留潮地 다카노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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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潮地 다카노部
龍造寺隆信
류조지 다카노부상 소류지조(宗龍寺蔵) 가야마 다카시쓰토무 산(佳山宗勗賛) 교호 4년(1719년), 사가현 중요문화재
留潮地 다카노浮上 沼溜地兆(宗龍寺?) 가야마 다카시쓰토무 산(佳山宗??)
交互 4年(1719年), 사가縣 重要文化財
번갈아도는 12일족
번갈아도는 12一族
無事 情報
時代 센고쿠 時代 ~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出生 郊勞쿠 2年 陰曆 2月 15日 ( 1529年 3月 24日 )
死亡 덴쇼 12年 陰曆 3月 24日 ( 1584年 5月 4日 )
改名 엔게쓰 (法名) →留潮地 다네老父 → 다카타네 → 다카노部
別名 야마시로老카미(通稱), 히젠의 곰
誡命 龍泰寺殿泰?宗龍大居士
主君 쇼니氏 , 留潮地 이에카네 , 다네미쓰 , 오우치 요시타카 , 요시나가 , 오토모 要視시게 , 모리 모토나리 , 오토모 要視시게, 獨立 다이묘
氏族 留潮地氏
父母 父親: 留潮地 지카이에 , 母親: 게이긴니 ( 留潮地 다네카즈 의 딸)
兄弟姊妹 野에 무네테루(八?宗暘)의 아내, 다카노部, 老父치카, 나가노部
配偶者 留潮地 이에카도의 딸
子女 留潮地 마사이에 , 에가미 이에打네 , 고토 이에老父 , 다마쓰루히메(玉鶴?), 오야스(於安), 구라마치 노부토視(倉町信俊)의 아내
墓所 사가縣 四家詩 의 高덴지

留潮地 다카노部 ( 日本語 : 龍造寺隆信 りゅうぞうじ たかのぶ [ * ] , 郊勞쿠 2年 陰曆 2月 15日 ( 1529年 3月 24日 ) ~ 덴쇼 12年 陰曆 3月 24日 ( 1584年 5月 4日 ))는 센고쿠 時代 부터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에 걸친 武裝 . 히젠國 기타규슈 다이묘 留潮地價의 19代 堂主이자 不問에 있던 時期는 쥬나곤엔게쓰방 (中納言元月坊)을 稱했고, 還屬 後에는 처음 다네老父 (種信)를 自稱하고, 오우치 요시타카 의 便휘를 받아 다카타네 (隆胤), 그 뒤를 이어 다카노部 (隆信)로 改名했다.

'五洲 이도의 태수(五州二島の太守)' 稱號를 즐겨 使用했는데, 히젠의 곰 이라는 別名을 따왔다. 쇼니氏 를 下剋上에서 쓰러뜨리고, 오토某氏 를 꺾고, 시마즈氏 와 對等한 勢力을 쌓아 올려 규슈 3强 (九州三?)의 한사람으로서 稱해졌지만, 시마즈·아리마 聯合軍과의 싸움( 오키打나와테 戰鬪 )에서 不察을 當해, 敗北하여 戰死했다.

生涯 [ 編輯 ]

出生 以前 [ 編輯 ]

留潮地 가는 出戰(出典)李 確實하진 않지만 후지와라氏 의 傍系인 다카키 요시이에 히젠國 오즈群 의 留潮地(龍造寺)의 地名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무로마치 幕府 末期 本家인 무라나카 留潮地 가의 堂主가 夭折하면서 衰弱해지고 傍系인 미즈街에 留潮地 (水ヶ江龍造寺) 街의 堂主이자 다카노附議 曾祖父인 留潮地 이에카네 가 株軍歌文人 쇼니가(少?家)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와 오우치가(大內家)의 庇護아래 發興하여 留潮地 가는 센고쿠다이묘의 한 家門으로 成長하였다.

柳少年期 [ 編輯 ]

郊勞쿠 2年( 1529年 ) 陰曆 2月 15日 , 留潮地氏의 堂主인 留潮地 지카이에 (미즈街에 星州)의 長男으로서 태어났다. 幼年期는 보림원이라는 寺刹에서 養育되었고, 7살에 出家해 法名을 엔게쓰(円月)라 했다. 그러다 덴分 14年(1545年) 할아버지 留潮地 이에스美 과 아버지 留潮地 지카이에가 駐軍人 쇼니氏 (少?氏)에 對한 母斑의 嫌疑로 쇼니氏의 家臣에 依해 살해당한다. 다카노부는 曾祖父인 이에카네의 도움으로 옆 地方인 지쿠고 (筑後)로 脫出하였다. 덴分 15年(1546年) 이에카네는 가마치 家門의 援助를 받아 留潮地 氏를 再興하지만, 93歲라는 高齡과 病患으로 인해 死亡했다. 이때, 이에카네는 다카노附議 技倆을 看破하여 還屬해 미즈街에 留潮地가를 잇게 달라고 遺言을 남겼다.

家督 相續 [ 編輯 ]

덴分 16年( 1547年 ), 다카노부는 還屬해 다네老父(胤信)라는 이름을 쓰고 미즈街에 留潮地 家門의 相續者가 되었다. 그리고 本家의 命을 따라, 駐軍人 쇼니 後遺히社 (少?冬?)를 攻擊하여 追放시켰다. 덴分 17年(1548年) 本家의 堂主 留潮地 다네미쓰 가 죽자, 다카노부는 다네미쓰의 아내(留潮地 이에카도의 딸로 다카노附議 堂姑母)와 婚姻을 맺고 本家를 相續한다. 이에 本家 堂主 就任에 反對하는 重臣들이 있어 當時 주고쿠 地方 (中國地方)의 센고쿠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 (大?義隆)와 손을 잡고 內部의 不滿을 억누른다. 오우치 요시타카에게서 朝廷의 官職 야마시로老카미(山城守)에 任命되었고, 요시타카의 이름 한 글字를 받아서 이름도 잠깐 다카타네(隆胤)를 썼다가 곧 다카노部로 고쳤다.

히젠 統一 [ 編輯 ]

덴分 22年(1553年) 다카노附議 軍勢가 지쿠高로부터 히젠에 上陸한 땅에 있는 「等當」(아카시度), 四家詩 街와소에쵸 이누이度. [a]

덴分 20年( 1551年 ), 오우치 요시타카 가 家神의 謀反에 依해 死亡하자, 後援者를 잃은 다카노부는 堂叔 兼 妻男 留潮地 아키카네(龍造寺鑑兼)를 擁立한 家臣들에 依해 히젠에서 쫓겨나 曾祖父 이에카네를 도와줬던 가마치氏(蒲池氏)의 지쿠고 야나가와 性 (柳川城)으로 避身한다. 거기서 다카노부는 덴分 22年( 1553年 ) 가마치 家의 援助를 받는데 成功하여 히젠을 奪還하였다. 以後 勢力 擴大에 專念한 다카노부는 에이로쿠 (永綠) 2年( 1559年 )에는 한때 主君 家門이었던 쇼니가를 攻擊해 쇼니 後遺히社를 割腹시키고 쇼니 氏를 다이묘 家門으로써 完全히 滅했다.

그 後 에가미氏 (江上氏) 等을 制壓하고 에이로쿠 5年(1562年)까지 洞 히젠의 支配權을 確立했다. 이러한 急速한 勢力 擴大는 近接한 아리마싸(有馬氏)나 오무라氏 (大村氏) 等의 不安을 사 에이로쿠 6年(1563年)에 兩 가는 聯合하여 洞 히젠에 侵攻하지만, 다카노부는 지바氏 (千葉氏)와 同盟을 맺어 이 聯合軍을 물리쳤다. 이로 인해 남 히젠에도 威勢가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이番은 奔告 (豊後)의 오토모 소린 (大友宗麟)李 다카노部를 警戒하여, 에이로쿠 12年 (1569年)에는 小鱗이 直接 大軍을 引率해 히젠을 侵攻하지만, 모리 모토나리 (毛利元就)가 不젠 (豊前)에 侵攻해 왔기 때문에 소린은 히젠에서 撤退했다. 以後 소린은 겐키 元年(1570年)에 男동생 오토모 지카社다 (大友親貞)을 總大將으로 하는 6萬 大軍을 히젠으로 보낸다. 그러나 다카노부는 나베緦麻 나오시게 (過島直武)에 依한 奇襲策으로 擊退하여( 이마야마 戰鬪 ), 오토모 氏와 유리한 强化를 맺는 데 成功했다.

다카노부는 이마야마에서 오토모價와 싸워 이겼지만, 그 後도 오토某氏에게 從屬하고 있었지만 結局 領土를 認定받아 微微家와의 싸움 前까지 領土를 確實히 認定받아 힘을 기르고 있었다. 덴쇼 (天正) 元年(1573年) 서 히젠을 平定, 덴쇼 3年(1575年)에는 北 히젠을 平定한다. 덴쇼 4年(1576年)에는 남 히젠에 侵攻해, 덴쇼 5年(1577年)까지 오무라 스彌陀다 (大村純忠)를 굴복시키고, 덴쇼 6年(1578年)에는 아리마 時게즈美 (有馬?純)를 굴복시켜 히젠의 統一을 完成했다. 이때 嫡長子 留潮地 마사이에 (龍造寺政家)에게 家督을 讓步하고 隱居하였지만, 그러나 政治·軍事的 實權은 如前히 다카노部가 잡고 있었다.

勢力 擴大 [ 編輯 ]

덴쇼 6年(1578年) 오토모 소린 이 微微家와의 싸움으로 시마즈 요시히사 에게 大敗하면서, 다카노부는 오토某氏의 混亂을 他 오토모 氏의 勢力圈의 奪取에 拍車를 加해 덴쇼 8年(1580年)까지 지쿠젠 이나 지쿠고 , 히고 , 不젠 等을 勢力下에 두는 것에 成功했다.

그러나 덴쇼 8年(1580年) 自身과 家門을 도와준 지쿠고의 가마치 아키모리 의 아들 가마치 시게나미 를 謀殺하고 야나가와 誠意 가마치 一族을 沒殺하고 人質로 맡고 있던 아카호시 무네이에 의 아들을 죽이는 等 家神段에게 失望을 안긴다.

덴쇼 9年(1581年)에는 사가라氏 를 물리친 시마즈氏 가 北上하자, 다카노부는 이에 對抗하기 위해서 덴쇼 11年(1583年) 마사이에를 히고에 侵攻시켜 한 때는 시마즈 君을 壓倒하고 있다.

死亡 [ 編輯 ]

덴쇼 12年(1584年) 아리마 하루老父 가 留潮地 氏한테서 배반한다. 이것을 機會로 시마바라半島 에 있는 모든 豪族이 動搖하기 始作했기 때문에, 다카노부는 스스로 大軍을 引率해 시마즈·아리마 聯合軍과의 決戰을 準備한다.

이때 留潮地 軍은 6萬(不分明한 羞恥)大君 이었지만, 敵의 支障 시마즈 이에히社 (島津家久)에게 오키打나와테 戰鬪 (沖田?の戰い)에서 크게 지고 많은 將兵과 함께 다카노部 自身도 享年 56歲의 나이로 시마즈氏의 가신 가와카미 多다카타 (川上忠堅)에 依해 죽임을 當했다.

이 싸움은 留潮地氏의 沒落을 결정지었고 重臣인 나베緦麻 나오시게는 駐軍人 다카노富의 遺骸를 放置한 채로, 도망갔다고 한다.

일화 [ 編輯 ]

  • 宣敎師가 남긴 記錄에는, 히젠의 다이묘는 시저 를 닮은 것 같다고 記錄되어 있다.
  • 젊은 무렵부터 몇 番이나 히젠을 쫓긴 經緯 때문인지 모든 것에 疑心을 품는 冷酷한 人物이었다고 한다.
  • 平常時부터 家神에게 차가웠기 때문에, 오키打나와테 戰鬪 때 敗色이 짙어지자 다카노富의 가마를 메는 것이 짜증이 난 側近들은 가마를 던지고 도망쳤기 때문에 다카노부는 늦게 도망쳐 죽었다고 하는 逸話가 있다.
  • 이와 같이 다카노富의 人間性에 對해서는 否定的인 內容이 많지만 이런 冷酷, 非情, 狡猾함이 있기 때문에 히젠의 豪族에 지나지 않았던 留潮地 家門이 다카노部 一帶에서 큐슈 3强에까지 오른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意見도 있다.
  • 지쿠고의 가마치氏는 留潮地氏에게 다카노富의 아버지 時節부터 堂主 가마치 아키모리 (蒲池鑑盛)가 도움을 주었고 그의 아들인 가마치 시게나미 (蒲池鎭漣)는 다카노富의 딸과 婚姻하여 지쿠고 侵攻에도 留潮地 가를 協力하고 있었다. 다카노部에 있어서 시게糯米는 사위이며 지쿠고에 있어서의 强力한 加勢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노부는 규슈 征伐을 위해 口實을 만들어 덴쇼 8年(1580年)에 2萬의 軍士로 야나가와 城을 攻擊하였다. 그러나 규슈 屈指의 難攻不落의 成人 야나가와 性을 끝내 共樂하지 못하자 다카노部 側 家臣이자 시게나미의 外三寸인 다지리 아키타네 (田尻鑑種)로 因해 强化를 맺는다. 그 뒤 宴會를 假裝하여 가마치 一族도 沒殺시켜 지쿠고를 攻掠했지만, 그 冷酷함은 留潮地 四天王의 한 名 햐쿠타케 圖謀카네 (百武賢兼) 같은 心腹의 忠誠心까지 크게 약화시켰다. 甚至於 햐쿠타케 圖謀타케는 야나가와 性 出陣 消息을 듣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다 끝내 끝까지 出陣하지 않았다. 다카노附議 尖兵이었던 다지리 아키타네 도 後에 다카노部를 배반하였다. 이 가마치 시게나미 의 謀殺과 一族 殺戮은, 구로키 이에나가 , 다지리 아키타네 等 지쿠고의 國人 과 연잇는 背反이나 잇키 를 불러, 結果的으로 다카노부는 지쿠고 經營을 질질 끌게 되어 沒落의 原因의 하나가 되었다.
  • 젊었을 무렵이나 히젠 統一까지는 英明한 人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隱居한 뒤엔 酒色에 빠져 나베緦麻 나오시게와 政務를 멀리하는 等 行悖가 눈에 띄었다고 여겨진다.
  • 相當히 肥滿해서 말을 탈 수 없었다고 한다(이견이 있다). 이 때문에 오키打나와테에서도 逃走할 때에 가마를 使用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지며, 그 때문에 敵에게 발각당했다고 여겨진다. 오키打나와테 戰鬪의 敗北 要因은 다카노附加 無謀한 攻擊 命令을 내렸기 때문에, 軍卒들이 自暴自棄가 했다고 하는 說도 있다.
  • 시마즈 軍이 獲得한 다카노富의 需給은 後에 留潮地街에 返還하였지만, 나베緦麻 나오시게는 返還하는 것을 拒否하였다고 한다.
  • 시마즈 側에 돌아온 목은 다카노部에 因緣이 있던 아카호시 親家의 未亡人에게 引導해지고 놀림감으로 되었다고도 하고, 시마즈 이에히社 에 依해 埋葬해졌다고도 하며, 시마바라半島 의 江에 흘러갔다고도 한다.
  • 다카노부는 스루가 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 (今川義元)와의 共通點을 많이 볼 수 있다. 「한 番은 佛家에 入門했지만 還俗하고 相續하였다」 「肥滿 體軀로 말을 타지 못하고, 前場에서는 가마를 타고 있었다」 「大軍을 引率하고 있었음에도 關聯되지 않고 적은 兵力에 慘敗해 戰死했다」는 共通點이 있다.

評價 [ 編輯 ]

젊은 時節부터 몇 番이나 히젠에서 쫓겨난 經緯 때문인지 疑心을 품기 쉬운 冷酷한 人物이었다고 傳해지고 있다.그래서 살찐 곰이라는 別名을 얻었다.한편으로는 그러한 冷酷함과 狡猾함이 있었기에 히젠의 一國인(一國人)에 지나지 않았던 留潮地(龍造寺)氏가 다카노部(隆信) 一帶에 큐슈(九州) 三綱의 一角까지 올라선 것이 아닌가 하는 意見도 있다[주석 8]. 루이스 플로이스가 남긴 記錄에서는 오키打나와테 戰鬪에서의 다카노附議 軍備에 對해 '細心한 注意와 配慮·決斷은 카이사르의 迅速함과 智慧로도 計劃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45]'고 評價하고 있다.카이사르도 軍事에 關한 限 速斷하는 사람이며 프로이스는 다카노部를 그 以上으로 評價한다.한편 카이사르는 敵對的인 相對를 容恕하는 境遇가 많으며, 當時 유럽에서 의젓한 人物로 有名했으며 [主席 9] 위에서 言及한 다카노富의 人物評과는 正反對이다.

族譜 [ 編輯 ]

  • 父親 : 留潮地 지카이에 (1504 ~ 1545)
  • 母親 : 게이긴니 (1509 ~ 1600) - 留潮地 다네카즈 의 딸
  • 情實 : 留潮地 이에카도의 딸 - 다카노部에게 再婚하기 前에는 留潮地 다네미쓰의 아내
  • 生母를 모르는 子女
    • 아들 : 留潮地 다카히라(龍造寺隆平)
    • 딸: 다마쓰루히메 - 가마치 시게나미(蒲池?漣)의 아내
  • 兩者
    • 아들: 留潮地 이에타다(龍造寺家均) - 고토 다카아키(後藤貴明)의 아들 하루아키(晴明)
    • 딸: 오야스(於安) - 야스코히메(安子?), 히데노마에(秀の前), 妙案니(妙安尼)라고도 函. 留潮地 다네미쓰와 留潮地 이에카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오다 시게미쓰의 아내, 後에 하타 지카시의 後妻

가신·편휘를 받은 人物 [ 編輯 ]

(* 굵은 글字 의 '老夫(信)'을 包含한 人物이 다카노部로부터 便휘를 받은 人物이다.

各州 [ 編輯 ]

  1. 龍造寺隆信公と網漁業(立切網?はじさし網) 」「 燈堂 」, 四家詩 地域文化財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社가 歷史·文化兪譜牒 2018年 2月 14日 確認.
  1. この地は?時海岸で?火があり、上陸の目印となった。軍勢の水先案?をした2人の漁夫には定置網漁を許可する特?が?えられた。その子孫らにより1953年(昭和28年)に石像が建立された(??の石像は2代目) [1]

參考 文獻 [ 編輯 ]

  • 가와兆에 히로시 《留潮地 다카노部》 人物往來社 〈日本의 武裝 45〉, 1967年.
    • 가와兆에 히로시; 가와部에 요시아쓰 (固定) 『留潮地 다카노部 : 五洲 이도의 태수』(改訂版) 賜暇新聞社, 2006年. ISBN   4882981610
  • 對日本人名事典刊行會便 國立國會圖書館 디지털 컬렉션「留潮地 다카노部」『大日本人名事典』下卷 大日本人名事典刊行會, 1926年.
    • 가와兆에 요시아쓰 『全國 히젠과 留潮地 다카노部』弓袋 出版社, 2018年.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留潮地 지카이에
第5代 미즈街에 留潮地가 堂主
1545年 ~ 1578年
後任
무라나카 家門 相續
前任
留潮地 다네미쓰
第19代 무라나카 留潮地가 堂主
1548年 ~ 1578年
後任
留潮地 마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