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파블로 후아레스 가르시아
(Benito Pablo Juarez Garcia,
1806年
3月 21日
~
1872年
7月 18日
)는
멕시코
의
아메리카 原住民
出身 法律家로,
1857年
부터
1872年
까지 멕시코의 大統領을 歷任했다. 12살 때까지
스페인語
를 못했으나 以後 法律家가 되겠다는 꿈꾸고 大統領까지 當選됐다.
1847年
부터
1852年
故鄕인
烏鴉하카週
의 州知事를 歷任했다. 1855年 革命 때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를 打倒하고
후안 알바레스
가 이끄는 自由黨(liberales)의 臨時內閣의 法務長官이 되었다. 1857∼1861年 臨時 大統領으로서 憲法을 制定하여 가톨릭 敎會와의 正校 分離, 가톨릭
敎會
財産의 沒收,
土地改革
을 하려 하였으나 大地主·가톨릭
聖職者
들의 反對에 부딪혀 3年 間
內亂
을 겪었다.
[1]
多幸히 이를 鎭壓하였으나, 1864年부터 1867年 사이에 保守派는
프랑스
의 援助를 請하여
나폴레옹 3歲
의 武力 干涉, 皇帝
막시밀리아노
의 擁立 事態에 이르렀다.
[2]
이는 當代의 멕시코가
大統領과 皇帝가 共存하는 나라
라는 아주 荒唐한 呼稱을 얻게 했다. 그는 美國과의 國境 地帶에 버티면서 抗戰을 繼續하였으며, 1867年 5月 막시밀리아노를
케레타로
에서 사로잡아
軍事裁判
에 붙여 6月에 銃殺하였다.
1872年
革命戰爭 中 死亡하였으나 "共和國의 救濟者"로서 尊敬을 받았다. 그는 멕시코의
올리버 크롬웰
이라는 讚歎을 받았다.
改革 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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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레스 大統領은 經濟를 正常化하는 길은 敎會와 土地 貴族이 쥐고 있는 숨막히는 獨占 經濟를 資本主義로 代替해야 한다고 結論지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改革 政策을 펼쳤다.
- 모든 種類의 公共의 負債들에 對한 支拂을 2年間 猶豫시킴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티칸의 金融 機關들에게 진 債務였기 때문)
- 結婚을 民法으로 宣言하게 함. (前에는 敎皇에 依해 下賜되는 特權이었음)
- 聖職과
宗敎裁判所
의 宗敎 法定들을 解散시킴.
- 일억萬불 以上의 銀貨와 멕시코의 가장 肥沃한 땅과 所有地들 中 三分의 一(35%)에 相當하는, 敎皇의 가톨릭 敎會 財産을 沒收함.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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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年
부터
1943年
까지
이탈리아
를 統治한 獨裁者
베니토 무솔리니
의 이름인 베니토는, 社會主義者였던 무솔리니의 父母가 후아레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베니토(Benito)의 一般的인 이탈리아 形式은 베네데토 (Benedetto)이다.
- 人類 歷史上 가장 키 작은 國家元首로 키는 137cm이다.
- 베니토 후아레스가 死刑에 處한
막시밀리아노 1歲
는 베니토 후아레스보다 키가 50cm나 큰 187cm인데 이는 現在 基準으로도 相當한 長身이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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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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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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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네이버 知識百科] 멕시코遠征 [Mexican Expedition] (두산百科)
- ↑
康俊晩 <콜럼버스에서 후지모리까지> 蓋馬高原 1999.6.10, p110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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