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語 運動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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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語 運動 (國語 運動) 의 歷史 1886年 < 漢城週報 >에서 처음으로 國漢文 混用體 가 이루어진 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文體가 單行本에 使用된 것은 1895年 유길준 (兪吉濬)의 < 西遊見聞 (西遊見聞)>이 처음이었다. 이 冊은 文章에 있어서 最初로 言文一致 (言文一致)를 내세운 것으로 스스로 實踐에 옮겼다는 데에 意義가 크다. 한便 甲午更張 直後 各種 公文書와 官報에 國漢文을 混用해서 쓰기 始作했고, 이듬해에는 學部 編修局(學部編修局)에서 敎科書와 < 國民小學讀本 (國民小學讀本)> < 萬國支持 (萬國地誌)> 等이 모두 國漢文 混用體를 썼고, 1895年 以後에는 中學校의 敎科目은 國文을 中心으로 쓰게 되었다. 1896年에 創刊된 < 獨立新聞 >은 純한글 로 發行하여 그 文體도 言文一致에 接近하였다. 1907年 에는 國文硏究所 가 設置되어 國語運動의 熱을 高調시켰고, 學者들의 國語硏究와 著述이 續出하게 되었다. 그 主要한 것으로는 光武 初期의 兪吉濬의 < 朝鮮文典 >, 1897年 에 나온 이봉운 의 < 國文正理 >를 비롯하여 1905年 지석영 (池錫永)의 < 新訂國文 >, 1908年 에는 주시경 (周時經)의 < 朝鮮語文展淫虐 >, 최광옥 의 < 大韓文典 >, 1909年 에는 兪吉濬의 < 朝鮮文典 >, 周時經의 < 國語文法 > 等이 나왔다. 이렇게 甲午更張을 전후해 國語運動이 活潑하게 展開되어,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 新文學 運動에도 直接的인 터전이 되었다.

以下는 國語運動을 主導한 人物들과 主要 著書 中心으로 敍述한다.

유길준(兪吉濬, 1856年 ~ 1914年 ) [ 編輯 ]

號는 救黨(矩堂). 大韓帝國 時代의 國語學者이며, 新文學 運動의 先驅者. 日本 게이오 義塾(慶應義塾)과 美國 워싱턴 大學에 留學했고, 1899年 <西遊見聞>을 내었으며, 光武 初年엔 韓國 最初의 文法冊 <朝鮮文典(朝鮮文典)>을 내었다.

西遊見聞(西遊見聞) [ 編輯 ]

1895年 (高宗 32年) 兪吉濬이 지은 隨筆集. 新聞學期 最初의 紀行文으로, 內容은 美國·유럽을 見聞한 바를 적어 韓國 사람을 깨우치려고 目的했다. 韓國 最初의 國漢文 混用體의 冊으로 言文一致 運動의 先驅가 되었다. 이 冊의 序文에서 '國漢文을 混用하는 것은 語의(語意)가 平脣(平順)하고 文字를 조금 아는 사람에게도 알기 쉽게 함이라' 하고, 文字는 '사람의 생각하는 바를 形象(形象)으로 나타내는 것이니, 말과 文章을 나누면 둘이요 合하면 하나라' 하여, 體系的 理論은 아니나 文章에서의 言文一致를 主張했다.

朝鮮文典(朝鮮文典) [ 編輯 ]

光武 初期에 兪吉濬이 지은 문법책. 韓國 最初의 體系化된 文法冊으로 內容은 序文·言語篇·文章便·附錄으로 되어 있다.

최광옥(崔光玉, 1879年 ~ 1911年 ) [ 編輯 ]

大韓文典(大韓文典) [ 編輯 ]

隆熙 2年( 1908年 ) 崔光玉이 <朝鮮文典>을 模倣한 <大韓文典(大韓文典)>을 發刊하였다. 김민수 敎授의 <國語 文法論 硏究>에 依하면 1909年 兪吉濬의 < #朝鮮文典 >을 다시 增補한 것이라 한다.

이봉운(李鳳雲, ?~?) [ 編輯 ]

國文正理(國文正理) [ 編輯 ]

1897年 ( 建陽 2) 이봉운 이 지은 문법책. 甲午更張 以後 맨 처음의 國語硏究書인 만큼 意義가 크다. 一種의 文法冊으로 內容은 序文·음성문·文法論의 셋으로 되어 있으나 文法論은 大槪 吏讀의 土(口訣)에 該當되는 것의 分類에 지나지 않는 만큼 文法冊과는 距離가 멀다.

지석영(池錫永, 1855年 ~ 1935年 ) [ 編輯 ]

朝鮮時代 末期의 國語學者·醫學者. 學部 國文硏究所 硏究員. 1899年 醫學校를 세웠고, 新文化運動에 功이 크며, 韓國에 처음으로 牛痘 를 들여왔다. 語學 方面으로는 <新訂國文> <字典釋要(字典釋要)> 等을 지었다.

新訂國文(新訂國文) [ 編輯 ]

朝鮮 高宗 光武 때 지석영(池錫永)이 지은 國文 關係의 上疏文. 內容은 國文을 널리 쓰자는 것. 닿소리 을 없애고 14字로 하자는 것. 홀소리 는 ' ' 者를 없애고 '∥'라는 새 글字를 만들자는 것. 된소리 는 雙書( · · ·ㅆ)로 表記하자고 主張했다.

주시경(周時經, 1876年 ~ 1914年 ) [ 編輯 ]

朝鮮時代 末期 國語學 을 中興시킨 現代 國語學의 先驅者. 號는 한힌샘. 어려서부터 우리말 硏究에 뜻을 두었고, 뒤에 朝鮮語講習院 (朝鮮語講習院)을 세워 한글 普及에 힘썼다. 著書에 <朝鮮語文展淫虐> <國語文法> <말의 소리> 等이 있다.

國文硏究所(國文硏究所) [ 編輯 ]

1907年(光武 11) 7月에 學部 에 設置되었던 國文 硏究機關. 주시경 , 어윤적 , 지석영 , 이능화 , 윤돈구(尹敦求), 권보상(權輔相), 二億(李億), 송기용(宋綺用) 等이 委員으로 活動했으며, 約 3年 동안 20餘 回에 걸쳐 國文統一에 對한 討議를 했으나, 當時의 不安定한 政局으로 말미암아 建議된 안의 實施를 보지 못했다.

朝鮮語文展淫虐(朝鮮語文典音學) [ 編輯 ]

1908年 周時經이 지은 語學 冊. 말本意 音聲論 · 品詞論 · 文章論 中에서 音聲論만 뽑아 弟子들이 刊行한 것.

國語文法(國語文法) [ 編輯 ]

1909年 周時經이 지은 문법책. 이 冊은 크게 音聲學 (音聲學)· 品詞論 (品詞論)· 構文論 (構文論)으로 나누어 說明했는데, 名實共히 現代 文法의 體系를 開拓하여 뒤에 < 한글맞춤法統一案 >의 基本 理論을 세웠다.

박승빈(朴勝彬, 1880~1943) [ 編輯 ]

法律家 , 敎育者 , 國語學者 , 社會運動家 이다. 號는 학범(學凡). 江原道 鐵原 出生이다. 1907年 日本 도쿄 주오 大學 法學科를 卒業하고 歸國해 1908年 檢事로 일하다가 1909年 辯護士로 開業했다. [1] 1925年 보성전문학교 校長에 就任하였다.

1931年 朝鮮語學硏究會 를 組織하고 機關紙 〈正音(正音)〉을 發刊하여 主流인 주시경 系統의 朝鮮語學會 와 對立하였다. [2] 國語硏究에 뜻을 두게 된 直接的 動機는 法律家로서 法典(法典) 編纂을 企劃하면서 國語表記法의 統一이 必要함을 切感하게 된 데에 있었다. 周圍의 大勢가 自身의 主張과는 相反되는 逆境 속에서였지만, 自身의 所信을 끈질기게 主張하며 時流에 맞섰던 意志와 執念 强했다. 言語에 對한 硏究理論은 複雜한 것이 될 수 있지만, 一般大衆이 使用할 正書法은 簡便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한 民族의 言語나 表記法은 歷史的 持續體여야 한다는 命題를 바탕으로 하여, 複雜하며 革新的인 「한글마춤法統一案」에 反對하였다. 그러나 社會의 同調를 얻지 못했다. [1]

1931年 최남선(崔南善) ·吳世昌(吳世昌) 等과 함께 啓明俱樂部를 組織 《誡命(啓明)》 《臣民公論(新民公論)》 《樂園(樂園)》 《新天地(新天地)》 《新靑年(新靑年)》 等의 雜誌를 發刊하는 한便, 隨便의 苦戰을 出版하는 等 大衆啓蒙에 힘쓰면서 言論의 힘으로 日本과 鬪爭했다. [2]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 박승빈 [朴勝彬]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2. [네이버 知識百科] 박승빈 [朴勝彬] (두산百科)


著書에 《朝鮮語學講義要地》, 《朝鮮語學》, 《朝鮮語學會事情 '한글맞춤法統一案'에 對한 批判》, 《簡易朝鮮語文法》 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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