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빈 體制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빈 體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메테르니히 體制 에서 넘어옴)

빈 體制 下人 1815年의 유럽

빈 體制 ( - 體制, 英語 : Vienna system, Vienna settlement )는 빈 會議 (1814~1815年) 以後로 成立된 유럽 의 國際 秩序이다. 메테르니히 體制 ( 獨逸語 : Metternichsches System , 英語 : Metternich System )라고 부르기도 한다

槪要 [ 編輯 ]

빈 會議 에서 프랑스 샤를 탈레랑 페리고르 가 主張한 正統主義 를 基礎로, 유럽의 王政들은 프랑스 革命 以前 狀態를 부활시켜 元來의 狀態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神聖同盟 等 當時의 列强을 中心으로 自由主義 國民主義 活動을 彈壓하였다. 英國 , 프랑스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帝國 , 러시아 의 5大 强國이 對外的으로 어느 한 나라가 强盛해져서 勢力 均衡을 깨는 일이 없도록 相互 牽制하면서도 强大國 및 弱小國에서 危險한 革命 狀況이 發生할 境遇 協助하여 共同 介入으로 이를 彈壓하는 形式을 取하고 있었다.

이 中 後者의 相互 協助의 境遇는 1830年에 일어난 그리스 獨立 戰爭 , 7月 革命 等을 거치면서 動搖하기 始作했으며 結局 프랑스 2月 革命 크림 戰爭 을 끝으로 흐지부지되고 사라졌다. 그러나 電子의 相互 牽制의 境遇는 크림 戰爭 以後로도 健在하여, 以後로도 5大 强國에 依한 相互 牽制가 繼續되다가 1870年 이탈리아의 統一( 리소르지멘토 )에 따른 이탈리아 王國 의 成立으로 6代 强國 體制로 轉換되었으나 勢力 均衡 體制의 趣旨 自體는 20世紀 初盤 들어서 各各 英國 獨逸 帝國 을 中心으로 하는 硬直된 同盟 體制가 登場하기 前까지 有效하였다.

當初 빈 會議 나폴레옹 戰爭 의 遺産과 戰利品을 處理하는 자리였으므로 쇼몽 條約 의 當事者이며 勝戰國인 英國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帝國 , 러시아 의 發言權이 剛했다. 그런데 폴란드의 分割 작센 問題를 둘러싸고 폴란드 ( 바르샤바 大公國 )의 러시아 로의 歸屬과 작센 프로이센 으로의 歸屬을 相互 承認하려는 러시아 - 프로이센 陣營과 이를 極力 沮止하고자 하는 英國 - 오스트리아 帝國 陣營으로 分裂하여 對立하게 되었다.

敗戰國인 프랑스 의 外務相 탈레랑 은 이 機會를 놓치지 않고 英國 - 오스트리아 帝國 陣營에 加擔하여 폴란드 · 작센 問題와 關聯하여 러시아 - 프로이센 의 無理한 要求가 繼續될 境遇 3國이 各各 15萬의 兵力을 動員하여 對抗한다는 것에 合意하였다. 이러한 合意가 成立함으로써 세 가지의 重大한 結果가 招來되었는데, 첫째로 러시아 프로이센 이 이에 屈服하여 當初의 要求로부터 물러나게 되었으며, 둘째로 戰爭의 敗戰國으로서 處分을 기다려야 하는 處地였던 프랑스 쇼몽 條約 의 當事者인 다른 4個 强國과 同等한 地位로 다시 올라서게 되었고, 셋째로 이로써 다시 5大 强國間의 相互 牽制라는 勢力 均衡 體制가 復元되었다는 點이다.

意義 [ 編輯 ]

5大 强國이 相互 協助하여 프랑스 革命 으로 惹起된 自由主義 · 民族主義 運動을 彈壓한다는 體制의 趣旨는 10年도 채 지나지 않아 유럽 各地의 挑戰에 直面하며 動搖하게 되었다(→ 에스파냐 叛亂 , → 나폴리 叛亂 , → 그리스 獨立 戰爭 ). 이러한 動搖는 結局 外部로부터의 挑戰이 强力했다기보다는 5大 强國 內部의 牽制 心理 等으로 인한 分裂에 依하였다는 點에서 빈 體制는 비록 保守的·反動的인 相互 協助의 旗幟를 내걸었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體制의 性格으로 一貫되었던 것은 相互 牽制의 勢力 均衡 體制였다고 할 수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