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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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임 (朴承任, 1517年 ~ 1586年 )은 朝鮮 明宗 , 宣祖 때의 文臣, 學者이다. 本貫은 潘南 , 字는 중보(重甫), 號는 小鼓(嘯皐)이다. 退溪 李滉 의 文人이자 首弟子였다.

權臣들의 跋扈에 官職에 나가지 않고 學問 硏究에만 盡力하다가 윤원형 等이 물러난 뒤에 官職에 나갔다. 또한 李滉의 學風을 後學에게 傳達하는데 힘을 기울여 退溪 學派 形成에 크게 寄與하였다. 그의 弟子들은 남인 과 一部 北人 에 加擔하였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第1次, 第2次 王子의 亂 때 太宗 李芳遠 을 도운 功勞로 佐命功臣(佐命功臣)이 된 朴은 의 5代孫이다. 아버지 朴兄은 元來 安東 出身으로, 進士試에 合格하여 成均館에서 受學하였으며 뒤에 安東을 떠나 妻家가 있던 永川(榮川)으로 移住해서 살게 됐다. 어머니는 永川 地域의 名門家인 瘞安金氏 出身으로, 金萬鎰(金萬鎰)의 딸이다. 박승임은 7兄弟 中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7歲 무렵에 祖父와 父親에게서 史略(史略)을 배웠고, 9歲 때에는 伏羲 의 八卦(八卦)를 배운 뒤 홀로 후미진 곳에 들어앉아 直接 64卦와 爻辭(爻辭)를 그리며 陰陽의 變化를 스스로 獨學하였다. 12歲 무렵에는 『 大學 』과 『 論語 』를 읽기 始作하여 讀破하였으며, 14歲에 鄕試(鄕試)에 凝視하려 하였지만 아버지의 挽留로 그만두고 學問에 專念하였다.

記誦과 讀書에 能했던 그는 15歲에는 서전(書傳)을 讀破하였고, 16歲부터는 精子(程子)와 주자(朱子)의 著述들을 스스로 硏究하며 讀破하며 道學(道學)의 精髓를 깨우쳐 나가기 始作하였다. 그리고 書齋의 壁에는 ?同名(東銘)?科 ?署名(西銘)?을 붙여놓고서 恒時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 스스로 마음들 다스렸다. 그 뒤 疑問나는 것이 많아지자 박승임은 1537年(中宗 32) 21歲에 李滉을 찾아가, 그의 門下에서 學問을 배우기 始作했다.

李滉의 弟子가 된 박승임은 特히 主役(周易)과 禮記(禮記), 그리고 朱子서(朱子書) 等 經典의 學習과 理解에 全力을 기울였다. 그리고 講義가 끝난 뒤에도 疑心 가는 곳이 있으면 빠짐없이 記錄하여 退溪를 찾아가 解釋, 가르침을 받으며 學問을 熟成시켰다. 또한 스승 李滉 外에도 農巖 李賢輔 晦齋 李彦迪 , 蟲災 權橃 等 隣近의 이름난 性理學 學者들을 찾아가 배움을 請하고 時勢(時勢)에 關한 意見을 나누기도 하였다.

科擧 及第 以後 [ 編輯 ]

1540年 文科 에 及第한 後에 吏曹 佐郞, 司諫院 정언, 玄風 縣監, 晉州 牧師, 黃海道 觀察使 等을 엮임하였다. 明宗의 外叔이며 權臣인 윤원형 의 專橫이 甚할 때 官職에서 물러난 後에 後學 養成에 專念하여 退溪의 學風을 後代에 繼承하였으며, 여러番 불렀는데도 固辭하였다. 그 뒤 乙巳士禍 直後인 1547年(明宗 2) 故鄕으로 돌아와 李滉을 모시고, 儀禮(儀禮)와 走者大展(朱子大全)을 講讀하며 다시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 李滉으로부터 學問的 能力을 크게 認定받았다.

1558年(明宗 13) 風紀 軍需에 除授된 박승임은 기쁜 마음으로 風紀에 赴任하여 百姓들의 租稅 負擔을 輕減해 주어 民生을 安定시키고, 紹修書院 에 자주 들러 儒生들과 講學하며 晦軒(晦軒) 安珦 의 影幀을 새로 製作하는 等 治績을 남기고 5年 만에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故鄕으로 돌아가 學問에 힘쓰며 趣向情(翠香亭)과 洞里書齋(東里書齋)·小鼓臺(嘯皐臺) 等을 짓고 隱者(隱者)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官僚 生活 [ 編輯 ]

1565年(明宗 20) 文定王后 가 죽고, 윤원형, 이량 等이 除去되자 다시 朝廷에 나아간 박승임은 以後 兵曹 參知와 承政院 同副承旨를 거쳐 晉州 牧使로 赴任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部로(父老)들을 모아 鄕飮酒禮(鄕飮酒禮)를 行하고 鄕約을 實施하며 百姓들의 敎化에 힘을 기울였다. 1568年(宣祖 1) 病으로 辭職, 벼슬에서 물러나 落鄕했으나 1568年 特命으로 中國 明나라에 派遣되는 使節團의 同志府使(冬至副使)에 任命되어 燕京에 다녀왔다.

박승임은 1570年(宣祖 3) 承政院 左承旨에 오른 뒤 乙巳士禍의 거짓 功勳을 없앨 것을 請하는 上疏를 올리며 明宗 年間의 權臣들과 戚臣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하였다. 以後 權臣, 戚臣들의 非難 輿論에 直面했으나 王이 듣지 않았다. 兵曹 參議와 掌禮院 判決事(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年(宣祖 4) 黃海道 觀察使로 赴任하였다가 다시 內職으로 돌아와 弘文館 副提學과 都承旨를 지냈다.

1574年(宣祖 7) 慶州 府尹으로 發令되었고 以後 1577年(宣祖 10) 江華 府使, 1578年(宣祖 11) 驪州 牧使 等으로 赴任했다. 地方官을 歷任하는 동안, 박승임은 稅金을 가벼이 하고 賑恤을 實施하여 民弊를 除去하였다. 한便 母材 김안국 祭享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建立하는 等 民生의 安定과 敎化의 普及에 커다란 功勞를 세웠다. 이때 御史(御史)로 派遣된 정이주(鄭以周)는 그의 治績을 調査하여 박승임의 治績이 가장 뛰어나다는 ‘治行第一(治行第一)’이라는 報告書를 올렸고, 宣祖는 박승임의 功勞를 致賀하여 特別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박승임이 官職을 버리고 歸鄕하려 하자 百姓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傳送하였다고 한다.

以後 박승임은 春川 府使와 兵曹 參議·共助 參議 等의 要職을 거쳐 1583年(宣祖 16) 司諫院 大司諫에 올랐다.

大司諫 在職 中 西人 의 領袖이던 李珥 朴淳 의 黨論을 非難하는 上疏를 올렸다가 昌原 府使(昌原府使)로 좌천당하였다.

事後 [ 編輯 ]

晩年에 長男 박어와 셋째 아들 朴條를 잃었다. 1585年(宣祖 18) 官職에서 물러나 故鄕으로 落鄕한 뒤 1586年 病을 얻어 世上을 떠났다. 當時 나이 70歲였다. 事後 慶尙道 영주의 口腔서원 , 榮州 향현사(鄕賢祠) 等에 配享되었다.

그의 弟子들은 大體로 同人 에 屬했으며, 南北 分黨 以後에도 남인 北人 一部는 그의 學脈을 繼承한 門下生들이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박승임은 7兄弟 가운데 6남이었는데, 맏兄 괴헌(槐軒) 박승문은 訓導(訓導)를 지냈고, 둘째兄 박승건은 生員(生員)이었다. 셋째兄 인암(忍菴) 박승간은 1600年(宣祖 33) 박승임과 함께 文科에 及第하여 弘文館과 藝文館, 司諫院 等 主要 官職에 올랐다. 넷째兄 박승준은 眞사(進士)를 지냈다. 또한 김굉필(金宏弼)의 文人이었던 野川(冶川) 朴素(朴紹)는 박승임의 6寸 兄이었다.

  • 高祖父 : 박규(朴葵, 蔭職(蔭職)으로 黃海道·平安道·慶尙道의 觀察使 歷任)
    • 曾祖父 : 박병균(朴秉鈞, 司醞署令(司?署令))
      • 할아버지 : 박숙(朴?), 忠義衛(忠義衛) 副司直(副司直)
        • 아버지 : 朴兄(朴珩), 成均館 眞사
        • 어머니 : 瘞安(禮安) 金氏(金氏) - 金萬鎰(金萬鎰)의 딸
          • 兄 : 박승문(朴承文)
          • 兄 : 박승건(朴承健)
          • 兄 : 박승간(朴承侃)
          • 兄 : 박승준(朴承俊)
          • 本人 : 박승임
          • 否認 : 醴泉(醴泉) 權氏(權氏) - 권오기(權五紀)의 딸
            • 長男 : 박어(朴漁)
            • 次男 : 薄祿(朴?), 義禁府 道士(義禁府都事)
            • 三南 : 박조(朴?) - 眞사였는데, 박승임보다 1年 앞서 世上을 떠났다.
            • 長女 : 반남(潘南) 朴氏(朴氏)
            • 사위 : 이복원(李復元), 忠義衛(忠義衛)
          • 동생 : 박승륜(朴承倫)

기타 [ 編輯 ]

退溪의 弟子였던 그는 林흘(任屹), 권문해(權文海), 김개국 , 김륵 , 이여빈 , 五運(吳澐)·배응경(裵應?)·김중청(金中淸) 等의 弟子를 輩出하여 李滉學派의 學脈을 이어갔으며, 一部 弟子들은 壬辰倭亂 때 義兵將으로 活動하였다. 政治的으로는 同人-南人으로 이어지는 系譜를 形成하기도 했다. [1]

思想的 側面 [ 編輯 ]

그는 退溪의 성리설(性理說)을 이어받아 心學(心學)의 側面을 强調하였고, 이와 氣에 關해서는 理氣二元論(理氣二元論)의 見解를 繼承하였다.

著書 [ 編輯 ]

  • 소固執
  • 性理有線(性理類選)
  • 公文心法油臭(孔門心法類聚)
  • 綱目心法(綱目心法)
  • 事例變해(四禮辨解)
  • 儀禮강록(儀禮講錄)
  • 天文圖(天文圖)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그의 門下生들은 大部分 北人 이이첨, 鄭仁弘의 仁穆大妃 廢母論, 영창대군 社士論에 反撥하여 南人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