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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락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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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이 그린 아담 락스만

아담 키릴로비値 락스만 ( 러시아語 : Адам Кириллович Лаксман , 1766年 ~ 1806年 以後)은 러시아 帝國 軍人 으로, 最終 階級은 陸軍 大尉 였다.

業績 [ 編輯 ]

1789年 페테르부르크 大學 으로부터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로 派遣되어 滯在하던 中에, 이세국 出身의 다이코쿠야 고다유 等의 日本人 漂流者 6名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支援을 받아 고다유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女帝 예카테리나 2歲 를 謁見하여, 고다유의 送還 許可를 얻은 락스만은 예카테리나 2歲 의 名으로 고다유 等 3名의 送還과 더불어, 시베리아 總督의 通常 要望의 信書(信書)를 傳하기 위하여 日本 으로 出發했는데, 이는 러시아 歷史上 最初로 日本 에 派遣한 使節이 되었다.

1792年 9月 오호츠크해 를 出發하여 네無로國 에 到着하였다. 幕府는 락스만 一行을 맞아들인 마쓰마에번 으로부터, 락스만이 에도 로 漂流民을 引導하는 條件으로, 日本 과의 通商을 위한 交涉을 强力히 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로주 마쓰다이라 社多老父 를 비롯한 幕府 의 高位層 人士들은 락스만을 하코다테 로 回航시켜 漂流民의 身柄을 擔當하도록 하는 代身, 시베리아 總督의 信書는 修理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帝國 이 어떻게 해서든 通商을 바란다면 나가사키 로 回航할 것을 락스만 一行에게 指示하였고, 메쓰케 이시카와 다다後嗣 (石川忠房)를 派遣하기로 決定했다.

이 結果로, 락스맨 一行은 1793年 6月 에, 하코다테 에 入港하여 上陸하고 마쓰마에 로 向해 고다유와 기타하마 異所키치 (北浜磯吉) 2名 [1] 日本 側에 引渡했다. 交涉 끝에 락스만은 나가사키 入港을 許容하는 許可證 [2] 을 交付받았다. 6月 30日 마쓰마에 를 떠나, 7月 16日 하코다테 에서 退去한 락스만은 나가사키 로 向하지 않고 오호츠크 로 歸港하였다.

歸國 後에는 1794年 女帝에게 日本 에 關한 여러 冊이나 名品을 獻上한 것을 稱讚받아, 大尉로 昇進하였다. 하지만 1796年 예카테리나 2歲 가 死亡하는 바람에 失脚하고 만다. 以後의 消息은 알 수 없지만, 1806年 《락스만 日本 渡航 日記》를 完成했다는 點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그때까지는 生存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 사이, 1名은 네無로國 에서 兵士.
  2. 이 許可를 信牌(信牌) 라고 하였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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