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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 扶蘇山城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扶餘 扶蘇山城

扶餘 扶蘇山城
(扶餘 扶蘇山城)
(Busosanseong Fortress, Buyeo)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扶蘇山城 正門
種目 私的 第5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面積 983,598m 2
時代 三國 時代
所有 國有
位置
부여 부소산성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부여 부소산성
扶餘 扶蘇山城
扶餘 扶蘇山城(大韓民國)
住所 忠淸南道 扶餘郡 부여읍 扶疏로 31 (쌍북리)
座標 北緯 36° 17′ 15″ 東經 126° 54′ 55″  /  北緯 36.28750° 東京 126.91528°  / 36.28750; 126.91528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百濟歷史遺跡地球
扶蘇山城
유네스코 世界遺産
英語 名* Baekje Historic Areas
프랑스語 名* Aires historiques de Baekje
登錄 區分 文化遺産
基準 (ⅱ), (ⅲ)
指定番號 1477
地域 ** 아시아·太平洋
指定 歷史
2015年   (第39次 政府間委員會 )
* 世界遺産目錄에 따른 正式名稱.
** 유네스코에 依해 區分된 地域.

扶餘 扶蘇山城 (扶餘 扶蘇山城)은 백제 泗沘都城의 背後山城과 王宮性으로 推定되는 遺跡이다. 扶餘郡 부여읍 西쪽 錦江 을 낀 扶蘇山 속에 있으며, 둘레는 大略 2.2km, 面積은 約 74萬m 2 에 達한다. 1963年 1月 21日 大韓民國의 史跡 第5號로 指定되었다.

扶蘇山城은 扶蘇山 頂上에 테뫼式 酸性 [註解 1] 쌓은 後, 周邊을 砲穀食 으로 [註解 2] 쌓은 複겹 酸性이다. 扶蘇山城 周邊에는 淸算性 靑馬山城 이 있으며, 南쪽 에는 聖興山城 의 支援을 받았다. 過去의 軍需品 倉庫 터 等이 남아 있으며, 그 外에도 義慈王의 宮女들이 自殺했다는 落花巖 皐蘭寺 等이 있다.

槪要 [ 編輯 ]

白馬江 南쪽 扶蘇山을 감싸고 쌓은 山城으로 백제의 都城이다. 《三國史記》〈백제본기〉에는 泗沘城·소부리性으로 記錄되어 있으나, 統一新羅 時代부터는 性이 位置한 山의 이름을 따서 扶蘇山城으로 부른다.

熊進 에서 私費 로 首都를 옮기던 백제 聖王 16年(538)에 王宮을 保護하기 위해 二重(二重) 城壁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年(500)頃에 이미 山 頂上을 둘러쌓은 테뫼式 酸性이 있던 것을 武王 6年(605)頃에 只今의 모습으로 바꾼 것으로 斟酌하며, 百濟 城郭社를 보여주는 重要한 資料다.

城郭 形式은 山봉우리를 中心으로 原形으로 둘러싼 테뫼式과 다시 그 周圍를 감싸면서 쌓은 砲穀食을 混合한 複겹式 酸性이다. 桐·西·南門터가 남아 있으며, 北門터에는 錦江으로 向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排水口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城 안에는 軍倉터 및 三國時代 建物터와 英日루 · 사비루 · 皐蘭寺 · 落花巖 等이 남아있다. 城 안에 軍倉터와 建物터 等이 있는 것으로 보아, 有事時에는 防禦的 目的으로 使用하고, 平常時에는 白馬江과 扶蘇山의 아름다운 景觀을 利用하여 王과 貴族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山城은 사비時代 中心 酸性이며, 백제가 滅亡할 때까지 首都였던 곳으로서 歷史的 意味가 있다.

世界文化遺産 指定 [ 編輯 ]

2015年 7月 4日 獨逸 본에서 열린 第39次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百濟歷史遺跡地球(銃 8個의 遺跡地들 中 公主地域에 2곳( 公山城 , 宋山里 古墳群 ), 扶餘 4곳( 관북리 遺跡 및 扶蘇山城, 능산리 古墳群 , 定林寺址 , 羅城 ))李 世界 遺産 登載 審査를 最終 通過했다. 이番 世界 遺産 登載는 忠淸圈에서는 最初로 選定되었다. [1]

發掘 [ 編輯 ]

扶蘇山城은 扶餘地域 全體를 眺望할 수 있는 核心的 位置에 자리하고 있다. 特히, 百濟 마지막 都邑으로 알려진 推定 私費 王窮地의 北쪽 背後에 該當하기 때문에 王室의 後援(後苑)이자, 有事時 逃避處의 機能도 있으므로 王宮에 버금가는 施設을 兼備한 遺跡이다. 지난 1980年부터∼2002년까지 國立文化財硏究所와 國立夫餘文化財硏究所가 年次 發掘調査를 進行하여 百濟 ~ 朝鮮 時代에 築造한 城壁, 百濟 時代 輸血 建物址와 목책열, 朝鮮時代 軍倉址 等을 確認하였다. [2]

以後 20餘年 뒤에 다시 百濟의 推定 서문지와 그 周邊 城壁을 對象으爐韓 發掘調査가 이루어졌다. 그 結果 2021年에는 鉏城壁의 門地와 함께 扶蘇山 全體를 아우르는 百濟 砲穀食 誠意 正確한 動線을 把握하였고, 倍數와 出入 關聯 施設을 確認할 수 있었다. 그리고 扶蘇山의 南東쪽 頂上部를 中心으로 形成된 統一新羅의 테뫼式 城의 築造 方式과 時期마다 달라지는 扶蘇山城 城壁의 變化 樣相도 把握하였다. [3]

扶蘇山城 내 百濟 砲穀食 姓은 基本的으로 板築으로 築造되었고, 以外에도 板築 外壁만을 石築하는 方式, 두 겹 以上 板築하는 方式, 內壁에 排水路를 부석하는 方式 等이 確認된 바 있다. [3]

2021年에 調査된 鉏城壁 區間은 扶蘇山城 城壁 中에 中心土壘가 [註解 3] 가장 堅固하고 반듯한 狀態로 確認되었다. 城壁의 板築層 [註解 4] 너비는 約 4.8 ~ 4.9 m이며 現在 남아있는 城壁의 높이는 最大 4.4m 程度로, 毁損된 點을 考慮하면 더욱 巨大했을 것으로 推定된다. 또한, 城壁의 中心을 이루는 板築層의 內外壁은 모두 흙으로 補强하였는데, 一部는 加工한 石材를 利用하여 마무리한 特異한 樣相도 確認되었다. [3]

百濟 砲穀食 姓은 統一新羅 에 依해 再次 補修作業을 거쳐 꾸준히 活用되었다. 그만큼 扶蘇山城이 重要한 位置였음을 알 수 있다. 統一新羅의 城壁 保守는 性 안쪽 壁面으로 와적層과 斧石層을 造成하여 方式을 使用하였고, 一部 區間에 限해 石列이나 石築이 덧대지기도 하였다. [3]

推定 서문지 地點은 扶蘇山 南麓의 推定 私費 王窮地에서 서복사地 를 거쳐 性 內로 進入하는 길목에 該當한다. 이곳은 元來 골짜기를 이루는 地點에 該當하며, 調査結果 百濟 城壁 板築層 慰勞 暗渠가 形成되어 있었다. 巖居의 上部構造는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지만, 이 周邊으로 門址空席, [註解 5] 原形 礎石, 매우 잘 齒石된 大型 加工席들이 散在해 있어 出入 目的의 構造物이 存在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百濟와 統一新羅 城壁이 連接한 地點에서는 百濟 城壁 위로 統一新羅 테뫼式 城壁이 만들어졌다. 테뫼式 誠意 外壁은 旣存의 百濟 城壁을 收縮하여 使用하였지만, 內壁은 百濟 城壁 위에 基壇石築을 附加하여 築造하였다. 城壁 施設層에서 祝聖過程 中 流入된 ‘ 회창 7年’(847年) 名文기와가 出土되어, 城壁의 造成 時期는 9世紀 中盤 以後임을 알 수 있다. [3]

같이 보기 [ 編輯 ]

註解 [ 編輯 ]

  1. 테뫼式 性이란 산(뫼) 頂上部를 테처럼 둘러서 쌓은 山城을 말한다.
  2. 砲穀食 性이란 山 頂上部에서 溪谷을 包容하고 내려온 稜線部에 城壁을 築造한 酸性을 말한다.
  3. 土壘(土壘)는 土星 몸體를 이루는 흙더미이다.
  4. 板築은 나무板으로 틀을 만들어 그 안을 흙이나 모래 等을 層狀(層狀)으로 넣어 방망이로 찧어서 단단하게 하고 次例로 높게 흙을 쌓아 올리는 技法, 또는 그 쌓아 올린 흙 自體를 말한다.
  5. 門址空石은 城門의 門짝 固定用 木主를 끼우기 위해 구멍을 낸 돌이다.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