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聖鎭 (哲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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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聖鎭
金聖震
學者 情報
出生 1946年 11月 2日 ( 1946-11-02 ) (77歲)
소비에트 蘇聯 軍政 時代 北傀 末期 平安南道 大同郡 고평면 宋山里
職業 哲學者 大學 敎授
國籍 大韓民國
學歷 西獨 프라이부르크 大學校 大學院 哲學博士
經歷 한림大學校 哲學 과 名譽敎授
감신대學校 宗敎哲學 과 客員敎授
장신대學校 基督敎敎育學科 客員敎授
宗敎 改新敎 ( 長老會 )
活動期間 1981年~
學派 行動主義 宣敎 信仰 福音 傳道 色彩 生態學的 哲學
父母 김형석 (簿), 김옥수(某)
子女 김민경(딸)
김이경(아들)
兄弟 2男 4女 中 長男(둘째)
웹사이트 조인스 데이터

金聖鎭 (金聖震, 1946年 11月 2日 ~)은 大韓民國의 哲學者 大學 敎授 利子 基督敎 哲學 敎育人이다.

그는 아버지 김형석 敎授의 2男 4女 中 長男이자 둘째(누나 김성예 敎授 , 男동생 김성우 敎授 , 그 以外 누이同生 3名 있음.)이기도 하다.

그는 2012年 8月 當時까지 한림大學校 哲學 科 敎授를 歷任하였으며, 隱退하고 난 以後 2012年 8月 부터는 同巧 洞과 名譽敎授 等을 지내는 大學 敎授 哲學者 出身이다. 哲學者 名譽 哲學博士 김형석 延世大學校 哲學 과 名譽敎授의 長男(長男)으로 大韓哲學相談治療學會 會長 等을 歷任하였다. [1] 哲學뿐만 아니라 韓國宣敎歷史에 對한 解釋에서도 該博한 知識을 가진 學者로 評價받는다. [2] 哲學者로서 生態學的 人間像의 領域도 硏究하였다. 生態學的 危機가 왜 哲學의 課題인지를 짚으며 새로운 生態學的 人間像을 摸索하는 獨逸 哲學 分野의 傾向을 [3] 大韓民國 國內에 紹介키도 했다.

生涯 [ 編輯 ]

소비에트 蘇聯 軍政 時代 北傀 末期 平安南道 大同郡 고평면 宋山里 에서 出生하여, 아직 生後 5個月도 아니 된 어린 時節에, 만으로 두살터울의 누나 김성예(後날 長成하여 大學 敎授)와 함께, 어머니 김옥수(지난 2003年 5月 하세)와 寡婦 親할머니(지난 2003年 3月 하세)가 매어둔 襁褓에 싸여 아버지 김형석 (後날 連帶 哲學科 名譽敎授), 어머니 김옥수(2003年 5月 하세), 홀할머님(2003年 3月 하세) 等과 모두 함께 1947年 3月 5日 當時 美軍政 朝鮮의 首都 서울로 越南한 그는 後날 1969年, 高麗大學校 哲學 課에서 學士 學位 를 取得한 後 獨逸 프라이부르크 大學校 大學院에서 哲學 (主戰공), 中國學 , 神學 專攻으로 碩士 博士 學位 를 取得했다. 博士 學位 論文은 「Der Widerspruch und das Urteil in Platons Parmenides(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서의 矛盾과 判斷)」이다. 古代 그리스哲學, 中世基督敎哲學, 環境生態哲學 分野를 主로 硏究하고 講義했으며 多數의 學術誌 發表 論文과 著書 및 飜譯書를 出刊했다. 獨逸 DAAD 支援으로 프라이부르크 大學校 硏究敎授, 美國 콜로라도州立大學校 硏究敎授를 歷任했다. 韓國哲學會 , 哲學硏究會, 韓國西洋古典學會, 韓國環境哲學會, 韓國基督敎哲學會 等에서 會員과 任員으로 活動했다. 2007年 以後 哲學相談治療의 國內 定着과 擴散을 위한 硏究와 敎育 및 學會 活動에 積極 參與하고 있고, 哲學的 相談과 治療를 包含하는 哲學 實踐家 養成과 公認 資格證 制度를 정착시킴에 努力을 기울이고 있으며, 韓國哲學相談治療學會 名譽會長 및 哲學相談治療 修鍊監督으로서 哲學實踐 領域의 硏究와 敎育 活動하고 있다.

心的인 治療로써 哲學의 役割 [ 編輯 ]

그는 '지혜롭게 생각하기'와 '哲學的으로 생각하기'로 哲學이 各自의 생각하기에서 誤謬를 犯하지 않고 失手하지 않는 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지혜롭게 생각하기는 哲學을 함으로써 論理, 合理的 思考와 批判的 思考 以外에도 綜合的, 創意的 思考를 提供하게 된다는 主張이다.

哲學的으로 생각하기를 통해 不可避한 存在論的 事故와 形而上學的 思考, 價値論的 思考와 人間學, 生態學的 事故 그리고 自己反省的 思考까지 領域을 넓힐 수 있다고 했다. "나와 나 自身과의 내면적(自己反省的) 關係 等이 나의 실존적 存在 樣相을 決定하는 根本 條件들이다"고 말한 그는 "모든 사람들이 各自의 삶에서 專門家 水準까지 오르기는 어려운 關係로 專門的 素養과 訓鍊을 갖춘 哲學 相談師와 哲學的 治療師가 必要하다"고 主張했다.

이어 그는 호머( 호메로스 )와 아리스토텔레스 等의 哲學的 相談과 治療를 說明했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의 辨證法的 對話法을 통해 哲學的 相談과 治療의 可能性을 提示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實踐했고, 플라톤에 依해 記錄으로 남겨진 哲學的 智慧사랑의 精神과 辨證法的 對話 方法論은 古代 後記 헬레니즘 時代의 哲學者들에 依해 繼承됐다"며 "여기에서 '哲學은 治療다'라는 大膽하고도 簡潔한 命題와 만났다. 정작 治療되어야 할 病은 身體의 病이 아니라 '마음의 病'이다. 그리고 마음의 病은 그 原因이 나 自身에게 있음"을 확인시켰다. '人間의 苦痛을 治療해 주지 못하는 哲學者의 말은 空虛할 뿐이다. 身體의 病을 除去해 주지 못하는 醫術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듯, 哲學에 있어서도 그것이 마음의 病을 除去해 주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그리스 哲學者 에피쿠로스의 말을 引用해 哲學治療의 根源을 밝혔다. [4]

相談 疏通 關聯 哲學 探究 [ 編輯 ]

相談에서도 對話疏通 分野에 相談者의 來談者 探究를 主張하였다. 效果的인 相談과 來談者의 正確한 自己表現을 重要視한다. 結局 이러한 相談 對話의 疏通 過程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事件은 相談師와 來談者 사이에서 벌어지는 삶 體驗의 言語化 過程이라 力說하였다. 言語化 過程은 또한 人生事 體驗의 言語的 再現이며, 反省的 考察 對象으로서 客觀化시켜진다. 이 作業을 그 누군가와 함께 遂行할 境遇, 特히 專門 相談師를 만나서 함께 共同 作業으로 遂行할 境遇라면, 나 혼자만의 主觀的 생각과 判斷이나 感情에 沒頭하는 것과는 全혀 다른 客觀化, 對象化 또는 社會化 過程이 展開될 수 있다고 한다. [5]

主要 經歷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