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衆 (春秋)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管이오
學者 情報
時代 春秋 時代
地域 東洋 哲學
學派 法家 , 道가

管이오 (管夷吾, 紀元前 725年 ? ~ 紀元前 645年 )는 中國 春秋 時代 初期 齊나라 의 政治家이자 思想家로, 者는 (仲)이며 映像(潁上) 사람이다. 普通 成氏와 者를 合쳐 觀衆 (管仲)으로 불리며, 제환공 春秋五霸 의 첫番째 敗者로 만드는데 큰 役割을 했다. 그의 思想은 漢書 藝文志에서는 道가 로, 水西 警笛地에서는 法家 로 分類되나, 이는 直下夏播에 依해 編輯된 冠者를 後代의 觀點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觀衆의 思想이 後代의 諸子百家 에 影響을 준 것만은 確實하다. 그의 著書로는 《 管子 》가 있으나, 後學에 依해 加筆된 것으로 보인다.

生涯 [ 編輯 ]

靑年期 [ 編輯 ]

觀衆은 紀元前 725年 제나라 映像(現在 安徽省 福量視 映像縣 )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映像은 領袖 近處에 位置한 商業의 中心地로, 水運을 통해 交流하기 쉬운 곳이다. 經濟를 重要視 했던 觀衆의 思想은 自身의 出生地로부터 影響을 받았을 것이다.

젊은 時節 포숙 과 함께 지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管鮑之交”의 記錄 外에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出身地인 映像의 特性과 管鮑之交의 內容 中 商業과 關聯된 內容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商業에 從事한 것으로 보인다. 觀衆과 포숙은 各各 齊나라의 孔子仁 규와 소백을 모셨다. 第 陽孔 이 管至寶와 年稱에게 시해당하고 齊나라의 君主 자리가 空席이 되자, 觀衆과 포숙은 各其 규와 소백을 모시고 齊나라를 向했다.중간에 觀衆이 소백을 죽이기 위해 배에 화살을 쏘자 , 소백이 쓰러졌다.하지만 소백은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 멀쩡했다. 소백이 먼저 齊나라 에 들어와 高慧 와 國氏의 도움으로 諸侯에 오르니 그가 바로 第 桓公 이다. 觀衆이 모시던 규가 죽고, 魯나라로 亡命했던 自身 亦是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의 薦擧로 그는 하루아침에 齊나라의 宰相에 오르게 된다. 그는 桓公을 도와 齊나라의 國力을 키웠다.

官僚時節 [ 編輯 ]

觀衆이 第 桓公에게 重用되어 宰相이 되었을 때는 紀元前 686年.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株 王室의 統制力을 갈수록 弱해지고 제(齊), 初(楚), 陳(晉), 陳(秦), 年(燕), 노(魯) 等을 비롯한 諸侯國(諸侯國)들이 차츰 中央의 統制에서 벗어나 自國의 實利를 取하며 군웅할거하던 時節이다.

觀衆이 宰相이 된 後 紀元前 681年 魯나라와의 戰爭에서 이겨 和議를 하던 過程에서 魯나라의 將帥 조말이 短刀로 제환공을 威脅하는 事件이 벌어진다. 兆말은 齊나라에서 가져갈 魯나라 領土를 돌려달라고 했고, 威脅에 못이긴 제환공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領土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다. 觀衆은 第 桓公을 말리며 君主가 한番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諸侯도 以後에 제나라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神의”에 對해 說明했다. 結局 魯나라의 領土는 다시 돌려줬지만, 이 事件으로 인해 제환공의 名聲은 中原에 퍼졌다.

제환공 在位 7年(紀元前 679年)에 位(衛)의 犬(甄)에서 會盟을 열고 敗者의 地位에 오른다.

死亡 [ 編輯 ]

제환공 在位 41年 ( 紀元前 645年 )에 觀衆이 病이 나자 桓公이 물었다.

  • "뭇 臣下들 가운데 宰相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 觀衆이 말했다."임금보다 더 臣下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 桓公이 물었다. "逆兒(易牙)는 어떤가?" "제 子息을 죽여 賃金에 迎合했으니 人情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 桓公이 다시 물었다. "開放(開方)은 어떤가?" "父母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迎合했으니 人情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桓公이 다시 물었다. "首都(?刀)는 어떤가?" "제 生殖器를 갈라 임금에게 迎合했으니 人情에 어긋납니다. 親愛하기 어렵습니다." 觀衆이 죽고 나자 桓公은 觀衆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重用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政權을 專橫하게 되었다. [1]

觀衆이 죽자 제환공은 예전의 明晳한 君主가 아니었다. 제환공은 觀衆의 遺言을 따르지 않아 事後 5名의 孔子가 君主 繼承權을 놓고 싸웠으며, 이 때문에 제환공의 屍體는 67日間이나 放置되었고, 구더기가 右窟거려 門밖으로 팽개쳐지는 身世가 되었다.

觀衆의 도움으로 제환공 在位 43年間 ( 紀元前 685年 ~ 紀元前 642年 ) 齊나라는 北쪽으로 河北省 北部, 西로는 太行山脈, 남은 河南省 中央部 近處까지 影響力을 行使했다.

哲學 [ 編輯 ]

觀衆의 思想은 詐欺 (史記) 官案列傳과 그의 著書로 알려진 管子 를 통해 알 수 있다. 觀衆이 直接 作成한 部分과 後學들이 그가 했던 말을 集大成한 冊으로, 儼然히 말하자면 穩全히 그가 作成한 冊이라고는 볼 수 없다.

唯物論的 思想 [ 編輯 ]

觀衆의 思想은 기초적인 唯物論的 槪念을 갖고있다. 管子 (牧民篇)을 보면 다음과 같은 句節이 나온다. "나날의 生活이 즐거워지면 自然히 禮儀를 分別한다. 生活에 餘裕가 생기기만 하면 道德意識은 저절로 높아진다." 또 (漆法便)에서 "物質이 豐富하기가 天下에서 第一이 아니면 精神的으로 天下를 이끌 수 없다."라는 句節이 있다. [2] 이는 物質的 基礎가 뒷받침이 되어야 사람의 精神,意識 또한 存在할 수 있다는 意味이다.

牧民(牧民) [ 編輯 ]

觀衆은 唯物論的 槪念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政治體制를 構築한다. 이른바 牧民이다. 百姓을 기른다는 槪念을 처음 導入한 人物이 바로 觀衆이다. 정약용 牧民心書 에서의 牧民道 觀衆의 思想에서 由來한 것이다.

牧民의 主要內容은 "私有(四維)"로 說明할 수 있다. 事由 는 예(禮),의(義),염(廉),치(恥)로 各各 禮節, 의로움, 곧음, 羞恥心을 意味한다. 觀衆은 事由가 物質的으로 豐足해졌을 때 지켜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經濟的/物質的만으로 百姓을 다스리려 하면, 豫期치 못한 狀況(凶年,戰爭 等)이 發生하였을 때 그들을 制御할 수 있는 名分이 사라진다. 그래서 觀衆은 牧民의 安全裝置로써 "祭祀"를 勸奬했다.

古代의 事後世上은 現在와는 다르게 現實世界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살아서 農民階層이었다면 죽어서도 農民階層이고, 살아서 貴族階層이었다면 죽어서도 貴族階層人 것이다. 觀衆은 이러한 "祭祀","祖上神"의 槪念을 活用하여, 萬若 後孫들이 自身의 身分/職業을 지키지 않는다면 祖上神들은 死後世界에서 苦生을 하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後孫들에게 火로 돌아오게 된다는 認識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現在의 視角에서는 閉鎖的이고 一面 殘忍한 思想이지만, 當時 貴族階層을 除外한 百姓의 大宇는 매우 낮았던 時節이다. 오히려 觀衆의 牧民으로 인해 비록 그것이 政治體制의 安定化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百姓의 힘을 認定하고 그들의 處遇를 改善하려 했다는 點을 높이사야 할 것이다.

自發的 服從의 論理 [ 編輯 ]

  • "주는 것이 取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政治의 보배다." [3]

제환공은 諸侯들을 支配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觀衆은 오히려 주라고 말했다. 齊나라는 이미 觀衆의 政策으로 强國의 班列에 올랐다. 하지만 個個의 國家들과의 競爭에서는 優位에 있었지만, 모든 諸侯國을 아우를만큼의 國力은 없었다. 아직 戰國時代 以前이고 아무리 强國이라 한들, 國力의 差異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觀衆은 諸侯國을 武力으로 制壓하려다 보면 다른 諸侯國들의 反撥을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觀衆은 "주라고" 했다. 빼앗은 땅을 諸侯國에게 돌려주고, 禮物을 보내게 했다. 이는 제환공의 名聲을 높이고 다른 나라들에게 齊나라에 對한 信賴를 주었다. 또한 天子를 받든다는 尊王攘夷 를 바탕으로 한 " (禮)"를 내세워 名分을 確保하였다. 이를 通해 齊나라가 主導하는 秩序에 對한 다른 나라들의 協力을 이끌어 내게 된다.

影響 [ 編輯 ]

  • 死後에도 그의 政治哲學은 繼續 齊나라의 統治理念으로 活用되었고, 이는 齊나라가 戰國時代까지 傳統的인 强國의 位置에 있을 수 있게 한 原動力이었다.
  • 後날 登場하는 道家는 勿論 諸子百家에 影響을 주었다.
  • 論語 헌門便에서 孔子 는 觀衆의 사람됨이 人(仁)하지 못하다 評價했다. 그러나 同時에 觀衆이 아니었다면, 오랑캐로부터 周나라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觀衆의 尊王攘夷의 過程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그러한 過程을 통해 華夏族의 文明圈을 鞏固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意味한다. 孔子는 觀衆에 對해 相當히 客觀的인 視角의 評을 내렸다 볼 수 있다.

일화 [ 編輯 ]

내가 예전에 困窮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利益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代身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失敗해 그를) 더욱 困窮하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時運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番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番 모두 君主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番 싸움에 나가 세 番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怯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老母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孔子 규가 (王位를 놓고 다투다가) 敗하자, 疏忽(召忽)은 죽고 나는 붙잡혀 屈辱을 當했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者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些少한 일에는 羞恥를 느끼지 않으나 天下에 共鳴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父母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 [4]

이것이 故事成語 “管鮑之交”의 由來이다.

著書 [ 編輯 ]

家計 [ 編輯 ]

關聯 人物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觀衆과 孔子 敗者의 登場과 哲學者의 登場>/ 강신주. 2011. 京畿: 四季節 出版社
  • <신역 管子>/ 李相玉. 1985. 서울 : 명문당
  • <最高의 國家建設을 위한 現實注意 管子>/ 신창호. 2013. 서울 : 살림
  • 두산百科
  • 네이버知識百科事典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事典 詐欺 제태攻勢가 卷32
  2. <신역 管子>/ 李相玉. 1985. 서울 : 명문당
  3. 詐欺 官案列傳
  4. 네이버 知識百科事典 詐欺 列傳 卷62 官案列傳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