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감옥'이라고 불린 다른 矯導所들에 對해서는
경성감옥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西大門刑務所
(西大門刑務所, 'Former Seodaemun Prison, Seoul')는 一齊
統監府
가 植民統治에 抵抗하는 運動家들을 投獄하기 爲해
1907年
에 오늘날의
西大門區
地域에 建設하여
1908年
10月에 門을 연 監獄을 가리키는 말이다. 解放 後에는 主로
서울 拘置所
라 불리며 많은 時局事犯들이 收監되었다. 서울 拘置所가
京畿道
義王市
로 移轉하면서 1987年 10月에 閉鎖되었고, 그 後로 歷史性과 保存價値 等을 考慮하여 一部 施設을 撤去한 뒤 나머지 施設들이
1988年
2月 27日
에
大韓民國의 史跡
으로 指定되었다.
[1]
1998年
11月 5日
부터는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가 管理하는
西大門刑務所 歷史觀
으로 再開場하였으며,
1992年
부터는
西大門區
현저동
에 位置한
獨立公園
의 主要施設로 기능하고 있다.
[2]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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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帝强占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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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齊
統監府
는 抗日義兵들을 投獄하기 위해 現在의
西大門區
현저동
에 近代的 監獄을 만들겠다는 計劃을 세우고, 日本人에게 設計를 맡겼다. 그 設計에 따라 1907年 8月 무렵에 完工된 監獄施設의 첫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다.
[3]
最初의 京城監獄은 約 500名을 投獄할 수 있는 560餘 坪 規模의 木造建物이었으며, 增築 過程에서 收監者를 效果的으로 監視할 수 있는 圓形의 監獄인
파놉티콘
構造로 만들어졌다. 以後 日帝는
1912年
에 現在의
麻浦區
孔德洞
에 一名 '
麻布刑務所
'로 알려진 또 다른 監獄을 세우고 그 이름을 '경성감옥'이라고 稱하게 되는데, 그 過程에서 元來의 경성감옥의 이름은 '西大門監獄'으로 바뀌게 되었다.
1923年
에 이르러 西大門監獄은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西大門刑務所'로 改稱하게 된다. '경성감옥'에서 '西大門監獄', '西大門刑務所'로 名稱이 바뀌는 동안 收監人員은 繼續하여 增加하였는데, 西大門刑務所는 18歲 未滿의 女性, 10年 以上을 宣告받은 者, 그리고 無期囚를 受容하였으며,
1944年
基準 2,890名이 收容되어 있었다. 잘 알려진 收監者로는
白凡金九
先生,
강우규
烈士,
柳寬順
烈士가 있다.
柳寬順
烈士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1]
光復 以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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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年
光復 後 서대문형무소의 名稱은 '서울刑務所'로 바뀌었고,
[4]
이 時期에는 反民族行爲者와 親日勢力들이 收容되었다.
[1]
그러나
김삼웅
前
獨立記念館
張의 主張에 依하면
1949年
까지는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反民特委)의 活動에 따라
이광수
,
노덕술
等의 親日派가 收監되었지만, 反民特委 活動이 瓦解된 後
李承晩
政府 治下에서는 오히려 獨立運動家였던 政治人들이 서울刑務所에 收監되는 狀況이 發生했다.
韓國戰爭
中 北韓軍이 서울을 占領했던 時期에는 北韓軍이 反共·親美 人士로 推定한 人物들을 投獄하였으며, 그 後
1950年
서울을 收復한
李承晩
政府는 北韓軍에 協助한 附逆者들을 서울刑務所에 가두었다.
[5]
歷史觀은 日帝 强占期에 投獄된 모든 사람들을 追慕하고 博物館으로 使用된다.
[6]
또한,民主 抗爭 때 示威하던 사람들도 갇혀있었다
軍事獨裁에서 閉鎖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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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年
에 '서울刑務所'의 名稱은 '서울矯導所'로 바뀌었고,
4?19革命
과
5?16軍事政變
等과 같은 政治的 變動에 따라 많은 時局事犯들이 收監되었다. 例를 들어
김두한
은
1947年
,
1954年
,
1965年
,
1966年
等 4次例 서울刑務所 및 서울矯導所에 收監되었는데, 마지막으로 收監된 原因은
國會 汚物投擲事件
이었다.
[5]
그 後
1967年
에 '서울矯導所'는 '서울拘置所'로 그 이름을 바꾸어
1987年
에 閉鎖될 때까지 같은 이름을 維持하게 된다.
[1]
1987年
11月에 서울구치소는 오늘날의 位置인
京畿道
義王市
安養板橋로
143으로 移轉하였고,
[7]
西大門에 있는 서울拘置所 施設은 閉鎖되었다. 政府는 閉鎖된 全體 施設 中에서 歷史性과 保存價値가 認定되는 保安과 廳舍, 第9~12獄事, 공작사, 한센病社, 死刑場 等 一部만을 保存하기로 하고 나머지 建物을 모두 撤去하였다.
[4]
史跡 指定 및 歷史觀 開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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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年
2月 27日
서울구치소의 남은 建物들은
서울 區 西大門刑務所
라는 名稱 아래
大韓民國의 史跡
第324號로 指定되었다.
[1]
私的의 管理者인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는 그 場所를 歷史의 敎訓으로 삼기 위해 같은 해 11月 5日 그곳에 '西大門刑務所 歷史觀'을 開場하였다. 그 周邊은 같은 時期에 公園으로 造成되기 始作하였으며,
[4]
1992年
8月 15日
光復節
에 이르러 오늘날 '西大門독립공원'으로 알려진
獨立公園
으로 開場하게 된다.
施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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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在 史跡으로 指定된 서울 區 서대문형무소의 主要 建物들은 다음과 같다.
[1]
- 保安과 廳舍 : 서대문형무소의 業務를 總括한 建物로
1923年
地上 2層, 地下 1層 規模로 지어졌다. 1層은 事務室, 2層은 會議室과 所長室. 地下는 調査室로 使用되었으며, 日帝가 威壓感을 주기 위해 正面의 지붕을 높고 雄壯하게 세웠다고 한다. 現在는 서대문형무소의 歷史 展示館으로 使用된다.
- 中央舍 : 獄事들을 監視하고 統制하는 建物로 1920年代 中盤에 2層 規模로 지어졌다. 殘存해 있는 10, 11, 12獄舍와 連結되어 있고 中央
間水素
의 機能을 맡았다. 1層은
간수
들의 事務 空間, 2層은 收監者들의 思想敎育 空間으로 使用되었다.
- 9獄事 : 1920年代에 2層 規模로 지어졌다. 刑務所에서 中央舍(中央 間水素)와 分離되어 있는 唯一한 獄事로서, 日帝강정기에 主로 '思想犯'을 가두고 特別 監視와 統制를 했던 監獄으로 알려져 있다.
- 死刑場 : 地上 1層, 地下 1層 規模로 지어진 日本式 木造建物로, 建築年代는 1916年으로 推定된다. 死刑場 建物은 5m 높이의 담牆으로 둘러싸여 있고, 1層에서 死刑을 執行하였다. 地下室은 屍身을 收拾하는 場所로 利用되었다.
獨立運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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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낸
獨立運動家
들은 다음과 같다.
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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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西大門刑務所 歷史觀 正門
-
西大門刑務所 外部 側面
-
西大門刑務所 獄事 內部
-
西大門刑務所 歷史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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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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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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