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나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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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나리토시
森 成利
모리 나리토시
모리 나리토시
두루미 고리(鶴の丸)
두루미 고리(鶴の丸)
無事 情報
時代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出生 에이로쿠 8年( 1565年 )
死亡 덴쇼 10年 陰曆 6月 2日 ( 1582年 6月 21日 )
別名 改名 : 란, 나리토시
別名 : 란마루, 爛報視, 나가사다, 나街야스
誡命 月江宗春居士
正翁定是?定門
瑞桂院殿鳳山知賢居士
主君 오다 노부나가
氏族 모리氏 (森氏)
父母 아버지: 모리 요시나리
兄弟姊妹 모리 요시타카
모리 나가요시
모리 나리토시
모리 나가타카
모리 나가우지
모리 다다마사
墓所 교토시 加味敎區 아미다지
교토시 기타區 다이土쿠지
기후縣 가니시 街조지

모리 나리토시 ( 日本語 : 森 成利 , 1565年 ~ 1582年 6月 21日 )는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에 活躍한 武裝 이다. 現在 모리 란마루 (森蘭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오다 노부나가 의 家臣 모리 요시나리 이며 汚泥 무사시 (鬼武?)로 알려진 兄 모리 나가요시 를 비롯 6男中 3男으로 태어났다.

槪要 [ 編輯 ]

誤와리國 出身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 의 고쇼(小姓)로 寵愛를 받아 오다 노부나가 의 藍色의 相對가 되었다. 이 때문에 모리 나리토시는 兒童으로 描寫되어 오다 노부나가 가 厚하게 待遇한다는 俗說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어린 子息을 남기고 戰死한 모리 요시나리 를 代身하여 노부나가는 그의 養父로서의 役割만 했다는 意見도 있다. 오다 家門 안에서는 노부나가의 命令을 傳達하거나 重要會議에 參席하는 等 前途有望한 젊은 事務官이었다.

現在 노부나가가 가장 寵愛했던 側近이라고 말하면 于先 란마루가 떠오를지 모르지만, 當時 여러 地域과 基나이 政界에 있어서는 모리 란마루(森 ?丸)은 아직 認識되지 않았고, 重大한 業務에는 일을 맡기지 않았다.

側近으로 活躍한 時期도 2年程度 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死亡 時點으로 보는 魂露地의 便 에서 그의 나이는 18, 19歲로 모리 란마루의 逸話는 다른 人物과 古典과의 類似點이 있고, 에도 時代 以後 創作 및 다이묘 모리 家門의 宣傳이었다는 指摘이다.

덴쇼 10年( 1582年 ) 가이 다케다 家門이 다이묘로서 滅亡한 後, 그에 따른 공으로 美露國 이와무라性 의 성주로 赴任되었고, 魂露地의 便 에서 야스다 사쿠베 에게 죽임을 當했다. 單, 이와무라 星州에 關해서는 異說도 있다.

人物 [ 編輯 ]

이름은《관정중수제가보(?政重修諸家譜)》에 나가사다 (長定)로 되어 있고, 그 밖에 나街야스(長康)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活躍當時의 文書에서 確認된 것은 나리토시 (成利)이다.

또, 兒名으로 알려진 란마루의 이름은 當時 史料에서는 모두 (?)字로 表記되어 있고, 란(蘭)의 文字는 後世의 創作으로 보인다. 一般的으로 알려진 모리 란마루의 表記는 모리 란마루(森?丸)로 表記해야 옳다. 또, 란마루라고 말한다면 大槪 女性의 이미지를 가진 美少年으로 그려지는 傾向이 있지만, 모리 란마루가 健壯한 肉體를 지닌 靑年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見解도 있다.

遺品의 虛僞 [ 編輯 ]

《決定版 圖說·전국갑注集(決定版?????甲?集)》等에서〈모리 란마루의 九族(森蘭丸の具足)〉으로 記載된 것이 있지만, 이 鉤足은 日本甲胄私學硏究會 會長 李珥 다쓰오(當時 나카무라 다쓰오)가 히코네 에서 發見해 가와고에 의 古美術商 오쿠다이라 나가요시에게 건넨 것으로 두 사람 다 이 甲胄를 公表할 때 "우리들이 發見하고 넘겨받은 物品은 無名의 甲옷"이라고 明確히 밝히고 있다.

李珥 다쓰오는 그의 著書에서 "조금만이라도 信憑性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敍述하고 있고, 란마루의 것으로 나온 것에 相當한 不快感을 가진 것 같다. 더불어 發見 當時에는 甲胄의 名義 等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經緯로 모리 란마루의 鉤足이라는 名稱이 생겼는지는 不分明하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