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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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 바르바라
殉敎者
出生 1794年
서울 [1]
腺腫 1839年 9月 3日
서울 西小門
敎派 로마 가톨릭교회
諡福 1925年 7月 5日 敎皇 비오 11歲
諡聖 1984年 5月 6日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祝日 9月 20日

권희 (權喜, 1794年 ~ 1839年 9月 3日 )는 朝鮮 天主敎 迫害 때에 殉敎 韓國 天主敎 103位 成人 中에 한 사람이다. 洗禮名 바르바라 (Barbara)이다.

그女는 殉敎者 집안 사람이다. 그女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의 夫人이며 이 阿伽陀 의 어머니이며 이광렬 요한 의 兄嫂이다.

生涯 [ 編輯 ]

권희는 한 異敎徒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817年 經에 그女의 男便과 함께 天主敎 信者가 되었다. 迫害 에도 不拘하고 그女는 危險을 무릅쓰고 앵베르 主敎 宣敎師 들에게 宿食을 提供해주었다. 또한 그女는 그 사람들이 그女의 집을 미사 成事 그리고 敎理 授業을 위한 모임 場所로 使用하도록 許諾해주었다.

1839年 己亥迫害 4月 7日 에 권희는 모든 家族과 함께 逮捕 되어 捕盜廳 刑曹 에서 여러 次例 酷毒한 拷問 을 받았다. 그女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같이 逮捕된 그女의 16歲 된 딸과 보다 어린 아들이 悽慘한 拷問과 배고픔, 목마름 그리고 추위를 겪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刑吏들은 에 刑曹에서 어린이들을 審問 하는 것이 禁止되어 있었다는 口實로, 拷問 中에 그女와 子息들을 再會케도 하며 그女에게 背敎를 强要했다. 얼마 後에 권희의 媤어머니와 아들은 釋放되었지만, 딸은 남아서 어머니와 함께 慘酷한 收監 生活과 拷問을 마저 견뎠다.

권희는 모든 誘惑과 刑罰 그리고 拷問을 견뎠으며 5個月 間의 獄苦 끝에 1839年 9月 3日 西小門 밖으로 끌려나가 다섯 名의 敎友들과 함께 斬首 되었다. 그女가 殉敎 의 榮冠을 썼을 때의 나이 46歲였다.

諡福 · 詩聖 [ 編輯 ]

권희 바르바라는 1925年 7月 5日 로마 聖 베드로 廣場 에서 敎皇 비오 11歲 가 집전한 79位 [2] 諡福式 을 통해 福者 품에 올랐고, [3] 1984年 5月 6日 서울特別市 汝矣島 에서 韓國 天主敎 創立 200周年을 記念하여 訪韓한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가 집전한 미사 中 이뤄진 103位 諡聖式 을 통해 成人 품에 올랐다.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
  2. 〈103位 成人 (百三位聖人)〉 . 《韓國 브리태니커 온라인》. 2014年 10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0月 18日에 確認함 . 1839年 己亥年 부터 1846年 丙午年 사이의 殉敎者 諡福式 1925年 7月 5日 擧行되었고, 1866年 丙寅迫害 當時 흥선大院君 迫害 殉敎 한 24位의 諡福式 (諡福式)李 1968年 10月 6日 로마 性베드로 大聖堂 에서 擧行되었다. 이로써 韓國의 로마 가톨릭교회 는 모두 103位의 殉敎福者(殉敎福者)를 지니게 되었다.  
  3. 이상도 (2014年 7月 24日). “敎皇, 和解와 平和..8月의 크리스마스되길” . 평화방송. 2014年 10月 1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0月 19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