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1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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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1歲

性 보리스 1歲 미하일 (Св. княз Борис I Михаил, 生年 未詳 ~ 907年 5月 2日 , 在位 852~889)는 第1次 불가리아 帝國 의 君主이다. 그의 오랜 在位期間에 불가리아人 들은 精巧 로 改宗했으며 自主的인 불가리아 敎會가 創設되었다. 또한 슬라브 文學이 出現했고 슬라브-불가리아 學問과 敎育의 最初의 中心地들이 세워졌다. 그의 積極的인 國內外 政策은 統一 불가리아 民族 共同體 形成에 커다란 役割을 했으며 以後 불가리아 發展에 오래도록 影響을 미쳤다.

生涯 [ 編輯 ]

精巧 改宗과 불가리아 大主敎區 [ 編輯 ]

그가 王位를 繼承했을 무렵 불가리아는 크룸 과 프레지안의 努力으로 領土나 軍事的·政治的 潛在力 面에서 유럽의 손꼽히는 國家였다. 그러나 當時 불가리아 內에는 被支配 民族인 多數의 슬라브족 과 7世紀末 발칸 半島에 定着한 투르크系 種族인 支配 民族 不可르族 이 共存하고 있었다. 슬라브人들과 不可르人들은 宗敎·人種·言語가 달랐으므로 모든 國民에게 共通的이고 義務的인 宗敎를 導入하는 일은 統一 불가리아 形成을 위한 基本的 前提條件 가운데 하나였다.

非精巧 國家였던 불가리아는 '基督敎 國家軍'에 合流해야 했다. 그러나 基督敎 敎權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東方 正敎會 라는 2個의 中心이 競爭하고 있었으므로 보리스는 選擇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元來 로마敎會를 支持하려 했으나 비잔티움 帝國 과 싸워 지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正敎會를 擇해야 했다. 어느날 밤 그와 그의 家族 및 그의 政策을 支持하는 貴族들은 불가리아의 首都 플리스카에 派遣된 비잔티움의 主敎와 司祭로부터 祕密裏에 洗禮를 받았다(보리스의 洗禮名은 미하일).

그가 國民에게 洗禮를 强要하자 非基督敎人들이 甚하게 反撥해 叛亂을 일으켰으며, 그는 52名의 보야르(貴族)들을 그들의 家族과 함께 處刑했다. 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總大主敎 포티우스 는 불가리아 主敎區의 地位에 對해 協商을 벌였으나 불가리아人들이 期待한 結果는 거두지 못했다.

비잔티움側은 불가리아 敎會 組織이 完全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에 從屬되기를 바랐다. 여기에 不滿을 품은 보리스는 西유럽과의 外交接觸을 再開해, 866年 敎皇 니콜라오 1歲 에게 外交使節을 보냈다. 敎皇은 이에 和答해 곧 불가리아에 傳道團을 派遣했다.

로마 가톨릭교회 聖職者의 불가리아 滯留는 곧 날카롭게 對立하고 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敏感한 爭點이 되었다. 그러나 敎皇 니콜라오 1世와 그의 뒤를 이은 敎皇 하드리아盧 2歲 가 불가리아 內의 敎會 組織에 關해 망설이고 있음이 드러나자 보리스는 다시 비잔티움側과의 協商을 始作했다. 불가리아 敎會 問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에서 열린 第8次 公議會에서 最終的으로 解決되었다.

불가리아는 公式的으로 名目上 콘스탄티노폴리스 總大主敎의 管轄下에 놓이게 되었지만 獨自的인 大主敎區를 갖게 되었다. 882年 까지 로마 敎皇들은 보리스를 로마 敎會 쪽으로 되돌리려고 呼訴하기도 하고 몇 가지 讓步를 約束하기도 했으나 아무 效果가 없었다.

보리스는 積極的으로 불가리아 國民들에게 基督敎 正敎信仰을 傳播했고 불가리아 敎會를 獨立機構로 組織하는 日課 곳곳에 敎會를 짓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末年 [ 編輯 ]

886年 보리스는 키릴루스 메토디우스 兄弟의 弟子들로서 슬라브 사람들을 傳道하기 위해 派遣되었다가 모라바 에서 쫓겨난 클레멘스 앙겔라리오스 等에게 避難處를 提供했다. 이들은 보리스의 積極的인 援助와 物質的 支援을 받아 플리스카 · 프레슬라프 · 오흐리드 에 슬라브 學問의 中心地를 設立했다. 슬라브 學者들이 集中的인 作業을 벌인 結果 슬라브語 그리스어 代身 敎會 禮拜와 文學에서 使用하게 되었으며 불가리아의 公式言語로 採擇되었다.

889年 그는 王位에서 물러나 修道士가 되었으나 國家 行政에 積極的으로 參與할 수 있는 權限은 繼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맏아들이자 相續者인 블라디미르 는 아버지의 政策을 버리고 基督敎를 反對했으며 슬라브 文字와 슬라브 文學을 反對하는 사람들의 指導者 役割을 했다. 그러자 그는 충성스런 보야르들과 軍隊의 도움을 받아 보리스는 自己 아들을 눈을 뽑아 버린 뒤 廢位시키고 블라디미르 代身 보리스의 셋째 아들이 王位를 繼承하여 시메온 大帝 가 되었다. 그 後 修道院으로 물러난 보리스는 불가리아 敎會에 厚한 下賜金을 주었으며 슬라브 學者들을 後援했다. 그리고 그의 死後 그는 正敎會의 成人이 되었다.

前任
프레지안
(在位 836~853)
第1次 불가리아 帝國의 君主
853~889
後任
블라디미르
(在位 889~893)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