荊南 4軍 戰鬪
(?南 四郡 戰鬪)는
劉備
가
赤壁 大戰
後
형주
南部의 네
軍
人
영릉
,
桂陽
,
武陵
,
장사
를 平定한
戰鬪
이다.
영릉 戰鬪
[
編輯
]
劉備
가 쳐들어오자
영릉
태수
柳濯
의 아들
유현
이 英陵의 盲腸
兄도영
과 함께 劉備에 맞선다.
그러나 兄도영은
諸葛亮
의 計略으로
조운
에게 戰死하고 幽玄은
裝備
에게 사로잡히면서 結局 영릉 太守 柔道는 降伏한다.
桂陽 戰鬪
[
編輯
]
영릉
이 平定되자
劉備
의 部下
조운
이 繼養을 攻擊한다. 조운의 實力을 알아본
桂陽
태수
組犯
은 降伏한다.
組犯은 漕運과 義兄弟를 맺고 自身의 兄嫂를 맺어주려 하지만 조운은 人倫을 저버리는 일이라 하며 火가 나 돌아가버린다.
이에 部下
眞응
과
抛륭
이 組犯을 부추겨 거짓 降伏으로 漕運을 攻擊하려 하지만 일은 發覺되어 眞응과 抛륭은 漕運에게 잡혀 處刑되고 계양성으로 進軍해 組犯을 다시 붙잡는다.
武陵 戰鬪
[
編輯
]
조운이 桂陽乙 平定하자 이에
裝備
가 1000名의 軍士를 이끌고 武陵을 攻擊하고 이에 武陵 태수
金仙
은 精銳 病死로 裝備에 맞서 보지만 部下
公知
에게 殺害當하고 劉備는 公知를 武陵 太守로 봉하면서 武陵은 平定된다.
葬事 戰鬪
[
編輯
]
劉備
의 部下
關羽
는 장사性을 平定하기 위해 가고 장사의 名匠
蝗蟲
과 激突한다.
한현
의 部下 官軍敎委
量令
이 軍事 1000名을 이끌고 先鋒에 서지만 關羽에게 單칼에 베어져 버린다.
關羽는 蝗蟲과의 첫 싸움이 無勝負로 끝나자 關羽와 蝗蟲은 다음 날 다시 맞서고 이때 蝗蟲의 말 앞다리가 부러져 蝗蟲이 굴러떨어지지만 關羽는 義理를 지키며 自己 陣營으로 물러난다.
關羽의 모습에 感歎한 蝗蟲은 활을 關羽에게 쏘지만 일부러 빛 맞춰 쏜 뒤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장사 太守
한현
은 이 모습을 口實로 蝗蟲이 關羽와 內通한 것이라 알고 蝗蟲을 잡지만 한현의 部下
위연
이 이 일에 憤怒해 한현을 죽이고 蝗蟲을 救해줘 劉備에게 投降한다.
劉備는 시골에 묻혀 살던 옛 荊州 自社
遊標
의 조카
鍮盤
을 長沙 太守로 봉하고 장사는 平定된다.
情事의 描寫
[
編輯
]
진수
의 《
正史 三國志
》에는 劉備의 荊南 4軍 評定은 實際 時期로는
注油
와
調印
이 1年 동안
南軍 戰鬪
를 펼치는 期間에 劉備가 平定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연
이 劉備의 部下가 된 건 實際로는 劉備가 형주에 있을 때 釜谷으로서 이미 劉備의 部下였고 위連이 演義에서 처음 登場할 때부터 背信을 하며 登場하고, 諸葛亮이 反骨의 賞을 言及하며 그를 죽이려 했던 건 後에 있을 위연의 反逆에 對한 演義의 小說的 伏線 裝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