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倧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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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倧敎
總 信者數
信徒 3,766名, 敎職者 22名 [1]
創始者
羅喆
地域
漢城 北部 재동 ( 1909年 1月 15日 )
  • 道本司, 22個의 施敎堂
  • 滿洲 를 中心으로 獨立運動을 展開

大倧敎 (大倧敎)는 太古로부터 내려오는 古代歷史를 거슬러 올라가며, 檀君 을 믿는 宗敎 이다. 중광 敎祖는 羅喆 로 初期에는 ' 檀君敎 '(檀君敎)라고 불렸다가 解放 後 大倧敎로 바꿨다. 根本 敎理는 性(性)·明(命)·政(精)의 三眞歸一(三眞歸一)과 지(止)·조(調)·金(禁)의 3法이다.

大倧敎는 宗敎로 出發하였지만 그 時期가 바로 日帝强占期 였던 탓에 宗敎로서보다는 抗日獨立運動 에 더 많은 貢獻을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2] 2010年 現在 全國에 約 3,766名의 信徒가 있으며 施敎堂(詩敎堂, 大倧敎의 敎會)과 修道院 20餘곳 等의 組織을 갖추고 있으며 現在 大倧敎의 4代 慶節 重光節 · 御天節 · 嘉慶節 · 開天節 을 記念하고 있다.

沿革 [ 編輯 ]

大倧敎에 따르면, 중광 羅喆 이 1905年 西大門驛 近處에서 百戰(佰佺) 道人으로부터 大倧敎의 經典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傳해 받고, 1908年 도쿄에서 두一百(杜一白) 道人으로부터〈 檀君敎佈明서 〉를 받았으며, 이를 契機로 大倧敎를 일으켰다고 한다. [3] 羅喆은 日本이 韓國에 對한 干涉과 强迫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抗議하고자 4次에 걸쳐 日本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歸國하여 救國運動이 몇 사람의 政客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切實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國家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民族을 부흥시키는 原動力은 民族意識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年 1月 15日 同志 오기호, 정훈모, 이기 , 김윤식 , 幼根 等 10名과 함께 서울 宰棟에서 ‘단군대皇祖神位(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檀君敎佈明서〉를 公布함으로써 國調 檀君을 崇仰하는 檀君敎를 創始하였다. [2]

시교(始敎)한 지 1年 만인 1910年, 大倧敎로 校名을 改稱하는 한便, 같은해 滿洲 北間島 에 支社를 設置하였다가, 1914年에는 大倧敎 本社를 이곳으로 옮겨 布敎 領域을 國內와 滿洲 一帶로 擴大시켰다. [2] 獨立運動 性向인 檀君敎는 서울의 정훈모(鄭薰模)가 親日로 變節瑕疵 1910年 7月 30日 에 大倧敎로 名稱을 變更하였고 정훈모는 ‘檀君敎’의 이름을 固守하며 分派해 나갔다.

一齊 1915年 10月 《總督府令 83號 宗敎統制案》을 發表함으로써 大倧敎를 宗敎 團體로 僞裝한 獨立運動 團體로 規定하여 彈壓이 심해지자 滿洲의 지린省 허룽 現 청파號로 總本司를 옮기고 서일 , 박찬익 等과 함께 民族 敎育 獨立運動 가를 養成하였고, 《 單調事故 》《 神壇實記 》, 《 신단민사 》 等의 을 編纂했다. 日帝强占期 1920年代 에는 國外에 獨立軍 基地를 建設하고, 人道主義 平等 性을 바탕으로 民族解放을 達成하기 위한 武裝鬪爭을 벌였다. [4]

1916年 羅喆 이 죽자 大倧敎의 역사서라 할 수 있는 김교헌 이 2代 敎主로 就任하였는데, 그는 3·1運動 以後 滿洲로 들어가는 同胞들을 包攝하여 그들로 하여금 抗日救國運動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實例로 20年 日本軍을 크게 무찌른 靑山裏大捷 의 主役이었던 北路군정서 의 將兵 大部分이 大倧敎人이었다. [2]

한便, 日帝의 彈壓이 날로 심해져 3代 敎主 윤세복 이 就任한 以後 많은 敎人이 逮捕·虐殺되었고, 1932年 이른바 滿洲國의 誕生과 함께 大倧敎徒 地下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年 施敎堂의 數가 52個로 增加하였다. 이러한 布敎活動은 곧 獨立運動의 一環이었으므로 敎勢 擴張은 바로 獨立運動의 擴大이기도 하였다. 1948年 金敎獻이 죽을 무렵에는 韓國·萬株·老齡(露量)·中國 本土 等에 48個의 施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2]

敎育과 獨立運動 [ 編輯 ]

羅喆은 祕密 結社 組織인 자신회(自新會)를 組織하여 乙巳五賊 으로 알려진 이완용 , 권중현 , 박제순 , 이지용 , 이근택 의 다섯 人物의 暗殺 을 試圖했다. 또한 그들을 죽이자는 斬奸狀(斬奸狀)을 돌리기도 했으며, 日本을 訪問해 日本 宮城 앞에서 斷食鬪爭을 하기도 하였다. 大倧敎 중광 60年史에 따르면 羅喆은 이 事件 때문에 政府 顚覆 嫌疑로 務安郡 指導(智島)에 流配되기도 했는데, 1909年 正月 15日 子時(子時: 밤 11時~새벽 1時) 서울 北部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餘 名의 同志들과 檀君敎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重光節(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旣存에 있던 것을 새롭게 中興한다는 意味였다. 亡國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危機를 느낀 사람들이 檀君敎에 續續 入敎했지만 서울 北部支社校(北部支司敎) 정훈모가 親日로 돌아서고 日帝의 彈壓이 加해지자 羅喆은 1910年 8月 校名을 大倧敎로 바꾸었다. [5]

1919年 上海 臨時政府가 發足하면서 臨時의정원 議員 35名 가운데 28名이 大倧敎 敎徒였다. 獨立戰爭史에 記錄된 봉오동, 靑山裏 大捷의 實質的인 指揮部는 大倧敎였다고 한다. 이상설 , 김좌진 , 洪範圖 , 박은식 , 김규식 , 신채호 , 이상용, 김동삼, 李範奭 等 愛國志士들이 그들이었다. 韓國戰爭 때 拉北된 鄭寅普를 비롯해 김두봉 , 이극로 等도 大倧敎人이었다. 김두봉은 1916年 九月山 에서 羅喆 이 殉敎할 때 詩봉하기도 했다.

還國 直後에도 大倧敎는 蕃盛했다. 50年代 後半 敎徒 數가 60萬 名을 넘어섰고, 三一神誥 , 天符經 , 참전계경 等 經典과 閨怨士禍 , 환단고기 等 歷史書를 普及시켰다. 還國 以後 大倧敎는 民族 宗敎의 嫡統으로 認定받아 初代 政府의 第1 敎壇으로 登錄되었다. 當時 大倧敎의 知識人들이 政府의 高位官吏로 立脚해 活動했다. 안호상 初代 문교부 長官 等이 中心이 되어 大韓民國의 正體性을 確立했다. 敎育理念에 弘益人間 이 採擇되었고 檀君 年號, 開天節, 한글 專用 等이 施行되었다.

民間에서는 代宗敎 中心으로 民族 行事들이 開催되어 1946年 光復 1周年 當時엔 大倧敎 總本司에서 採火된 聖火가 南山 꼭대기에 點火되었다. 그해 開天節 行事에선 聖火가 總本司에서 採火되어 摩尼山 塹城壇 까지 奉送, 點火되었다. 弘益大 , 檀國大 , 慶熙大 等이 大倧敎 敎人에 依해 設立된 大學이듯이 大倧敎 歷史 自體가 敎育과 獨立運動이었다. [6] [7] [8]

1910年 庚戌國恥 以後 羅喆 이 校名을 大倧敎로 바꾸고 滿洲로 敎壇을 移動하자 정훈모가 이에 反撥하여 檀君敎라는 校名을 固守하며 敎壇을 分離·獨立하였다. 羅喆 이 校名을 바꿔 滿洲로 移動하게 된 契機가 정훈모를 中心으로 한 몇몇 親日分子들에 依한 敎團 內紛이었다. [9] 정훈모의 檀君敎는 檀君 을 信奉했음에도 不拘하고 日帝의 統治에 順應하였으며, 敎團의 首腦部에는 친일인명사전 에도 收錄된 親日派 가 있었다. [10] 1912年 에 內紛이 일어나 敎壇이 둘로 나뉘었으나 1915年 정훈모가 敎壇을 再整備하였으며, 1930年에는 始興에 檀君戰(檀君殿)을 세우고 本部를 移轉하였다. 以後 內紛이 이어지고 日帝가 少數 宗敎에 對한 彈壓을 强化하자 1936年에 廢校되고 信者들도 瓦解되었다. [11] [12]

能力 中心의 先史 時代 [ 編輯 ]

大倧敎 堤川 行事에서는 檀君 할아버지와 함께 檀君 할머니를 함께 모신다. [13] [14] 大倧敎 側에서는 아기 를 점지하는 三神할머니 [15] 까지 한얼님이라며 하느님으로 說明한다. [16] 大倧敎 側의 主張은 아니지만 中國은 우리나라의 3皇5題 를 中國의 祖上으로 둔갑시켰다고도 하며, [17] 基督敎 야훼, 여호와가 바로 與와 라고 하는 舌禍 이야기 또한 우리 民族에게는 存在한다. [18] 餘와는 伏羲女媧度(伏羲女?圖)에도 登場하며 [19] 中國 3皇5題 中에 3黃에 屬하는 [17] 요순 時代 같이 世襲 基盤이 아니면서 [20] 의 身分인 [21] 女性 檀君이다. 이 분의 檀君이라는 身分은 大倧敎 總典敎 권태훈 先史 時代 와 關聯한 證言에서 歸納法 敵 論理 展開를 根據로 한다. [20] 參考로 先史 時代와 關聯한 擬似 歷史學 學界에서 古朝鮮 聯邦國家 12個 還國 中에 하나이다. [22]

經典 [ 編輯 ]

古經典 [ 編輯 ]

新經典 [ 編輯 ]

  • 《神理大全(神理大全)》 [23]
  • 《會三經(會三經)》 [24]
  • 《진리도설》
  • 《口辯圖說(九變圖說)》 [2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2005年 人口 및 住宅센서스 集計
  2. 大倧敎, 《글로벌 世界 大百科》
  3. '三一神誥',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4. 2004年 2月 9日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獨立鬪爭의 代父 弘巖 羅喆, MBC
  5. 洪範圖 大韓獨立軍 亡國 10年 만에 國內 眞空作戰 砲門, 中央SUNDAY(2012.02.05) 記事 參照
  6. “熾烈했던 抗日鬪爭 뒤에 民族宗敎 있었다” . 世界日報. 2017年 8月 16日 . 2018年 4月 26日에 確認함 .  
  7. “‘肉彈血戰’ 외친 義軍府 獨立宣言書, 抗日武力鬪爭 불 댕겨” . 東亞日報. 2018年 4月 9日 . 2018年 4月 26日에 確認함 .  
  8. “獨立運動 代父 ‘羅喆’ 愛國魂 기린다” . 韓國日報. 2016年 10月 31日 . 2018年 4月 26日에 確認함 .  
  9. 「韓國宗敎思想史」, 大倧敎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出版部(1998年, 145P ~148P 內容參照)
  10. 檀君敎復興經略(檀君敎復興經略), 1冊 82張, 新鉛活字本, 김재웅(金在雄) 校閱, 정진홍(鄭鎭洪) 編輯(1937年) 參照
  11. 「韓國宗敎思想史」, 大倧敎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出版部(1998年, 119P ~139P 內容參照)
  12. 韓國民族文化大百科 檀君敎 1912年 이유형·서창보의 私利私慾 行爲에 對한 市敎師(施敎師)들의 批判과 敎人들끼리의 主導權 爭奪로 敎壇에 內紛이 일어나자 정훈모는 1915年 에 兩分된 敎壇을 再整備하고 1930年 敎堂人 檀君戰(檀君殿)을 始興에 세워 本部를 移轉, 本部와 支部의 組織을 强化, 交戰(敎典)을 刊行하는 等 活潑한 布敎活動을 벌였지만 곧 資金問題로 信徒들이 敎主를 告發하는 事件이 일어나고, 日帝의 無關心과 壓力이 加해지자 始興의 本部가 閉鎖되고, 정훈모가 死亡하면서 各 支部는 獨自的인 行動에 檀君敎는 瓦解로 消滅되었다.”
  13. “寄稿 개川鐵, 우리에게 檀君은 누구인가” . 京鄕新聞. 2005年 9月 30日.  
  14. “檀君王儉은 男性이었나, 女性이었나?” . 오피니언뉴스. 2015年 7月 30日.  
  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三神(三神)” . 韓國學中央硏究院. 1995.  
  16. “大倧敎란?” . 大倧敎 强化 檀君聖殿. 2021年 8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1年 8月 24日에 確認함 .  
  17. “中國의 3皇5祭는 우리나라 祖上이다.” . 中部每日. 2005年 11月 9日.  
  18. “三神할매 마고에서 始作된 韓民族(35)” . hy因山인터넷新聞. 2020年 4月 2日.  
  19. “所藏品檢索 伏羲와 與와” . 國立中央博物館 . 2021年 8月 24日에 確認함 .  
  20. “봉우 先生님 資料室 其他資料 臺皇祖 이야기” . 봉우思想硏究所. 2004年 6月 27日.  
  21. 保社機 三황본기 , 《 詐欺
  22. “[Why] 솔깃하지만 믿기엔… 너무 燦爛한 韓民族 上古史” . 朝鮮日報. 2009年 7月 4日.  
  23. 神理大全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24. 會三經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25. 口辯圖說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參考 文獻 [ 編輯 ]

  • 「靑少年을 위한 韓國哲學史」, 김윤경 저, 두리미디어(2007年, 330p)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