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임전보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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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전보국단 (朝鮮臨戰保國團)은 日帝强占期 末期인 1941年 9月 太平洋 戰爭 支援을 위해 여러 團體들이 統合되어 組織된 聯合 團體이다. 10月 21日 에 結成式을 하였다. 줄여서 임보단 , 保國團 으로도 불렀다.

槪要 [ 編輯 ]

崔麟 , 김동환 이 主導한 臨戰對策協議會 윤치호 系列의 흥아保國團 이 統合하여 結成되었다. 設立 目標는 黃道정신의 宣揚과 傳貰體制下에서의 國民生活 刷新을 推進한다는 것이었다.

設立 趣旨文에 따르면, 半島民衆은 特別志願兵 外에 兵役에 服務할 名譽를 가지지 못하므로 無限한 皇恩에 萬分의 一이라도 報答하기 위해 國民運動의 强力한 하나의 機關으로서의 團體를 設立한다면서 2千 4百萬 朝鮮民衆에게 愛國의 指定을 呼訴하고 있다. 團體의 綱領으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내걸었다.

  1. 黃道精神 宣揚과 思想의 統一
  2. 戰時體制의 國民生活 刷新
  3. 國民 모두의 勞動報國
  4. 國家優先의 原則下에 貯蓄, 生産, 供出 等에 協力
  5. 國防思想의 普及

1941年 10月 22日 府民館 大講堂에서 조선임전보국단 出帆式이 열렸고, 2千4百萬 反道民 모두 一致結束하여 聖戰完遂를 통해 皇國의 興戎을 期할 것을 盟誓하는 宣誓文度 朗讀되었다. 傘下에 女性界 人士들로 構成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두는 等 約 1年 동안 活潑한 活動을 하다가 이듬해 國民總力朝鮮聯盟 으로 吸收 統合되었다. 그러나 윤치호 는 會長職을 仕樣한데 이어 臨戰保國團 行事에 여러番 不參하여 論難이 되었다.

親日 活動 例示 [ 編輯 ]

光復後 副統領까지 하였던 金性洙 1937年 부터 1945年 까지 實力養成運動을 비롯한 民族運動이 朝鮮總督府 의 苛酷한 民族抹殺政策 으로 彈壓을 받아 '合法的 空間'에서의 活動이 어려워지자 1942年 前後 親日派 로 變節됐다. 日章旗 抹消事件 으로 廢刊되어 1937年 6月 復刊된 東亞日報 에는 日本 의 侵略戰爭을 爲한 志願兵을 積極 勸奬하거나 美化하는 記事글이 여러 番 올랐다. [1] 5月부터 보성전문학교 校長으로 다시 就任해 있었던 金性洙 7月 7日 中日戰爭 이 勃發하자, 金性洙는 戰爭의 意味를 宣傳하기 위해 마련된 京城放送局 의 라디오 時局講座 擔當 및 演說을 하였고(7월 30日과 8月 2日 이틀 동안), 8月 鏡城郡事後願聯盟에 國防獻金 1000원을 獻納했다. [2] 9月에는 總督府 學務局이 主催한 '時局講演臺'의 一員으로 春川, 鐵圓 等 江原道 一帶에서 演士로서 時局講演에 나섰다. 1938年 6月 에는 親日團體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發起人·理事 및 傘下의 非常時生活改善委員會 委員 等을 지냈다. 이밖에 國民總力朝鮮聯盟 發起人 및 移徙(1940)·國民總力朝鮮聯盟 總務委員(1943), 흥아保國團 (興亞報國團) 結成 準備委員(1941), 조선임전보국단 感謝(1941) 等으로 活動하면서 1943年 ~ 1945年 期間 동안 每日申報 京城日報 , 《 春秋 》等에 學兵制·徵兵制를 讚揚하는 內容의 總 25篇의 論說 글 및 社說을 寄稿했다. [3]

朝鮮 徵兵令 感謝週間에 當하여 所感의 一端을 들어 三 가 半島靑年 諸君의 일고(一考)를 燭(促)코자 한다. 昨年 5月 8日 突然히 發布된 朝鮮에 徵兵令 實施의 快報는 실로 半島 2千5百萬 同胞의 一帶 感激이며 一帶 光榮이라 當時 全域을 통하여 旋風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比喩할 바가 없었으며 五等 半島靑年을 相對로 敎育에 從事하는 者로서는 特히 一旦의 感懷가 心折(深切)하였던 바이다.

? 每日申報 1943年 8月 5日子 "文弱의 氣質을 버리고 常務氣風을 造成하라."

諸君의 犧牲은 決코 價値 없는 犧牲이 아닐 것을 나는 諸君에게 言明한다. 諸君이 生을 받은 이 半島를 위하여 犧牲됨으로써 이 半島는 皇國으로서의 資格을 完遂하게 되는 것이며 半島의 未來는 오직 諸君의 去就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 每日申報 1943年 11月 6日子 "大義에 죽을 때, 황민의 責務는 크다"

이 過程에서 그가 1930年 12月 30日 朝鮮總督府 總督 사이토 마코토 에게 보낸 便紙가 一部 公開되었다.

...(以上省略)...이番에 健康이 좋지 않아 朝鮮을 떠나시게 된 것은 正말로 유감스럽습니다. 閣下가 朝鮮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가지로 厚情(厚情)을 입었습니다. 그 中에서도 京城紡織會社를 위해 특별한 配慮를 받은 것은 感銘海 마지않으며 깊이 感謝말씀 올립니다. 惜別의 情으로 別便(別便)에 조촐하지만 旗國(器局)을 하나 보냅니다. 記念으로 받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榮光으로 여기겠습니다. ...(以下省略)...

오긍선 (1878~1963)은 1902年 美國에 留學하여 1907年 3月 루이빌 醫大를 卒業하고 10月 美國 남長老敎會 宣敎師 資格으로 歸國했다. 群山, 光州, 木浦의 耶蘇敎病院 院長을 지내고 1912年부터는 세브란스의전에서 敎授로 活動했다. 1921年에는 學監, 그리고 1934年에는 에비슨을 이어 세브란스의전의 第2代 校長이 되었다. 오긍선의 親日 活動은 比較的 일찍 始作된다. 1921年, 3·1運動 以後 民心을 안정시킬 目的으로 親日 勢力이 組織한 流民會(維民會)의 評議員으로 選任되었고, 1924年 "內鮮融和의 徹底한 實行"을 내걸고 結成된 동민회(同民會)에도 參與했다. 1932年부터 1940年까지 總督府의 敎育 諮問 機構인 朝鮮敎育會의 評議員을 지냈고 1937年에는 鏡城郡事後願聯盟 副會長이 되었다. 1938年에는 朝鮮志願兵制度制定祝賀會의 發起人과 實行委員을 맡았으며 宗敎 活動을 통한 皇民化 運動을 目標로 하는 朝鮮基督敎聯合會의 評議員으로 參與했다. 또 思想犯의 轉向을 促進하는 京城保護觀察所의 主任待遇 囑託保護士로도 活動했다. 1939年에는 朝鮮人의 志願兵 參加를 督勵하기 위해 組織된 京城府志願兵後援會 理事와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常任理事를 맡았다. 1941年에는 조선임전보국단 發起人 및 評議員이 되었다. <半島의 빛> 1942年 1月號에 "臨戰下(臨戰下)에 新年을 마지하여"라는 글을 發表하여 "戰線에서 싸우는 將兵에게 感謝한 마음을 잊지 말며, 後方에 있는 우리는 各各 自己가 하는 '職務의 軍人'임을 한層 더 覺悟하라"고 했다. 1943年 11月 6日子 <每日申報>에 學徒志願兵 支援 促求를 위한 '學徒餘 聖戰에 나서라'는 特輯에 "환하게 열린 正路(征路) ― 躊躇 말고 곧 突進하라"를 寄稿하여 '大동아 建設'을 위해 敵國인 美國과 英國을 擊滅하는 決戰場으로 躊躇 없이 나설 것을 促求했다. 오긍선은 1949年 8月 反民特委에 自首하여 調査를 받고 풀려났다.

정구충(1895~1986)은 1921年 오사카醫大를 卒業했고 1932年 같은 大學에서 醫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23年부터 1928年까지는 安東과 海州 等의 道立醫院에서 外科科長으로 勤務했고, 1937年부터는 京城女子儀典의 外科 敎授로 일했다. 1937年 朝鮮軍士後援聯盟 評議員, 1938年 朝鮮志願兵制度制定祝賀會 發起人, 1939年 背泳(排英)同志會 評議員, 1941年 조선임전보국단 發起人 및 評議員 等 親日 御用團體에서 活動했다. "學兵이여 잘 싸워라"(<매일신보> 1943年 11月 26日子), "出陣하는 靑年學徒에게 高喊―歷史的 潮流를 타라"(<春秋> 1943年 12月號) 等의 글을 寄稿하기도 했다. 1945年 8月부터 1948年 5月까지 京城女子儀典/首都女子醫大 校長/學長을 지냈으며, 1947年 대한외과학회 會長, 1959年 大韓醫學協會 會長을 歷任했다.

최동(1896~1973)은 1921年 세브란스의전을 卒業했다. 3·1運動으로 逮捕되어 懲役 7月에 執行猶豫 3年을 宣告받았다. 1926年부터 캐나다 토론토大學 病理學敎室에서 上皮癌種을 硏究한 뒤 醫이학사(醫理學士) 學位를 받고 1928年 歸國했다. 1930年 세브란스의전 敎授로 任用되었으며, 1935年 日本 도호쿠 帝國大學에서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39年 2月 세브란스의전 校長에 就任했다. 1936年 3回에 걸쳐 <재만朝鮮人通信>에 "朝鮮 問題를 통해 본 滿蒙 問題"를 寄稿했는데, 3回分에서 재만朝鮮人通信社는 최동이 "朝鮮 民族과 야마토 民族과의 同種同根의 歷史的 實證을 들어 참된 日本과 朝鮮 두 民族의 結合을 堂堂하게 主張했다"라고 紹介했다. 최동은 그 글의 末尾에서 "大民族主義의 球心的 國策을 確立해서 그 軌道 內에서 朝鮮 民族의 遠心的인 解放·發展에 經濟的 援助를 附與하는 일이 帝國의 基礎를 더욱 鞏固히 하고, 東亞의 平和를 지키며 世界의 安寧秩序를 確保하는 根本이라는 事實을 聰明한 爲政者는 깨닫고, 賢明한 國民은 認知하기를 希望한다"라고 했다. 1938年 基督敎界의 親日 協力을 위해 組織된 朝鮮基督敎聯合會의 評議員을 맡았다. 1941年 조선임전보국단 發起人으로 參與했으며, 같은 해 12月 20日 東洋地廣社에서 主催한 '美英打倒座談會'에 參席해 "앵글로색슨人이 有色人을 對하는 態度"를 主題로 發表했다. 解放 後 다시 세브란스의전 校長을 지냈고, 醫科大學으로 昇格한 뒤에는 學長職을 맡았다. [4]

關聯 人物 [ 編輯 ]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7年 12月). 〈윤정현〉 (PDF) . 《2007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728~734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各州 [ 編輯 ]

  1. 志願兵 報道內容 Archived 2013年 9月 7日 - 웨이백 머신 동아일보 記事 參照
  2. ‘고려대학’은 2010年版 新明心寶鑑?
  3. 《大韓民國 親日眞相糾明委員會 報告書》, 4-3卷. p43~p97
  4. 親日派 醫師들의 生存法, "學徒餘 聖戰에 나서라!" 황상익 서울대학교 敎授, 프레시안(2010.03.08) 記事 參照
  5. 主要人士 60名 親日 파헤쳐 , 한겨레新聞, 1994年 2月 27日, 15面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