 內戰을 끝내고 로마의 唯一한 權力者가 되었다.

戰鬪全義 狀況 [ 編輯 ]

塔수스 戰鬪 에서 敗한 元老院派는 히스파니아 蔚테리오르 속注意 總督으로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를 獨自的으로 임명하고 카이사르가 派遣한 總督을 逐出했다. 元來 카이사르의 部下였던 將軍 티투스 라비에누스 와 또다른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亦是 폼페이우스派였던 아티우스 바루스는 히스파니아에 集結하여 原住民을 包攝해 카이사르에 反旗를 들었다. 그들은 13個群團을 編成한 後 코르도바 에서 카이사르軍과 對峙하였고 로마에 있던 카이사르는 이들과 對敵하려 迅速히 强行軍하여 히스파니아로 왔다.

戰鬪의 經過 [ 編輯 ]

紀元前 45年 3月 17日 元老院派 軍隊는 문다(현재의 스페인 南部)近處의 緩慢한 언덕에 津을 펼쳤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끌어내려고 하였으나 應하지 않자 全面 攻擊을 命令했다. 이 날의 戰鬪는 混戰 가운데 相當한 激戰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진형 右側에서 苦戰하고 있던 自身의 最精銳 第10軍團을 直接 督勵하여 元老院派 軍隊를 밀어낼 수 있었다. 그나이우스는 自身의 왼쪽 날개가 밀리자 右翼에서 왼쪽을 補强하려 했으나 기울어진 傳貰를 逆轉시키지 못하고 카이사르의 騎兵隊가 폼페이우스의 右翼을 덮치자 戰列이 무너졌다.

마우레타니아의 카이사르 同盟 騎兵隊가 뒤로 돌아 폼페이우스의 陣營을 攻擊했고 폼페이우스의 騎兵을 指揮하던 라비에누스는 이를 沮止하러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를 본 폼페이우스의 步兵隊는 라비에누스가 退却하는 것으로 誤判하고 混亂에 휩싸여 退却했으며 이로써 戰鬪는 카이사르의 勝利로 돌아갔다. 폼페이우스軍隊는 約 30,000名의 戰死者를 내었고 라비에누스와 그나이우스도 戰死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萬 가까스로 逃亡에 成功했다.

結果 [ 編輯 ]

이 戰鬪에서 비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도망쳤지만 더 以上 카이사르에 抗拒할 수 있는 形便은 아니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內戰 은 完全히 終結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가 凱旋式을 擧行하였고 곧 終身독재관에 就任하고 完全한 日人權力으로 로마를 掌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