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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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제 (金昶濟, 1880年 - 1957年 )는 日帝强占期 韓國 의 YMCA 運動家, 基督敎 敎育자, 社會事業家, 文筆家이다. 1918年 咸興 YMCA 創設을 主導하였고, 이화여전과 YMCA 學館에서 敎師로 奉職하였다. 中央 YMCA와 京城YMCA의 理事를 歷任했다.

1919年 3.1 運動 當時 迷信과 虛荒된 煽動이 있음을 들어 參與를 拒否하였다. [1] 한便 獨立運動에 參與하기를 拒否하여 一部 知識人層의 批判을 받기도 했다.

相當數 글과 칼럼, 講演活動을 통해 日帝强占期 中盤 以後 基督敎 契의 代表的인 文筆家로 活動하였고, YMCA 日曜講座 等 各種 講演會를 통해 靑年 學生層에게 人氣가 높았다. 1934年 科學데이實行回 委員長과 朝鮮語學會 標準語 司正委員으로 活動했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1877年 忠淸南道 保寧郡 儒學者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문물을 接하고 西歐 文物의 受容의 뜻을 품은 그는 일찍이 上京하여 官立한성사범학교 ( 경기고등학교 의 前身)에 들어갔다. 官立漢城事犯高等學校 在學 中 基督敎 長老敎 로 改宗하고, 1903年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創設될 때부터 學生會員으로 活動하였다. 官立漢城高等學校를 卒業하고, 中央 YMCA에서 活動하였다.

1909年 3月 유성준(兪星濬), 박승봉(朴勝鳳), 민준호(閔濬浩), 이주완(李柱浣) 等의 兩班出身들은 안국동에 安東敎會 를 開拓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윤치소 와 함께 安東敎會 創立을 主導했다. 그는 自身의 집이 있던 홍수례骨 自宅(現在 재동초등학교의 뒤便)을 安東敎會의 禮拜堂으로 헌당하여 1年間 이곳에서 禮拜를 드렸다.

敎育, 信仰 活動 [ 編輯 ]

乙巳條約 以後 公職提議를 拒絶하고 敎育과 實力 養成, 信仰 傳道 活動에 專念했다. YMCA 學館 敎師를 비롯해서 學生Y 및 遐齡會議 講師, Y의 理事와 委員으로 活動했으며, 特히 日曜强化의 講師로서 크게 活躍을 했다. 1913年에 總督府의 唆囑으로 維新會 會員들이 YMCA 總會에서 그 主導權을 잡으려고, 名譽理事制를 採擇케 하자 그는 YMCA를 지키기 爲해 日本인 名譽理事 選出에 反對하여 抵抗했으며, 1912年에 열린 學生遐齡會에는 講師로 招聘되어 講演을 통해 學生들을 뜨겁게 감동시키기도 했다.

脂肪YMCA 育成을 위해서 1915年에 咸鏡北道 鏡城의 함일學校(咸一學校) 學監으로 赴任했고, 1917年 咸鏡南道 咸興의 永生學校(永生學校) 學監으로 赴任했다. 함경남북도에 滯留 中 그는 信者들을 모았고, 咸興 YMCA를 創設하는데 決定的인 貢獻하였다. 1917年에 이순기(李舜基), 현원국(玄洹國), 영(L. L. Young) 等을 創立準備위원으로 삼아 永生學校 學生 YMCA를 組織했다. 이때 L. 寧殷 캐나다 宣敎部에 連絡하여 YMCA 活動 支援을 交涉했고 현원국은 學生들을 위한 圖書購入에 힘쓰면서 그 해 3月 25日에 創立總會를 열게 되었다. 初代會長에는 캐나다 宣敎師 脈그레이(D. M. McRae, 馬具禮), 副會長에는 某學僕(毛鶴福), 書記에 이순기, 理事에는 김창제와 허헌(許憲), 최영학(崔榮鶴), 홍기진(洪基鎭) 等이 選任되어 咸興YMCA를 出帆시켰다.

文筆 活動 [ 編輯 ]

그는 文筆家로서 YMCA 會報인 靑年 知의 發行人, 主筆을 비롯해서 開闢(開闢), 趙匡(朝光) 等 雜誌에도 筆陣으로 參與하였고, 朝鮮一步, 동아일보 等의 日刊新聞에도 많은 글과 칼럼을 寄稿하였다. 그의 글은 大部分 非政治的인 內容으로 信仰生活, 敎育 活動, 啓蒙, 勤勞 意識 鼓吹, 배움의 必要性을 力說한 內容이 大部分이다. 뛰어난 雄辯솜씨로, YMCA 日曜講座에서는 그의 該博한 知識과 流暢한 言辯으로 靑年들의 人氣를 얻기도 했다.

論說로는 '今日 經濟的 狀態와 學生의 覺醒', '新人(新人)', '生命의 貯蓄', '現代 靑年의 苦悶', '소사(小事)는 大使(大事)','蘇', '新(神)과 人(人)','忍耐하라', '人文發達과 基督敎의 貢獻', '첫째 날', '예수의 敎訓과 柔術注意' 等이 있다.

敎育 活動과 最後 [ 編輯 ]

1920年부터 1924年까지 開城 松都高普와 호수돈여고補宜 敎師로 奉職하다가 1924年 7月에 李花女子中學校 敎師로 赴任하여 國語와 歷史를 가르쳤고, 1939年 3月 停年으로 退職하였다. 1923年부터 展開된 韓國農村運動에는 核心委員이 되고, 京城YMCA 理事와 中央YMCA聯合會 理事로 活動했다. 1926年에는 李花女子專門學校 國語敎師로 出講하였다.

1933年 잡지 科學朝鮮(科學朝鮮)의 筆陣 兼 編輯顧問이 되었다. 1934年 7月 5日 서울 泰西館(太西館)에서 異人 (李仁), 김용관(金容瓘), 박길룡(朴吉龍) 等 發明學會 幹部들과 서울市內 中等學校 敎師 等 100餘 名 等과 함께 科學知識普及會(科學知識普及會)를 創立하였다. [2]

8.15 解放 以後에는 서울大學校 名譽敎授로 推戴되었다. 그는 一生을 剛直하게 살다가 1957年 11月 4日 에 死亡했다.

3.1 運動에 對한 觀點 [ 編輯 ]

그는 윤치호 에게 3.1 萬歲 運動 當時 各種 迷信과 流言蜚語가 擴散되었다고 밝혔다.그는 3.1 運動 에 對해 愛國的이기는 하지만 投機, 迷信, 허황된 말, 陰謀에 기초하고 있어서 同調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3]

多數의 목소리가 곧 主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죠. 예수님을 十字架에 못박게 한 것도 多數의 要求잖아요. 天道敎와 基督敎의 聯合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얘기도 事實이 아닙니다. 主님의 아들에게 死刑을 宣告한 것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聯合이었잖아요. [4]

그는 自身이 3.1 運動 에 參與할 수 없는 理由를 說明한 뒤, 多數의 생각, 多數의 選擇이 반드시 올바른 選擇은 아니라는 見解를 披瀝하였다. 아울러 김창제는 多數의 選擇이 無條件 올바른 選擇이고 民主主義 라고 解釋하는 것을 反對했다. 윤치호 는 그의 見解에 積極 共感하였다.

기타 [ 編輯 ]

代表的인 親日 人士 尹致昊는 김창제가 賢明한 사람이라는 評을 남겼다. '그는 冊도 많이 읽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다. 그는 獨立騷擾에 加擔하지 않아 均衡 잡힌 意識의 所有者임을 立證했다. 勿論 그를 辱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반드시 올바른 길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모든 사람을 反逆者라고 烙印 찍는 어떤 親舊들보다는 敎育과 事業, 靑年 啓蒙에 獻身하는 金氏가 좀더 賢明한 愛國者다 [5] '라는 評을 남겼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윤치호,《尹致昊 日記 1916~1943: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時期》 (人物과 思想史, 2001) 109페이지
  2. 科學知識普及會
  3. 윤치호,《尹致昊 日記 1916~1943: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時期》 (人物과 思想史, 2001) 109페이지
  4. 윤치호,《尹致昊 日記 1916~1943: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時期》 (人物과 思想史, 2001) 109페이지
  5. 윤치호,《尹致昊 日記 1916~1943: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時期》 (人物과 思想史, 2001) 51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