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者 (古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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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箕子
기자 조각상
記者 彫刻像
箕子朝鮮 의 初代 國王(諸侯)
在位 ? ~ ?
前任 檀君王儉
( 朱武王 諸侯 冊封)
後任 ?
(後代 조선후 )
이름
自序餘(子胥餘), 自首油(子須臾)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死亡日 未詳
性別 男性
父親 문정

記者 (箕子, 生沒年 未詳 )는 中國 商나라 문정 (文丁)의 아들, 王族이자 箕子朝鮮 의 始祖로 알려져 있는 傳說上의 人物이다. 姓은 자(子), 이름은 緖餘(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記者는 作爲命人 同時에 別稱이다. 商나라 末期에 王族으로 태어나 紂王 諸神 時期를 살았으며, 商나라가 周나라 에게 滅亡당하자 朝鮮 으로 亡命하였다고 傳해진다. 朝鮮으로 亡命한 後에는 朝鮮의 君主가 되어 그의 後孫이 1千餘 年 동안 古朝鮮을 다스렸다고 傳해지나, 事實 與否는 論難이 많다.

生涯 [ 編輯 ]

이덕무 의 《앙엽기》(?葉記), 이만운 의 《 紀年兒覽 》(紀年兒覽), 안정복 의 《 東史綱目 》(東史綱目)에 따르면 箕子朝鮮 의 第1代 君主인 記者는 紀元前 1126年 부터 紀元前 1082年 까지 在位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휘는 緖餘(胥餘) 또는 수유(須臾)였고 諡號는 太祖문성왕 (太祖文聖王)이라고 한다. 그의 王位는 腸혜왕 (宋(松))李 承繼받았다고 한다.

記者에 對한 傳說은 ‘ 商나라 의 王族 記者’와 ‘箕子東來說’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記者는 賞나라의 王族으로 暴君 紂王의 親戚이었다. 上나라의 太史(太師)로 官職에 있을 무렵 紂王이 暴政을 行하는 것을 보고 이를 그만둘 것을 諫言하였다가 監獄에 갇혔다. 이에 記者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紂王은 그를 奴婢로 삼았다고 한다. 紀元前 1122年 에 商나라가 周나라 武王 에게 滅亡 [1] 當하고 記者를 釋放하여 臣下로 삼고자 하였으나 記者는 이를 拒否하고 隱遁하였다. 記者는 周나라의 武王이 天道(天道)를 묻자 洪範九疇 (洪範九疇)를 陳述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紀元前 1119年 에 周나라 王室에 粗氷 [2] (朝聘)하였다고 한다.

한便, 箕子東來說은 위의 記者 傳說과 若干 다르다. 商나라가 滅亡하자 記者는 周나라의 臣下가 되는 것을 拒否하고 朝鮮으로 亡命하였으며 이에 周나라 武王은 記者를 朝鮮에 봉하였다고 한다. 記者는 5千餘 名의 무리와 함께 朝鮮으로 와서 朝鮮의 百姓들에게 文明을 가르쳤다고 한다. 一部 記錄에서는 記者가 건너오자 元來 朝鮮의 君主였던 檀君이 記者를 被害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記者는 平壤에 都邑을 두고 8條의 法禁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井田制(井田制) [3] 를 實施하고 農事짓는 法과 누에치는 法을 가르쳐 百姓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記者의 死亡한 時期는 正確하게 알 수 없으나 洪萬宗의 《동국歷代總目(東國歷代總目)》에는 《진조通寄(震朝通紀)》라는 作者 未詳의 書籍을 引用하여 紀元前 1083年 ( 戊午年 )에 93歲로 死亡하였다고 記錄하고 있다.

箕子東來說 [ 編輯 ]

箕子東來說이란 記者가 商나라가 滅亡한 以後 東쪽으로 亡命해와 고조선의 王이 되어 1000餘 年 동안 다스렸다는 傳說이다. 箕子東來說은 大體로 한나라 ( 紀元前 2世紀 ) 以後의 文獻에서 集中的으로 나타난다. 漢나라 以前의 文獻(先진문헌{先秦文獻})에는 記者가 周나라의 支配를 拒否하고 隱遁하였던 事實만 記錄하고 있으며, 그 以後 記者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生成과 發展 [ 編輯 ]

箕子東來說이 나타나는 最初의 文獻은 《上西大田(尙書大典)》과 《 詐欺 》이다. 《上西大田》은 中國 最初의 歷史書로 評價되는 《上書》에 主席과 本文을 追加한 儒敎 經典으로 漢나라 以前의 《上書》에는 나타나지 않는 箕子東來說이 追加되어 있다. 《上西大田》에 따르면 記者는 周나라의 支配를 拒否하고 朝鮮으로 亡命하였다고 하며 周나라 武王은 이를 듣고 記者를 朝鮮에 봉하였다고 한다. 한便 《詐欺》 〈송미자世가〉에도 記者가 朝鮮의 君主가 되었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上西大田》과 反對로 武王이 記者를 朝鮮에 봉하여 記者가 朝鮮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文獻의 差異는 以後 記者가 스스로의 힘으로 朝鮮을 세웠는지, 아니면 周나라의 諸侯國으로 朝鮮을 세웠는지를 놓고 論爭이 벌어지는 原因이 되었다. 以後 《 漢書 》와 《 三國志 》에서 繼續해서 箕子東來說을 記錄하는 한便 記者 以後의 古朝鮮 歷史에 對해서도 記者와 聯關시켜 記錄하였다.

이러한 箕子東來說에 對한 基本 文獻들이 成立되자 以後부터 箕子東來說의 事實 與否와 關係없이 記者를 朝鮮의 君主로 崇尙하는 傾向이 많아졌다. 三國時代 에도 高句麗 가 記者에게 祭祀를 지냈다고 하며 新羅 최치원 도 箕子東來說을 肯定하였다. 高麗 時代에는 儒敎 가 統治 理念으로 漸次 굳어져 가면서 韓國 儒敎文化의 始原的 存在로 記者에 對한 崇拜가 强化되었다. 그 結果 1102年 에는 平壤에 記者祠堂이 세워져 國家의 祭祀를 받았으며 記者의 墓까지 만들어졌다. 以後 朝鮮 初期에는 檀君과 記者가 나란히 國調로 숭상되었으며 《東國史略》에서 檀君朝鮮·箕子朝鮮·衛滿朝鮮의 三朝鮮으로 이어지는 體系를 定立하면서 箕子朝鮮이라는 王朝가 確固하게 자리잡았다. 性理學 이 發達하면서 士林 에 依해 記者 尊崇 意識은 더욱 發展하였고, 李珥 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記者를 尊崇하는 書籍까지 編纂되었다. 開港期 以後에도 記者에 對한 尊崇 意識은 繼續되었으나 自主性을 强調하기 위해 記者가 武王에 依해 朝鮮의 君主로 冊封된 것이 아니라 記者가 朝鮮의 君主가 되고 난 後에 武王이 冊封하였다는 解釋이 支配的이 되었다.

箕子東來說에 對한 批判 [ 編輯 ]

箕子東來說은 三國時代 以來 오랫동안 事實로 여겨왔으나 現代에 들어서는 많은 批判을 받아 事實이 아닌 造作이라는 主張이 支配的이다. 特히 記者에 關한 文獻을 分析한 結果 漢나라 以前 文獻에서는 記者가 朝鮮으로 갔다는 內容이 없고, 한나라 가 古朝鮮을 멸망시킬 무렵부터 나타나기 始作한 點이 重要한 根據가 된다. 또한 考古學的으로도 古朝鮮과 商나라·周나라의 文化가 明白하게 差異를 보이는 點도 重要한 根據다. 平壤에는 記者와 關聯된 遺跡들이 存在하는데, 實際 考古學的으로 平壤의 遺跡들은 考慮·朝鮮時代에 만들었다는 게 이 主張을 뒷받침한다.

箕子東來說이 登場한 背景으로는 普通 中國 特有의 中華意識 을 指摘한다. 古代 中國은 周邊 異民族을 記錄할 때 恒常 中國 古代 人物의 後孫으로 記錄하였다. 이러한 背景 아래에서 朝鮮의 時調를 記者로 看做하는 視角이 있었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中國 側 視角에 便乘하여 周邊 異民族들이 自身들의 時調를 中國의 古代 人物이라 主張하는 모화(慕華) 意識이 많이 나타나는데, 三國時代 以後로 나타난 記者 尊崇 意識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解釋한다.

한便 箕子東來說에 關해 一部分 肯定하는 主張도 存在한다. 中國 허베이省 東部와 랴오닝省 西部에 該當하는 요서 地方에는 氣(箕)라는 名門을 새긴 靑銅器를 많이 發見했다. 考古學的으로 이들을 記者와 關聯된 種族으로 보는데 이들이 漸次 東쪽으로 移住하면서 古朝鮮의 支配階層을 代替하거나 합쳤다는 見解다. [4] 記者 或은 記者族이 東쪽으로 移動한 事實을 肯定하면서 記者가 箕子朝鮮이라는 國家를 成立한 게 아니지만 後에 記者와 關聯된 人物이 朝鮮의 支配層이 되면서 箕子朝鮮 傳說로 發展하였다는 見解도 있다. 다만 宏壯히 漸進的으로 變化한다는 限界가 있으며, 氣候라고 새겨진 靑銅器는 古朝鮮의 初期 中心地로 推定되는 夭逝가 아닌 산둥省을 爲主로 다른 周邊國과 部族의 名稱이 새겨진 靑銅기와 섞여서 出土되기 때문에, 이는 出土된 地域에 國家를 形成했다기 보다는 交易이나 移住 等으로 인해 偶然히 '氣候'名 靑銅器가 入手되었을 可能性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一部 在野史學者들은 記者 또는 記者의 後孫이 古朝鮮의 一部인 番朝鮮의 王이 되었고, 이 때문에 箕子朝鮮 傳說이 생겼다고 主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見解는 大部分 《 환단고기 》와 같은 魏書 에 根據하고 있기 때문에 韓國史學界에서는 認定하지 않는다.

評價 [ 編輯 ]

箕子東來說은 現在 韓國史學界에서 事實이 아니라고 評價된다. 하지만 箕子東來說이 三國時代 以後 韓國史에서 차지하는 比重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影響에 對해서는 다양한 評價가 存在한다. 大體로 이른 時期부터 韓國이 中國의 文物을 受容하여 中國에 못지않게 文明國이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象徵으로 記者 尊崇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一般的이다. [5]

記者 韓民族(韓民族)설 [ 編輯 ]

이 主張은 記者가 朝鮮을 建國한 것은 맞지만 記者는 中國人이 아니며 韓民族이라는 說이다. 이를 主張하는 學者로는 천관우, 以上市, 이병도 等이 있으며 그 主要 內容은 아래와 같다.

  • 中國 山西省 태曲玄 一帶에 동이가 세운 基國이 이미 存在하였고, 周나라의 壓力을 받아 東邦으로 移動하였고, 동진을 繼續하여 大同江 流域에 이르렀다는 主張(千寬宇).
  • 그 內容은 旣存의 四書를 따르지만, 東萊韓 記者는 中國人이 아닌 東夷의 人物이라는 主張(以上市).
  • '韓氏 朝鮮說' - 古朝鮮에 祈願한 한후(韓候)가 夭逝로부터 阿斯達로 移動, 支配勢力이 되었다는 主張(李丙燾).

기타 [ 編輯 ]

  • 그는 韓國 民間과 巫俗 에서 君王神(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지며, ‘期自身’(箕子神)이라 부른다. 平壤 黃海道 地域의 巫俗神으로 主로 崇拜되었다.
  • 1763年 윤치정 의 知人에 依해 愛民女子(愛民如子)라고 쓴 記者의 親筆 書信이 한 山寺에서 發見되었다. 이는 韓國 戰爭 을 겪으면서 實戰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中國에서는 最近의 考古學 硏究에서 紀元前 1046年 에 商나라가 滅亡한 것으로 結論지었다. 이는 近代 歷史學이 發達하기 以前까지 公認되었던 紀元前 1122年( 己卯年 )과 差異가 있다.
  2. 臣下가 朝廷에 나아가 임금을 만나는 일
  3. 土地를 '井'자 模樣으로 總 아홉 區劃으로 나눈 다음, 여덟 區劃은 여덟 農家에게 平等하게 分配하고, 나머지 中央의 한 區劃은 空轉(公田)으로 여덟 農家에게 共同 耕作을 맡기고, 이 公田에서 生産되는 모든 收穫物을 稅金으로 바치게 하는 土地 制度이다. 또한, 事前(私田)으로 分類된 나머지 여덟 區劃의 土地에서 生産되는 生産物은 모두 該當 農家의 所有이며, 該當 土地는 原則的으로 사사로이 賣買할 수 없다.
  4. 이형구, 〈夭逝地方의 古朝鮮:眞個 同情 以前의 夭逝地方의 箕子朝鮮〉, 《檀君學硏究》18號, 檀君學會, 2008年
  5. 韓國民族文化大百科 箕子東來說 項目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檀君王儉
古朝鮮 의 國王
紀元前 1122年 ~ 紀元前 1082年
後任
조선후 (後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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