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 (1494年)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영 (李英, 1494年 ~ 1563年 2月 22日 )은 朝鮮 中期의 武臣, 軍人이다. 字는 현보(顯父), 號는 卦便, 本貫은 永川이다. 淸廉潔白하였으며, 樹齡 在職時는 善政을 베풀었으며 武官으로 淸白吏 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武臣으로 드물게 청렴하고 勤實했다는 評을 들었다. 大邱 出身.

中宗 때인 1514年(中宗 9年) 武科 에 及第하여 여러 武官職을 거쳤으며, 節度使, 參判 等을 歷任했다. 벼슬에 있으면서 念根(廉謹)하기가 武班(武班)에서 가장 보기 드문 자라는 評을 들었다. 1545年 明宗 이 卽位하자 端川 郡守를 지냈다. 이듬해 定評 府使에 赴任하여 굶주린 百姓을 救濟하여 名官으로 이름이 높았다. 定評府使 在職時 私的으로도 百姓을 犯하지 않아 監査가 包裝(褒奬)하고 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1552年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政治를 베풀고 淸白吏에 뽑혔다. 또한 野人을 懷柔하여 邊方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咸鏡道 兵馬節度使가 되어 軍備 擴充과 軍事訓鍊에 功을 세워 同志中樞 府使가 되었다. 1556年 平安道 節度使가 되었다. 그 後 兵曹參判과 濟州 牧師·경상우도 兵馬節度使·副護軍·護軍 等을 지냈다.

特히 濟州道 에서는 道民이 그의 業績을 追慕하여 그의 肖像畫를 그려서 奉安하고 參拜하였으며 그 黨을 卦篇當(掛鞭堂)이라 하였다. 그의 졸기에 依하면 大邱 (大丘)의 집에 火災를 當하여 處子가 살 데가 없게 되자, 主上이 그 孤節(苦節)을 가상히 여겨 特別히 집을 지어 내려주고 또 衣服과 食糧을 이어주게 하였다 한다. 그러나 性質이 偏狹하고 急하여 刑罰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는 評도 있다. 1563年 2月 護軍으로 在職 中 졸하였다.

著書로는 詩와 글을 모은 《괘편당실기 (掛鞭堂實紀)》가 있는데, 1902年 (光武 5) 그의 外後孫 곽종철(郭鍾澈) 等에 依해 編輯, 刊行하였다.

著書 [ 編輯 ]

  • 《괘편당실기 (掛鞭堂實紀)》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