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나카 시게하루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다케나카 시게하루/한베에
竹中 重治/半兵衛
無事 情報
時代 센고쿠 時代 ~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出生 덴分 13年 陰曆 9月 11日 ( 1544年 9月 27日 )
死亡 덴쇼 7年 陰曆 6月 13日 ( 1579年 7月 6日 )
改名 詩게토라(重虎) (初名), 시게하루(重治)
別名 通稱: 한베에(半兵衛)
誡命 深?水徹
主君 사이토 요시타쓰 (?藤龍興)→ 아자이 나가마사 (?井長政)→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
氏族 다케나카 氏 (竹中氏)
父母 아버지: 다케나카 시게모토 (竹中重元),
어머니:墓카이다이시(妙海大姉, 스기야마 구자에몬 (杉山久左衛門)의 딸)
兄弟姊妹 兄: 시게유키 (重行),
동생: 시게노리 (重矩)
配偶者 情實:도쿠게쓰인( 安堵 모리나리 (安藤守就)의 딸)
子女 시게카도 (重門)
墓所 에이운지(?運寺, 효고현 미키詩
젠도지(?幢寺, 기후縣 後와군 )
兆土地(?土寺, 시가현 히가시오미視

다케나카 시게하루 ( 日本語 : 竹中重治 , 1544年 9月 27日 ~ 1579年 7月 6日 )는 센고쿠 時代 부터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에 걸쳐 活躍한 武裝 이다. 初名은 詩게토라(重虎)로 後에 시게하루로 改名하였다. 統稱은 한베에(半兵衛). 卽, 다케나카 한베에 ( 日本語 : 竹中 半兵衛 )로 有名하다. 센고쿠 時代를 代表하는 軍事 [1] 로서 널리 알려져 있고,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 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參謀로서 活躍하여, 구로다 間베에(?田官兵衛, 구로다 요시타카 (?田孝高))와 한데 묶여「 料베에 」(?兵衛, 두 名의 베에(兵衛))라고 불렸다.

生涯 [ 編輯 ]

사이토 家門 時代 [ 編輯 ]

덴分 13年( 1544年 ), 미노 (美濃)의 사이토 家門(?藤氏)의 家臣이자 미노 오노群 (大野郡) 오미도 姓(大御堂城) 城主人 다케나카 시게모토의 子息으로 태어난다.

에이로쿠 元年( 1558年 ), 아버지는 後와군 (不破郡) 이와테 性(岩手城)을 攻略하여, 다음 해( 1559年 ), 보다이 酸性(菩提山城)을 築成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에이로쿠 3年( 1560年 ), 아버지의 죽음 或은 隱居(一說에 따르면 아버지의 死亡은 에이로쿠 5年( 1562年 이라고 한다)에 따라 家督을 相續하여, 보다이 酸性 성주가 되어 사이토 요시타쓰 (?藤義龍)를 섬긴다.

에이로쿠 4年( 1561年 ), 사이토 要試打쓰가 死亡하자, 그 뒤를 이은 사이토 다쓰오키 (?藤龍興)를 섬기게 되었다.

이 무렵에 誤와리 (尾張)의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의 미노 侵攻이 해가 갈수록 激해지지만, 요시타쓰 時代에는 노부나가의 攻勢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要試打쓰가 死亡하고 그 뒤를 이은 다쓰오키는 어린데다 凡庸한 長壽였기 때문에 家神段이 크게 動搖하여 오다 家門의 侵攻에 對해 適切하게 對應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한 狀況을 본 노부나가가 1561年 7月에 미노로 侵攻해 오나, 사이토 軍은 시게하루의 伏兵戰術로 오다 軍을 擊破했다고 한다.

에이로쿠 6年( 1563年 )에도 新카노(新加納)에서 오다 軍과 戰鬪를 벌이나, 이 때에도 시게하루의 戰術 德分에 사이토 軍이 勝利하였다.

그런데, 主君 다쓰오키는 酒色에 빠져 제대로 政務를 보지 않고, 몇 안되는 側近만을 寵愛하여 시게하루와 西미노 三人坊(西美濃三人衆, 이나바 잇테쓰 (?葉一?)? 安堵 모리나리 (安藤守就)? 우지이에 보쿠젠 (氏家卜全))을 政務에서 떼어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에이로쿠 7年( 1564年 ) 2月, 시게하루는 동생 시게노리와 張인 안도 모리나리와 함께 다쓰오키의 巨星 이나바 酸性 (?葉山城, 後의 氣候性(岐阜城))을 16名의 部下를 이끌고 單 하루만에 奪取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시게하루의 이나바 酸性 奪取를 알게 되자 自身에게 성을 내어주라고 要求했으나, 시게하루는 이를 拒絶하고 8月에는 性을 다쓰오키에게 返還하였다. [2]

그 뒤에는 사이토 家門을 나와, 北 오미 (近江)의 센고쿠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井長政)의 客場으로 히가시아자이 軍 (東?井郡]) 驅使盧(草野)에 3天官의 祿俸을 받지만, 約 1年 만에 물러나서 옛 領地 이와테로 돌아가 隱居하였다.

사이토 家門 滅亡 後 [ 編輯 ]

에이로쿠 10年( 1567年 ), 노부나가의 侵攻으로 사이토 家門은 滅亡했다. 노부나가는 浪人으로 지내는 시게하루를 家神으로 登用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미노 侵攻에서 頭角을 나타낸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木下藤吉?秀吉 , 後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의 任官 勸誘를 命하여, 히데요시는 시게하루를 登用하기 위하여「 三古知禮 (三顧の?)」를 다하였다. 이 때 시게하루는 히데요시의 才能을 看破하여 노부나가를 섬기는 것은 拒絶하겠지만, 히데요시의 家神이 되는 것은 承諾했다고 한다.(단, 이 逸話도 後世의 創作일 可能性이 높아서 最近에는 동생 시게노리와 마찬가지로 노부나가의 直屬 部下로서 登用에 應했다는 見解가 提示되고 있다. [3] )

後의 노부나가 包圍網이 펼쳐지고, 노부나가와 아자이 나가마사가 敵對하게 되자, 시게하루는 예전 나가마사의 家神이었을 때 形成한 아자이 가신단과의 人脈을 利用하여, 主로 計略을 짜내는 쪽에서 活躍하였다. 겐키 元年( 1570年 )에는 아자이 君의 兆테이켄 姓(長亭軒城)과 다케쿠라베 姓(長比城)을 策略을 써서 오다 쪽으로 背反시켰다. 直後의 아네價와 戰鬪 (姉川の?い)에도 安堵 모리나리의 軍勢에 屬하여 參戰하였다. 아네價와 戰鬪 뒤에 노부나가의 名으로 요코야마 姓(?山城)에 히데요시와 함께 머물게 되어, 이 때부터 노부나가 直屬에서 히데요시의 料理키(?力)로 바뀌었다. [3]

히데요시가 주고쿠 征伐 總司令官에 任命되자, 시게하루는 히데요시를 따라 주고쿠 征伐에 參加한다. 덴쇼 (天正) 6年( 1578年 ), 우키타 家門(宇喜多氏)의 非젠(備前) 하치만 酸性(八幡山城)을 策略으로 落成시켜서, 노부나가에게 賞讚을 받는다. 같은 해, 노부나가에게 謀反을 일으킨 아라키 無네시게(荒木村重)에 對하여(아리오카 星 戰鬪(有岡城の?い)), 히데요시의 幕僚인 구로다 요시타카 가 아리오카 城으로 向하여 무네시게에게 母斑의 뜻을 거두라고 說得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城 안에 포박당하여서 돌아오지 않자, 노부나가는 요시타카를 疑心하여 히데요시에게 요시타카의 嫡男 쇼쥬마루(松?丸, 後의 구로다 나가마사 )의 殺害를 命하였다. 그러나 시게하루는 히데요시에게 假짜 목을 보내, 쇼쥬마루의 목숨을 救했다. 그 後에 救出된 요시타카는 이 일을 대단히 고마워하여, 다케나카 家門의 文章을 받아 自身의 家門의 文章에 더하였다고 한다.

덴쇼 7年 ( 1579年 ) 4月, 시게하루는 벳쇼 나가하루 (別所 長治)가 지키는 하리마國 미키 姓 包圍戰 中에 病으로 쓰러졌다. 히데요시는 시게하루의 病勢를 걱정하여 교토 에서 療養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게하루는 이미 可望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無事답게 戰場에서 죽고 싶다고 히데요시에게 懇請하여, 6月 13日 하리마의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와 陣中에서 죽는다. 享年 36歲. 死因은 肺病( 肺炎 또는 肺結核 )으로 推定된다.

人物?逸話 [ 編輯 ]

  • 구로다 요시타카 와 함께「料베에(?兵衛)」라고 불리며, 한 王朝 建國 功臣 陳平 (陳平)에 比喩되고는 한다. 노부나가의 軍勢를 적은 軍事로 몇 番이나 擊破했기 때문에, 軍略의 天才로서 「現身한 구스盧키 (今楠木)」라고 稱해졌다. 《不코野와(武功夜話)》에는 "재주 있고 溫和하고 優雅하며, 菩薩의 자비로운 눈(慈眼)을 가지고 있고, 學問에도 才能이 있어 群棲에 밝다"라고 되어 있고, 前場에서는 恒常 「泰然自若한 姿勢」로 敵에게 맞섰다고 記述되어 있다.
  • 《다이코키(太閤記)》와 《上山奇談(常山紀談)》等에 依하면, 몸이 弱하고 마른 體型으로 女性 같으며, 出陣할 때도 조용히 말에 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이것은 漢 高祖 의 모신 丈量 의 이미지와 겹친다). 그런 容貌 때문에, 朱君 다쓰오키를 비롯한 사이토 가신단으로부터 輕蔑당하여, 다쓰오키의 銃身인 사이토 히다老카미(?藤飛?守)가 노(櫓) 위에서 시게하루의 얼굴을 向하여 小便을 보면서 嘲弄했던 적도 있다. 며칠 뒤, 히다老카미가 다쓰오키 邸宅에서 宿直을 맡고 있을 때, 시게하루는 이나바 酸性에 머물고 있던 동생 시게노리의 看病을 詐稱하여 舞具를 숨긴 箱子 等을 가지고 入城하여, 시게노리의 居室에서 武裝하고 宿直하고 있던 히다老카미를 慘殺하고 이나바 酸性을 奪取했다고 傳해진다.
  • 시게하루는 에도時代의 講談 等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와 함께 天才 軍事의 人物像이 굳어져, 現在의 人氣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申初코키(信長公記)》等에는 그에 對한 技術이 적어 實態는 잘 알 수 없다. 또한, 히데요시의 正式 家神이었다는 技術도 日次史料에는 없고, 오다 家門에서 히데요시에게 붙여진 料理키 武裝의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有名한 逸話로는 이나바 酸性 奪取 事件이 있으나, 그 理由에 關해서는 다쓰오키에 對한 怨恨 때문이라는 說, 安堵 모리나리의 失脚 때문이라는 說 等이 있다. 《다이코키》에는 시게하루는 다쓰오키를 諫하여 酒色을 그만두게 하려는 理由로 奪取를 敢行하여, 노부나가로부터 歸順하면 미노 國의 折半을 준다는 條件으로 勸誘받았으나 拒絶하고, 그대로 다쓰오키에게 性을 돌려주고 隱居하였다고 적혀 있다.
  • 隱居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家神으로 맞아 들이는 逸話는 《 三國志演義 》에서의 劉備(劉備) 諸葛亮(諸葛亮) 을 맞아들인 삼고지례가 모델이 되었다는 指摘이 있고, 아자이 氏 攻略, 주고쿠 征伐, 나가시노 戰鬪의 活躍에 對해서도 비슷한 指摘이 提起되고 있다.
  • 나가시노 戰鬪 (長篠の?い)에서 다케다 軍勢의 一部가 左側으로 移動했다. 히데요시는 軍勢가 그대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焦燥해 했으나, 시게하루는 오다 軍勢의 陣에 구멍을 내기 위한 陽動作戰이 아닌가 하고 進言하였다. 히데요시는 시게하루의 意見을 듣지 않고 兵士를 이끌고 追擊하러 갔으나, 시게하루는 反對하고 自身의 直屬 部隊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곧 다케다 軍勢가 元來의 位置로 돌아와 히데요시가 떠난 그 地點을 向해 攻擊해 들어왔다. 시게하루가 버티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도 急히 돌아와서 시게하루가 옳았다는 것이 證明되었다.
  • 주고쿠 征伐의 陣中에서 病死할 때, 最後의 策略으로, 미키 姓 兵糧 攻擊(籠城 側의 病量이 다할 때까지 包圍하는 作戰)을 히데요시에게 助言하여 벳쇼 나가하루를 降伏시킨다. 이러한 無血 開城 戰法은 後의 빗秋(備中) 다카마쓰 姓(高松城) 水攻에서도 통하였다.
  • 구로다 요시타카가 아무리 기다려도 히데요시가 지행(知行)을 約束한 만큼 늘려주지 않는 것에 不滿을 느껴, 히데요시의 手決(手決, 署名 代身 쓰이던 記號)이 들어간 文書를 가지고 히데요시 앞에 나타나 不平한 적이 있다. 그 때, 히데요시의 옆에 있던 시게하루가 그 文書를 빼앗아 찢고 태워버렸다. 놀라는 요시타카에게 "이런 文書가 있으니까 不滿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文書는 當身을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시게하루가 아들 社쿄(左京, 後의 다케나카 시게카도)에게 軍談(軍物語)을 가르치고 있는데, 社쿄가 갑자기 小便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게하루는 크게 怒하여 "오줌을 싸더라도 軍談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안 된다. 다케나카의 子息이 군談에 빠져 그만 邸宅을 더럽히고 말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다케나카 집안의 體面이 서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傳해진다.
  • 시게하루는 언제나 貧弱한 말을 사서 타고 打녔다. "當身 程度의 身分으로 그런 貧弱한 말을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요."라고 말하는 히데요시에게 "名馬를 타고 다니면 實際 戰鬪에서 그 말이 아까워 싸울 機會까지 놓칠 수 있으니 차라리 이런 말을 타는게 낫습니다."라고 對答했다고 한다.

各州 [ 編輯 ]

  1. 軍士라는 말은 創作物 像의 表現으로서의 意味가 크기 때문에, 實際로는 參謀라고 表現하는 쪽이 適切하다.
  2. 이에 對해서는 시게하루의 美談으로서 이야기되는 境遇가 많으나, 쿠데타를 劃策했지만 사이토 家門의 家臣들이 생각한대로 따라주지 않아 進退가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見解도 있다.
  3. 이케憂恥 쇼이치(池?昭一),《다케나카 한베에의 모든 것(竹中半兵衛のすべて)》, 新人物往?社,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