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익
(金豊益,
1921年
陰曆 8月 6日
~
1950年
6月 26日
)은
大韓民國
의 軍人으로
韓國 戰爭
初期
議政府 戰鬪
에서 戰死했다.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忠淸南道
洪城郡
出生으로 1936年 4月에 5年制의
善隣商業學校
를 入學하여
[1]
1941年 3月 31日 卒業하였다. 以後
1944年
12月
부터
1945年
8月 15日
까지
光復軍
에서 副士官 下士로 服務하다가 光復軍 退俗하였으며 以後
1948年
8月 17日
陸軍士官學校
第7期 特任으로 入校해 小井과 軍事敎育과 訓鍊을 받고 1948年 10月 12日 陸軍 少尉로 任官되었다.
1950年 5月 1日 陸軍 少領으로 進級하고 5月 5日 陸軍砲兵學校 第2교도大隊 大隊長으로 赴任했다.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陸軍作戰命令 第95號에 따라 第2敎導隊臺는 2師團에 配屬되어(26일 01時), 서울 용산동 本部를 出發하여 議政府 戰線으로 向하였다. 김풍익 少領은 1包袋를 東豆川 方面에, 第3包袋를 송우리 附近에, 第2包袋를 議政府 北方 25 km 地點인 금오리에 配置하고 자일리 附近 戰線에 集中 砲擊을 加했다.
[2]
그러나, 韓國軍이 遠距離에서 쏘는 求刑 105mm M3 野砲의 火力은 北韓軍 T-34型 電車의 前進을 막지 못하였다.
[3]
이에, 金 少領은 敵戰車를 破壞하는 길은 오로지 野砲의 直接照準 射擊뿐이라고 判斷하고, 금오리에 配置된 第2包袋의 布陣으로 뛰어가 典布大將 최진식 中尉에게 基準砲를 끌어내라고 命令하였는데, 마침 基準砲가 故障으로 움직이지 않자, 6番布를 끌어내어 砲隊長 장세풍 大尉와 함께 同胞隊員을 帶同하고 敵陣으로 달려 갔다.
[4]
그리하여 자일리 西南쪽 1km까지 前進했다.
[5]
6月 26日 午前9時 40分頃
朝鮮人民軍
의 先頭 電車가 山모퉁이를 돌아나와 50m 前方까지 다가왔다. 金 少領이 이끄는 6番布 班員들은 直立 照準射擊으로 제1탄을 發射, 명중시켰다. 이어 第2彈을 裝塡하는 瞬間 北韓軍 電車에서 職사탄이 날아와 金少領을 비롯한 抛班員 全員이 戰死하였다.
[6]
事後 1950年 8月 24日 陸軍 中領으로 1階級 特進되고 12月 30日
을지武功勳章
과
忠武武功勳章
이 追敍되었으며 1980年 6月 25日에는 陸軍砲兵學校에 그의 銅像이 建立되었고 또한
銅雀洞
國立顯忠院
유패봉안소에 그의 儒牌가 奉安되었다.
1988年 10月 25日에는 그의 戰士 場所인
議政府
축석령
에 戰績碑가 建立되었다. 1995年 6月에, 戰爭記念事業會의 戰爭英雄으로 選定되었다. 家族으로는 夫人 김석환(金奭煥) 氏가 있다.
[7]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