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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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시게루
小林 繁

Shigeru Kobayashi
基本 情報
國籍 日本
生年月日 1952年 11月 14日 ( 1952-11-14 )
出身地 돗토리縣 度하쿠群 亞카사키情
(現: 高土偶라情 )
死亡日 2010年 1月 17日 ( 2010-01-17 ) (57歲)
신장 178cm
體重 68kg
選手 情報
投球·打席 우투右打
守備 位置 投手
프로 入團 鳶島 1971年
드래프트 順位 6順位
첫 出張 1973年 9月 26日
마지막 競技 1983年 10月 22日
經歷

選手 經歷

코치 經歷


고바야시 시게루
日本語式 漢字 表記 小林 繁
가나 表記 こばやし しげる
國立國語院 標準 表記 고바야시 시게루
通用 表記 코바야시 시게루
로마字 Shigeru Kobayashi

고바야시 시게루 ( 日本語 : 小林 繁 , 1952年 11月 14日 ~ 2010年 1月 17日 )는 日本 의 前 프로 野球 選手이자 野球 指導者, 野球 解說家·評論家이다. 돗토리縣 度하쿠群 亞카사키情 (現: 高土偶라情 ) 出身 [7] 이며 現役 時節 포지션은 投手 였다.

社會人 野球팀 젠다이마루 를 거쳐 1971年 프로 野球 드래프트 6順位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에 入團했고 1978年 11月 日本 프로 野球界 最大의 이슈로 알려진 에가와 事件 에 휘말리면서 에가와 스구루 와의 맞트레이드로 韓信 타이거스 에 移籍, 1983年에 現役에서 隱退할 때까지 ‘悲劇의 英雄’( 悲劇のヒ?ロ? )이라는 別名이 불릴 程度로 人氣를 얻었다.

選手 生活 11年 동안 通算 139勝 95敗 17세이브, 平均 自責點 3.18의 成跡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最高의 投手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上 을 두 次例나 받았으며 隱退 後에는 TBS 아사히 放送 等의 野球 解說者를 거쳐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 SK 와이번스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에서 投手 코치를 歷任하는 等 指導者 生活을 했다.

人物 [ 編輯 ]

어린 時節 [ 編輯 ]

8살 때 아버지로부터 野球用 글러브 를 건네받아 캐치볼을 日課로 삼게 됐다. [8] 初等學校 時節에 소프트볼 選手로 活躍했고, [9] 中學校 時節에는 野球部에 所屬됐다. [10] 當時에는 僞裝 이 좋지 않은 적도 있어서 腎臟 170cm에 비해 體重이 50kg 程度 밖에 나가지 않았다. [11]

高等學校 時節 [ 編輯 ]

中學校 卒業 後인 1968年, 유라이쿠에이 高等學校(現: 돗토리 현립 돗토리秋오이쿠에이 高等學校)에 入學하여 野球部에 入團했다. 當時 監督을 맡았던 마키노 노리後尾는 當時의 고바야시에 對해서 “딱히 공이 빨랐던 것은 아니다. 컨트롤은 나쁘지 않았지만 뛰어나게 좋다고 할 程度도 아니었다”, “던지는 共 自體가 대단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願한다’라고 생각할 만한 投手는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한便 “印象的이었던 것은 마운드에서의 고바야시는 恒常 冷靜했다”, “세로로 쪼개지는 커브 [週 1] 를 섞어 相對 他者의 타이밍을 잘 빼앗는다. 投球 技術은 中學生 水準이 아니었다”라고 評價했다. [13] 身體的인 面에서는 남다른 彈力性이 印象깊었다고 한다. [13] 2學年인 1969年까지는 1年 先輩였던 다케나카 아키라 가 에이스 投手 를 맡아 고바야시는 投手로서의 練習을 繼續하면서 外野手 로서 競技에 出戰했다. 監督은 3窶籔로 起用하겠다는 立場을 傳達했지만 고바야시는 이를 拒絶했다. [14] 自身보다 舊威力과 拘束이 있는 공을 던지는 다케나카에게 對抗하기 위해서 2學年 때 오버핸드 에서 사이드암 으로의 轉向을 試圖했다. 사이드암으로 轉向한 以後 舊威力과 拘束 모두 좋아지면서 이番에는 슈土 를 習得했지만 [15] 사이드암으로 轉向한 背景에는 ‘오른쪽 어깨 痛症을 避하기 위해서’라는 理由도 있다. [16]

3學年이던 1970年에는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었지만 같은 해 5月 2日子 ‘ 니혼카이 新聞 ’은 유라이쿠에이 高等學校를 “고바야시 投手의 원맨의 느낌이 剛하다”라고 評價했다. [17] 같은 해에 열린 春季 주고쿠 大會 돗토리縣 豫選 決勝에 올랐지만 요나高히가시 高等學校에게 敗했다. 그해 下溪 고시엔 大會 돗토리縣 豫選에는 準決勝戰에서 요나고 高等學校에게 敗했고 히가시주고쿠 大會에는 오르지 못했다. [18]

젠다이마루 時節 [ 編輯 ]

팀은 下溪 돗토리縣 大會에서 敗하여 고바야시의 進路가 定해지지 않는 가운데 간사이 大學 野球部 主張이었던 기지마 잇코의 勸誘로 野球部의 選擇을 받았다. 고바야시는 高校 時節 活躍相에 對해 높은 評價를 받아 스포츠 推薦에 依한 入學이 確實視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간사이 大學이 스포츠 推薦 範圍를 突然 廢止하면서 入學은 霧散됐다. 推薦 範圍의 廢止는 當時 大學 紛爭의 影響이었다고 하지만 고바야시는 간사이 大學의 練習에도 參加하고 있었다. [19] 마찬가지로 練習에 參加하면서도 推薦 範圍 廢止로 進學하지 않았던 選手에는 다오 야스시 가 있다( 도시샤 大學 에 進學). [19] 當時 간사이 大學에 在學 中이던 야마구치 다카시 와는 後날까지 親分이 있었다. [20] 推薦 範圍가 廢止된 後에는 大學 卒業 後 다이마루 의 入社가 決定된 기지마로부터 다시 勸誘를 받아 1971年에 다이마루에 入社했다. 고베 點에 勤務 [21] 하면서 當初엔 布木 賣場에 配屬돼 當時 女性 顧客과 店員들 사이에서 잘생긴 外貌로 話題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22] 그러면서도 같은 會社의 社會人 野球팀 ‘젠다이마루’에서 活躍하게 됐다. 고바야시는 처음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게 됐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實際 고바야시의 能力은 높게 評價되고 있다. 所屬處仁 고베點에서는 練習 後에 業務가 免除됐다는 것이 그 證據라고 할 수 있지만 [23] 이 時期에 고바야시는 舊種을 늘리기 위해서 팔의 位置를 내리고 언더핸드 에 가까운 投球 폼으로 던지게 됐다. 이것에 依해 커브 의 曲線도 예전보다 좋아졌다. [24] 目的을 깊게 만드는 投球 모션은 明白히 언더핸드 로 보여진다. 그러나 공을 놓을 때까지는 팔의 軌道 사이드암 이었지만 [25] 고바야시의 投球폼은 一般的으로 사이드암이라고 表現하고 있지만 고바야시의 聲帶模寫 를 흉내내고 있던 아카시야 山魔 가 ‘Mr. 언더스로’라는 타이틀 音盤을 낸 것처럼 一部에서는 언더스로라고 表現하고 있었다. [26]

入社 1年째인 1971年 5月,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트였던 이토 기쿠오는 닛폰 石油 와의 練習 競技에 登板한 고바야시를 注目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요미우리팬이었지만 [27] 體格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野球 選手가 되는 것이 無理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고바야시는 都市 對抗 野球 大會의 교토 豫選을 目標로 하는 練習 途中에 이토를 發見하면서 크게 놀란 듯한 反應을 보였고 [28] 팀은 교토 豫選에서 勝利한 적은 없었지만 大會 直後 긴테쓰 버펄로스 난카이 호크스 도 고바야시를 注目하게 됐다. [29] 하지만 고바야시로서는 如前히 胃腸이 좋지 않다는 問題를 안고 있어서 여름만 되면 컨디션이 나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體力面에서 프로 野球에서의 시즌을 통해 얼마나 活躍할 수 있을지에 對한 不安感을 갖고 있었다. [30] 또한 都市 對抗 野球 大會에서의 좋은 成跡을 거둬서 젠다이마루에 報答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 球團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立場을 밝혔다. [30] [31] 고바야시의 宣言으로 긴테쓰와 난카이는 그해 드래프트 會議에서 指名을 避했고 [32] 이것을 요미우리가 6順位로 指名했다. 고바야시는 事前의 宣言대로 入團을 抛棄했지만 요미우리側에서는 指名에 依해 1年間 協商權을 確保하여 都市 對抗 野球 大會가 終了된 後에 고바야시를 入團시키려는 目的이 있었다. [33]

이듬해 1972年 3月, 교토 社會인 春季 大會에서 이 大會에서의 歷代 두 番째인 노히트 노런 을 達成했다. 5月에는 교토市長배 爭奪 社會人 野球 大會에서도 準決勝戰과 決勝戰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等 6月에 열릴 豫定인 都市 對抗 野球 大會 교토 豫選에 臨했다. 팀은 3戰 全勝의 成跡을 記錄하면서 3年 만에 都市 對抗 野球 大會 出戰을 결정지었고 고바야시는 決勝 리그에서 昨年에 敗한 닛폰 新藥을 相對로 1失點을 好投해 完投 勝利를 거뒀다. [34] 7月에 열린 第43回 都市 對抗 野球 大會 1次戰에서 덴덴도호쿠 를 相對로 先發 登板해 5이닝 동안 1失點으로 막아냈지만 팀은 敗했다. 그 後 고바야시는 이토 기쿠오에게 요미우리에 入團하겠다는 意思를 傳했다. 그해 11月 17日 [週 2] 에 요미우리의 入團이 公式 發表됐다. 고바야시에게는 이미 1年 前 다이마루에서 活躍하여 다음 番의 드래프트 會議에서 보다 上位에서의 指名을 노리는 選擇事項度 있었지만 요미우리로부터 指名을 받게된다는 保障은 없었기 때문에 요미우리팬인 아버지에게 기뻐해드렸으면 한다라는 생각을 優先視했다. [35] 入團을 앞둔 고바야시는 當時의 制限 最高額囚人 1,000萬 엔의 契約金을 要求했고 900萬 엔의 契約金과 1年째에 1勝을 하면 100萬 엔을 더한다는 條件을 받았다. [36]

프로 野球 選手 時節 [ 編輯 ]

요미우리 자이언츠 時節 [ 編輯 ]

入團 前에는 프로 球團 練習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요미우리의 練習은 想像 以上으로 嚴格했고 筋肉痛을 참아내며 練習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春季 스프링 캠프 中 5日間은 1軍에서 보냈다. 처음 1군에서 練習했던 날 고바야시는 나가시마 시게오 吳 사다하루 等과 같은 主力 選手들의 雰圍氣에 압도당해서 “무슨 練習을 했는지 조차도 記憶이 안날 程度”라고 緊張하면서 “여기가 프로구나, 여기가 野球로 돈을 벌 수 있는 場所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37] 後에 韓信 타이거스 에서 팀 同僚가 되는 에모토 다케노리 는 고바야시의 身體를 “3個의 와이어를 1個 묶음으로 만들어서 더 나아가 그 와이어를 묶어서 만든 것 같은 筋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評價했지만 고바야시에 依하면 프로에 入團한 해에 練習으로 다져진 거라고 말했다. [38]

1年째인 1973年에는 2軍(이스턴 리그)에서 7勝 5敗 10세이브, 平均 自責點 2.43의 成跡을 記錄했고 [39] 고바야시는 시즌 終盤이던 9月 26日에 주니치 드래건스 前( 고라쿠엔 球場 )에서 1軍 첫 登板을 이뤘다. 팀이 지고 있는 狀況에서 救援 登板해 좋은 結果를 남겼다. [40] 10月 11日 韓信 타이거스 前(고라쿠엔 球場)에서 팀의 6番째 投手로 登板해 1이닝을 던져 無失點으로 막았다. 이 競技는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優勝을 左右하는 競技라고 불릴 程度로 닛폰 TV 系列에 放送 豫定 範圍를 넘어서 放送되는 等 野球 팬들의 注目을 끌어 고바야시의 存在가 알려지는 契機가 됐다. [41] 시즌 終了 後 고바야시는 恩師였던 마키노 노리後尾에게 “아마 프로에서 成功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42]

2年째인 1974年 1月, 고바야시는 다이마루에서 勤務할 當時의 예전 同僚였던 女性과 交際한 끝에 結婚했다 [42] (그 後에 離婚 [43] ). 고바야시는 入團과 同時에 結婚할 생각이었지만 가와카미 데쓰하루 監督으로부터 ‘結婚을 1年 늦추고 野球에만 專念하라’는 說得을 받아 結婚을 延期했다. [44] 그 해부터 등番號 40番을 19番으로 바꾸면서 1軍에 定着하게 됐다. [45]

1975年, 가와카미에 뒤를 이어 나가시마가 監督으로 就任한 요미우리는 球團 創團 以後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最下位 成跡(6位)을 記錄하여 시즌 終了 後 고바야시는 1군 投手 코치였던 스機試打 시게루 에 對해 露骨的인 不滿을 가지면서 隱退를 決心했고 한때 프로 골퍼 轉向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마가와 그라운드 에서 實施한 推計 練習에서 고바야시가 緊張을 풀기 위해 니우라 히사오 와 室內 演習場에서 서로 장난치던 中 스기시타가 “장난치지 마, 이 멍청한 子息아!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밖에서 뛰어!”라고 크게 호통쳤고, 빗속을 3時間에 걸쳐 러닝을 강요당했다. [46] ‘이젠 容恕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두 사람이 러닝을 마쳤을 때에는 練習은 이미 끝났고 고바야시·니우라를 除外한 選手들과 스기시타를 비롯한 코칭 스태프들도 그라운드에서 撤收했다. 이에 反撥한 고바야시는 2군 投手 코치 미야타 유키노리 에게 電話를 걸어 現役 隱退에 關한 立場을 傳한 뒤 골프채 를 購入하는 等 練習을 쉬면서 프로 골퍼 轉向을 爲한 準備를 進行했지만 [46] 팀 同僚 다카하시 요시마사 로부터 電話로 “자네 事情은 알겠다. 그만두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 그렇지만 넌 한 番이라도 죽을 듯한 氣勢로 野球에 臨해본 적이 있는가? 萬若 없다면 한 番이라도 좋으니 죽을 覺悟로 해봐라. 그만 두는 것은 그 뒤라도 늦지 않잖아?”라고 說得을 했다. 다카하시의 勸誘에 따라 스기시타에게 謝罪하고 練習에 다시 復歸했다. [47] [48]

1976年에는 하리모토 이사오 가토 하지메 等을 트레이드로 迎入하여 電力 補强을 斷行한 요미우리는 2年 만에 센트럴 리그 優勝을 制霸했고 고바야시는 그해 18勝과 平均 自責點 2.99의 成績으로 모두 리그 2位의 成跡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리그 優勝을 결정짓는 10月 16日 히로시마 도요 카프 前(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에서 救援 登板했다. [49] 한큐 브레이브스 와 맞붙은 日本 시리즈 에서는 全體 7競技 中 6競技에 登板하여 2勝 1敗 1세이브를 記錄했다. 1977年에는 팀이 2年 連續 리그 優勝을 達成하면서 고바야시는 昨年과 마찬가지로 18勝(平均 自責點 2.92)을 올렸다. 多勝王 最優秀 平均 自責點 타이틀을 차지할 수는 없었지만 最高의 投手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上 을 受賞했고 베스트 나인 에도 選定(投手 部門)됐다. [50] 같은 해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日本 시리즈 에서는 全體 5競技 中 4競技에 登板했는데 1次戰에서 日本 시리즈 첫 先發 登板을 이뤄 야마다 히사시 와 投手戰을 펼쳤지만 制球力 亂調로 失點을 連發하는 等 2이닝만에 早期 鋼板돼 敗戰 投手가 됐다.

에가와 事件에 依한 電擊 트레이드 [ 編輯 ]

1978年 11月 20日, 요미우리는 ‘入團 交涉 期間은 드래프트 會議 當日부터 다음 해의 드래프트 會議 前前날(이틀 前)까지로 한다’라는 野球 協約 의 盲點을 찌르는 方式으로 1977年度 드래프트 會議에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로부터 1順位 指名을 받은 에가와 스구루 와 드래프트 會議 前날인 그 날에 電擊으로 入團 契約을 맺었다( 에가와 事件 , 一名 ‘空白의 하루 事件’). [51] 하지만 에가와와 入團 契約을 맺은 요미우리에 對해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會長은 認定하지 않았고 이에 反撥한 요미우리는 드래프트 會議를 不參했다. 드래프트 會議 結果 韓信 타이거스 가 에가와의 協商權을 얻었지만 요미우리는 “全體 12個 球團이 參席하지 않은 드래프트 會議는 無效”라고 主張했다. 에가와의 地位保全을 要求하는 假處分 申請을 도쿄 地方裁判所 에 提訴를 하는 것과 同時에 日本 野球 器具 를 脫退해서 새로운 리그를 獨自的으로 設立하겠다고 밝혔다. [52]

12月 21日, 日本 野球 器具 가네코 都市 커미셔너 는 “드래프트 會議는 有效”하는 見解를 밝혔고, “韓信 타이거스가 에가와에 對한 協商權을 가진다”라는 仲裁를 내렸지만 다음날이 돼서야 “에가와에게 한 番은 韓信과 入團 契約을 주고받고, 그 後에 곧바로 요미우리에 트레이드시키는 方式의 解決을 願한다”라는 趣旨의 ‘强한 要求’를 表明했다. 一連의 經緯에 對해 世間에서는 거센 反撥과 批判이 쏟아짐과 同時에 에가와의 트레이드 相對가 어느 選手가 될지에 關心이 쏠렸다. [53] 트레이드 期限은 1月 31日로 設定돼 니우라 히사오, 다카다 시게루 , 亞瓦溝치 겐지 , 니시모토 다카시 等과 함께 고바야시의 이름도 올랐다. [54] 니우라는 “나를 代身했다. 韓信은 나를 要求한 것 같아보였지만 나가시마 監督이 拒絶해서 고바야시가 가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 같은 境遇 대단한 成跡은 아니었지만 韓信戰은 좋은 環境에서 잘 막아내는 印象이 있는 것 같아서 였을까. 그래도 그는 反骨 氣質이 剛한 사람이기 때문에 移籍 1年次에 요미우리戰에서 活躍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5] 參考로 當初에는 에가와 - 요미우리와의 사이에는 現金 트레이드로 이야기를 進行한다는 合意가 돼있었다. [56]

요미우리의 스프링 캠프는 2月 1日에 始作할 豫定이었다. 그 前날인 1月 31日 午前, 고바야시는 스프링 캠프知人 미야자키현 에 飛行機로 移動하기 위해 도쿄都 內의 호텔에서 하네다 空港 에 到着했고 팀 同僚와 함께 合流하려고 했지만 거기에 球團 事務所 서무부長과 球團 職員에 依해서 召喚돼 요미우리의 士氣가 새겨진 專用車에 그대로 搭乘, [57] 호텔 뉴오타니 로 불려갔다. [58] 專用車를 보았을 때 고바야시는 “어? 내가? 이게 現實인가?” [57] 라고 動搖해 “그런가? 正말로 트레이드가 있었구나. 어, 그런데 왜 何必이면 나야?”라고 알아챘다고 한다. [59] 그것까지 고바야시에게는 “설마 자이언츠가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하면 자이언츠도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60] 호텔 房안에서는 球團 社長 하세가와 지쓰오가 고바야시에게 “네가 承諾해 주지 않으면 자이언츠는 센트럴 리그를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57] , “어떻게든 事情을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61] 고바야시에 依하면 하세가와의 語調는 事務的이어서 決定 事項의 傳達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 [61] [62] 球團은 30日에 고바야시를 트레이드 對象者로 包含시켰고 고바야시의 自宅에 電話를 걸어 連絡을 試圖했지만 고바야시는 호텔에, 家族도 고베 로 移動하고 있었기 때문에 連絡이 닿지 않자 空港에서 고바야시가 到着할 때까지 기다렸다. [58]

고바야시는 몇 時間을 들여 생각한 끝에 結局 트레이드에 同意하였고 다음날인 2月 1日 새벽 0時에 도쿄도內에 位置한 球團 事務所에서 記者會見을 열었다. [63] 스포츠 記者인 곤도 다카오는 조금씩 韓信에 入團시키는 것을 警戒하고 있던 [64] 에가와가 午後 4時 20分에 韓信과의 入團 契約을 맺고 있는 것부터 이 時間帶에는 고바야시가 異跡에 同意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推測했다. [65] 記者會見에서 고바야시는 韓信의 異跡에 同意하는 內容의 趣旨를 밝히면서 毅然한 行動을 보였다.

犧牲됐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나 自身은 只今도 요미우리를 좋아합니다. 에가와와는 이야기가 잘됐으니까 이제부터가 苦生일거라 생각하지만 요미우리의 一員으로서 잘해줬으면 좋겠습니다. [66]

고바야시는 그러나 그것은 ‘冷靜하게 行動하고 있는 自身을 보여주려고 했던’것일 뿐 [67] 內心으로는 ‘이제 빨리 나를 풀어달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68]

트레이드에 따른 第3者의 行爲에 아래와 같은 內容의 ‘覺書’를 맺었다. [57]

  1. 功勞金 3,000萬 엔 [週 3] 支拂
  2. 隱退 時 닛폰 TV와 요미우리가 就職 周旋

覺書를 맺은 後 文書는 球團이 作成·保管하면서 고바야시는 한 番도 그 內容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57] 또한 實際로 履行된건 功勞金의 지不滿으로 나카하타 기요시 의 隱退 時에 닛폰 TV 解說者 赴任을 고바야시가 要望했을 境遇 쇼리키 盜壘 球團主는 “그 件은 이제 됐네”라고 말했고, 고바야시度 이를 承諾했다. [57] 이것에 對해 고바야시는 “나는 未來의 身分 保證을 가만히 돌려주는 人間이니까 돈에 흔들리는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57] 記者會見이 끝난 後 고바야시는 팀 同僚에게 人事를 하면서 짐을 꾸리기 위해 미야자키에 가려고 했지만 “네가 가면 騷動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選手들도 精神的 動搖를 招來할지도 모른다”라는 球團의 挽留로 結局 實行에 옮기지는 못했다. [69]

한便, 2月 8日에 열린 프로 野球 實行 委員會에서 요미우리의 當時 行動에 對해 他 球團들은 集中的으로 批判했고 昨年 12月 22日 가네코 커미셔너에 依한 ‘고바야시 - 에가와 트레이드’는 白紙化되면서 고바야시는 韓信에 트레이드 됐다. 에가와의 요미우리 異跡은 시즌 開幕日까지 認定하지 않았고 요미우리는 6月까지 에가와를 自肅시키기로 決定했다. 또, 이 事件에 對한 責任을 지고 가네코는 커미셔너職에서 辭任했다. [70] 이것으로 에가와 事件은 一段落됐다고 하는데 [71] 고바야시 안에서 끝난 것은 1987年, 에가와가 現役 隱退를 發表한 날에 쇼리키 盜壘 球團主로부터 電話를 받아 “에가와가 오늘 部로 그만뒀다. 너한테만 報告해 둔다”, “너한테는 苦生시키고 말았다”라는 謝過를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고바야시는 이 事實을 TV 프로그램에서 公開됐다. [57] [72]

위의 內容을 다시 整理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고바야시를 再次 韓信에 맞트레이드로 移籍시킨다.
  2. 에가와의 요미우리 異跡은 시즌 開幕日까지 認定하지 않는다.
  3. 요미우리는 6月까지 에가와를 自肅시키기로 決定.

韓信 타이거스 時節 [ 編輯 ]

1979年 2月 10日, 고바야시는 오사카市 內에서 記者會見을 열어 韓信 타이거스의 入團을 公式 發表했다. [73] 등番號는 고바야시의 强力한 要求에 依해 요미우리 時節과 똑같은 ‘19’番으로 定해졌다. [週 4] 記者會見을 마친 고바야시는 곧바로 韓信의 캠프知人 고치縣 아키視 로 向했고 [73] 고치縣의 라디오 放送局은 고바야시가 到着했다는 內容의 뉴스를 報道했고 [73] 이튿날 2月 11日에는 ‘悲劇의 英雄’을 보기 위해 當時 아키市의 人口 折半에 該當하는 1萬 2,000名의 사람들이 몰려와 스프링 캠프 周邊에 人山人海를 이뤘다. [75] 當時 韓信의 主力 選手였던 街케後 마사유키 에 依하면 스프링 캠프에서의 첫 미팅 때, 고바야시는 人事하면서 ‘요미우리에게는 傳統이 있지만 阪神에는 傳統이 없다’라고 發言했다고 한다. [76] 가케후는 이 發言에 對해 ‘분했다’, ‘大體 뭘 말하는거야’라는 印象을 가졌지만 後날엔 고바야시의 眞心은 ‘승리에 對한 執念의 差異를 指摘한 것은 아닐까’ 라고 밝혔다. [76]

고바야시는 요미우리에 對한 未練이 있으면서도 “요미우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면서 요미우리展에 맞춰 自身의 로테이션을 짜기 위해 돈 블레이저 監督에게도 말했다. 開幕 2競技째가 되는 4月 10日 한신 고시엔 球場 에서의 競技를 始作으로 요미우리戰에서의 8連勝을 裝飾해 ‘요미우리 에이스의 무서움’을 誇示했다. [77] 트레이드 앞두고 고바야시에겐 “自身은 요미우리의 必要한 投手다”라는 自負心이 있었지만 [78] 에가와와의 트레이드 相對가 됐을 때는 “고바야시를 내서라도 에가와를 잡고 싶다”, “고바야시보다 에가와 쪽이 電力이 된다”라고 球團側이 判斷한 것이라고 생각해 自尊心에 큰 傷處를 입었다. [79] 요미우리展에 登板했을 때의 고바야시는 平常時에 보인 쿨한 態度를 버리고 벤치 뒤에서 목소리를 내며 氣合을 불어넣는 等의 行動으로 鬪志를 露出했다. 또 요미우리展에 登板하는 날은 팽팽한 雰圍氣를 감돌게 해 新聞記者는 球場에 들어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고바야시가 그날 競技에 先發로 登板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80] 그 해에 고바야시는 22勝, 2.89의 平均 自責點을 記錄하는 成跡을 남겨 2年 만에 사와무라上(歷代 두 番째로 複數 球團에서의 사와무라上 達成)과 베스트 나인을 連거푸 受賞했다. [81] 街케後 마사유키는 고바야시가 利敵 첫 해에 이러한 成跡을 남겼던 것에 對해 ‘요미우리에 對한 이기려는 固執과 같은 것을 보였다’라고 말했고 ‘土박이’로 4番 打者인 自身에 對해 ‘이런 사람에게 질 수 없다’라는 重壓感을 느끼게 됐다고 吐露했다. [76] [週 5] 그러나 고바야시 自身은 後날 1979年 시즌에 對한 아래와 같은 否定的인 立場을 드러냈다.

그 때에 내가 한 行動은 野球 選手로서 稱讚받은 일이 없었다. 오로지 나 自身을 위해서 野球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事件이 있어서 트레이드로 阪神으로 가게 돼서 분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남겠다. 지지 않을 거다’라고 主張하고 싶었다. … 그것뿐인 野球, 그런 野球는 全혀 안되겠지. 팀보다는 내가 恒常 앞장서고 있었다. … 그런 것은 惡辣함만이 있는 野球이다. 그런데 팬도 言論에서도 내가 요미우리와 相對해서 이길 때마다 큰 騷動이 벌어졌다. 世上이 그런 式으로 움직이는 것이 正말 싫었다. ‘當身들은 바보인가’라고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나는 요미우리에게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必死的으로 던지고 있었다. 結局, 世上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 고바야시 시게루 [82]

移籍 2年째인 1980年 8月 16日, 고라쿠엔 球場 에서 열린 요미우리戰에서 처음으로 에가와와 投手戰을 펼쳤다. 3失點에서 完投한 에가와에 對해 고바야시는 5이닝 동안 4失點을 記錄하면서 降板됐고 競技는 요미우리가 勝利하여 에가와는 勝利 投手가 됐다. [83] 競技 終了 後 에가와가 興奮한 모습을 보인 [83] 것에 對해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것은 빨리 끝나는 便이 좋다고 생각했다. 大槪 두 사람의 投手가 서로 던졌던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카메라에 繼續 쫓겨서 쓸데없는 寫眞도 가득 찍혀서 마치 죄지은 사람 取扱을 當한 것 같은 氣分이 들었으니까…. … 그래도 나의 野球 人生에 있어서의 번거로운 것은 이것으로 끝났다. 그 親舊(에가와)가 이겨서 多幸일지도 모른다. 지고 있었더라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
? 고바야시 시게루 [84]

고바야시는 “昨年에 맞붙었는데 우리가 이겼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요미우리에 對한 意識이 나 自身 속에서 너무 바뀌어버렸다”라고 말했다. 곤도 다카오에 依하면 實際로 고바야시는 이때쯤부터 요미우리戰을 치르기 前에도 以前과 같이 緊張하는 雰圍氣를 풍기지 않게 됐다. [85] 곤도는 “고바야시가 마음속에서부터 불타올라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건 實際로 移籍 1年째인 79年 뿐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86] 1980年 以後에도 고바야시는 每年 두 자릿數의 勝數를 올렸지만 唯獨 요미우리와의 戰績에서 5勝 15敗라는 最惡의 成跡을 남겨 敗戰 數가 더 많아졌다. [85] 고바야시에 따르면 1980年 以後 요미우리에서 新人 選手가 頭角을 나타내며 ‘같은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다른 팀’李 돼버린 것도 애當初의 “넘치는 듯한 마음”李 옅어진 것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87]

1982年에 夫人과 離婚, 첫 番째 아내와는 에가와 事件이 일어나기 前날 밤에 크게 다투었고 싸움 속에서 關係 수복의 機會도 없는 채에서 만났다.

1982年 시즌 終了 後 고바야시는 “來年 시즌에 15勝을 올리지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라고 宣言했는데 [88] 이 發言은 다음 시즌으로 向하는 姿勢의 表現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고바야시는 正말로 隱退를 의식하고 있었다. 原因 中의 하나는 오른쪽 팔꿈치에 있었다. 고바야시의 오른쪽 팔꿈치는 1978年頃부터 제대로 뻗을 수가 없게되면서 1982年에는 안쪽으로 剛하게 굽힐 수가 없게 됐다. 게다가 1981年頃부터 下半身의 밟고 당김이 말을 듣지 않게돼 어깨의 힘에 依支하고 全力投球를 繼續하였지만 오른쪽 팔꿈치 狀態는 더 惡化됐다. [89] 또, 年俸이 오르지 않아서 요미우리 時節에 經驗한 ‘팀으로서 이기기 위한 野球’를 經驗할 수 없는 가운데 [週 6] 에가와 事件 以後 꼬리票처럼 붙어다녔던 ‘悲劇의 英雄’이라는 이미지에도 싫症이 나서 ‘좋아하는 野球를 하고 있다’라고 感覺을 느끼는 等 野球에 對한 情熱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91] 또한 이때쯤 되면 다부치 고이치 의 放出로 象徵되는 阪神 選手에 對한 冷靜한 取扱이나 昇給에 있어서도 消極的인 姿勢에 不快感을 드러내며 예전 팀 同僚에게 ‘요미우리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吐露했던 事實이 스포츠 닛폰 에 依해 報道됐다. [92] 1983年 7月에는 오사카 기타신치 에 飮食店을 開業하는 等 現役 隱退 後를 對備해서 事業에도 뛰어들었다. [93]

1983年 시즌 開幕 後 고바야시는 15勝을 記錄할 수 있을지가 不透明한 狀況 속에서 隱退를 決心하게 됐다. 6月 25日 주니치 드래건스 戰에서 그동안 ‘오리’로 삼았던 오시마 야스노리 에게 ‘自信 있게 던지는’ 안쪽의 슈土 를 攻掠했지만 홈런을 얻어맞았다. 이때 고바야시는 프로 野球 選手가 된 뒤 처음으로 ‘무릎이 쑥 빠지는 듯한 虛脫感’에 시달렸다고 한다. 直後인 7月 初 고바야시는 當時 닛칸 스포츠 記者였던 이사카 요시유키에게 “나, 그만둘게”라며 現役 隱退 意思를 밝혔다. [93] 그 後에도 고바야시는 오시마에게 當하는 等 結局 8月에 現役에서 隱退하기로 決心했다. 隱退할 當時의 心境에 對해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94]

어깨나 팔꿈치도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속이면서 하면 아마 다음 시즌에도 10勝은 可能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技巧派로 스타일을 바꾼다는 方法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自身이 마음 속에 그린 공을 던질 수 없게 됐는데 繼續 던지는 것에 매달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는.

이런 말을 해도 어쩔 수는 없지만 萬若 그 트레이드 없이 요미우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좀더 길게 現役 生活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미우리에 있으면 35歲 程度까지, 아니 던질 수 있는 동안에는 유니폼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까. 結局 그 트레이드로 인해서 個人의 評價에 左之右之되는 나의 人生이 始作됐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했었다. 周邊의 評價에만 神經쓰면서 그런 나 自身이 싫었고, 지치고, 이제 野球에서 멀어지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隱退를 決心했을 때 나의 野球 人生을 되돌아 볼려고도 하지는 않았고 感傷에 잠길 것도 없었다.
? 고바야시 시게루 [95]

하지만 고바야시는 現役 隱退를 擇한 眞짜 理由는 오른손에 血行 障礙가 있었다는 것을 팀 同僚였던 街와토 高調 에게만 털어놓았었다. [96] 10月 29日에 現役 隱退를 表明했다.

그 後 [ 編輯 ]

現役에서 隱退 後에는 TBS [週 7] 野球 解說家(1984年 ~ 1991年)를 맡아 [週 8] 《JNN 스포츠 데스크》, 《JNN 스포츠 채널》, 《 지쿠시 데쓰야 NEWS23 》의 招待 스포츠 캐스터로 拔擢됐다. 고바야시의 말에 따르면, 野球 解說로 使用되는 ‘보이는 공’( 見せ球 ), ‘꽂히고 있다’( 差し?まれる )라는 表現은 自身이 直接 考案한 것이라고 말한다. [99] [週 9] 그 外에도 탤런트로 活動하는 等 藝能界에서 活動 領域을 넓혀 프로 野球 選手 時節을 웃도는 輸入을 손에 넣게 됐다. [101] 1985年에 韓信이 創團 以後 처음으로 日本 시리즈 頂上에 오를 當時에 祝勝會를 取材하던 途中 現役 時節 팀 同僚이자 라커룸 近處에 있던 街와토로부터 “너는 타이거스의 一員이다”라고 말하면서 고바야시의 몸에다가 麥酒를 끼얹었다. [102]

1992年에는 料理 硏究家인 고바야시 구미코와 再婚 [週 10] 했지만 구미코는 이듬해 1993年부터 2年 間 프랑스 에서 料理 授業을 하는 等 別居 生活이 繼續됐다.

1995年부터 1996年까지는 아사히 放送 TV · 라디오 [週 11] , 선 TV 에서 野球 解說者를 맡았다. [週 12] 그 사이 1995年 7月에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로부터 사와야카 新黨 의 候補者로서 第17回 參議院 選擧 에 候補로 出馬해달라는 勸誘를 받아 夫人으로부터 資金的인 支援을 얻어 사와야카 新黨의 代表로서 比例區 1位로 立候補했지만 落選했다. 黨의 得票率은 1%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供託金이 沒收된 것을 비롯해 選擧 費用도 保全받지 못하고 廣告 費用은 自己 負擔이 됐다. 立候補를 위해 TV,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廣告 等에서 모두 下車했기 때문에 고바야시는 엄청난 經濟的 打擊을 입었다. [105] 그리고 거품 景氣 崩壞에 依해 現役 時節부터 經營하고 있던 料食業이나 不動産 事業 等 經營 狀況이 惡化되면서 빚을 떠안게 됐다. [106]

1997年, 긴테쓰 버펄로스 의 1군 投手 코치로 拔擢돼 14年 만에 유니폼을 着用하게 됐다. [107] 1997年 시즌에는 3位를 記錄하면서 팀의 A클래스(1位~3位, 上位圈을 指稱하는 日本 言論의 表現) 進入에 寄與했지만 이듬해 1998年에는 5位에 떨어지는 等 性的 不振에 對한 責任을 물어 1999年에 2軍 배터리 綜合 코치로 補職이 移動됐다.

2000年에 나시다 마사타카 [週 13] 가 監督으로 就任한 以後에는 1군 投手 코치로 復歸하여 1군 打擊 코치가 된 마유미 아키노部 와 함께 ‘오토코碼에 3人坊’( 男前3人衆 )으로 人氣을 얻어 긴테쓰 百貨店 의 포스터에도 실렸다. [109] 2001年에는 弱體 投手陣의 고단한 生活 끝에 팀이 퍼시픽 리그 頂上에 올랐지만 ‘팀 平均 自責點 4.98은 投手 코치의 責任’이라는 批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비롯해 [107] 시즌 中에 債權者들이 球團 事務所와 球場에까지 들이닥치는 等 [109] 위에서 말한 金錢的인 問題도 있어서 [110] 優勝 팀을 이끈 코치임에도 不拘하고 그 해를 끝으로 退團 [107] 했다. 긴테쓰 코치로 있을 當時에는 이와쿠마 히사시 에게 技術的 指導뿐만 아니라 精神面에서의 重要性을 重要性을 일깨워주고, 結果가 좋지 않았을 때는 ‘마음으로 던져라’ [111] , 첫 先發 登板하여 3回에 5點이나 내주고 降板됐을 때는 ‘避하지 말고 좀 더 氣魄이 담긴 공을 던져달라’고 助言했다. [112]

긴테쓰에서 退團한 以後에는 가와討議 紹介로 후쿠이縣 亞瓦刺視 에 있는 골프場 支配人을 맡았고 [113] 그 사이에는 J SKY SPORTS 의 野球 解說者로 活動했다. [週 14]

가와討議 後援者가 經營하는 골프場에서 잔디 管理, 골프백을 내려주거나 運搬, 淸掃, 프런트 業務 等을 맡아 [109] 熱心히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그러한 努力을 인정받아 半年 後에는 支配人을 맡게 됐다. [115] 딸만큼이나 나이差가 나는 세 番째 結婚 相對와도 만났지만 [115] 2003年 9月에는 도쿄 地方裁判所 에 個人 破産申請을 하면서 골프場 支配人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고바야시는 當時의 負債額數에 對해 “1代에 몇 億 엔 達하는 外製車 2臺分”이라고 말했다. [116]

以後에는 후쿠이視 의 中心部에서 相當히 떨어진 곳에 位置한 매우 素朴한 規模의 아파트에 살면서 自動車는 使用하지 않고 自轉車를 타고 郊外의 大型 小賣店에서 쇼핑을 했다. [115] 體育 年金과 가끔 수고費가 發生하는 講演, 스포츠 新聞에 寄稿하는 等으로 生計를 維持하는 일은 繼續하고 있었지만 세 番째 아내와 후쿠이에서 살고 있다는 事實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마을에서 만나도 아무도 人事를 건네지 않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15] 2006年에는 도쿄 스포츠 專屬 評論家 [週 15] 를 맡아 野球面에 ‘ 고바야시 시게루의 歲완 파란 半生氣 ’( 小林繁の細腕波?半生記 )를 連載했다. [100]

이때부터 V9 時節 팀 同僚의 紹介로 少年野球팀 ‘올스타 후쿠이’의 指導를 맡게 되면서 周邊의 도움을 얻게 됐다. [117] 本人은 指導를 하지만 謝禮金 같은 것은 一切 받지 않았으며, 팀 代表가 얼마나 未安해하는지를 생각해 10萬 엔의 巨金이 들어간 封套를 건넨 적이 있었지만 정작 고바야시는 ‘받으면 繼續 가르쳐야 하니까’라는 理由로 웃으며 받지 않았다. [117] 週 5日 練習에 每日 參席하고 집에서 떨어진 演習場까지 걸어가서 스스로 노크 배트를 잡고 投手보다 野獸 地圖에 熱中했다. [117] 指導 뿐만 아니라 競技에도 同行하여 팀 버스에 함께 타고 往復 8時間의 遠征에 나간 적도 있었다. [117] 資金이 圓滑하지 않은 便이라 遠征을 가면 묵는 것은 一種의 ‘少年의 집’ 같은 施設 [117] 이었고 三層 寢臺 에서 熟眠을 取하거나 넓은 房에서 混宿하는 水準의 잠을 請하는 境遇도 있었다. [118] 고바야시는 팀 選手들을 반드시 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고 禮義 에 까다로우면서도 技術 地圖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118] ‘안녕, 고맙다라고 말을 하지 않는 아이는 내 집에 오지 마’라는 그의 말이 입버릇처럼 해댔다. [118] 熱情的인 指導는 어김없이 파고들며 팀의 水準은 올라갔고 縣內의 강호교로 進學하는 學生들도 늘어났다. [118]

2007年에는 KBO 리그 SK 와이번스 2군 投手 인스트럭터로 拔擢 [119] [週 16] [週 17] 하여 아시아 시리즈 大韓民國 代表팀의 土臺가 된 强力한 投手陣을 構築했다. [121] 2008年에도 SK 臨時 投手 코치를 맡아 도쿄 스포츠에서 企劃한 ‘ 고바야시 시게루의 캠프 點檢 ’( 小林繁のキャンプ点? )을 連載했다. [100] 같은 해에는 예전부터 特別 코치로서 指導하고 있던 少年 野球팀 ‘올스타 후쿠이’의 總監督으로 赴任했다. [122] [123]

2009年에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군 投手 코치로 拔擢됐다. [97] 가마伽倻 의 球團 宿所에 머무르며 自身의 野球論을 連日 미팅에서 젊은 投手들에게 傳達해 選手들은 고바야시의 發言들을 自筆로 노트에 作成하면서 이를 消化해 나갔다. 그中 한 名이었던 요시카와 미쓰오 는 ‘포인트를 다잡다’라는 助言을 힌트로 作用하여 다르빗슈 有 가 메이저 리그로 移籍한 2012年에 에이스로서 시즌 14勝을 거두어 優勝에 寄與했다. [124] 그 外에 에지리 신타로 , 이토카즈 게이사쿠 오버핸드 에서 사이드암 으로 轉向시켰다. [125] 닛폰햄 2군 投手 코치로 在職하고 있는 渦中에도 올스타 후쿠이가 어떻게 運營되고 있는지를 細心하게 神經을 썼는데 올스타戰 休息期에는 후쿠이에 와서 練習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以前과 마찬가지로 指導에만 熱中했다. [118] 使用이 끝난 딱딱한 功을 닛폰햄으로부터 받아 팀에 여러 次例나 보낸 적도 있었다. [118]

거의 흠잡을 데 없는 指導者였지만 球團 代表를 비롯한 關係者, 그리고 監督과 술을 마실 때는 大體로 새벽까지 이어졌고, 마셔도 다음날 訓鍊에는 나오기 때문에 球團 代表나 監督과 함께 지내는 것은 매우 힘들 때도 있다. [118] 또한 女性들만이 있는 가게에 可及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가게도 싫어했는데 素朴한 雰圍氣의 술집에서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極히 低廉한 價格의 燒酒를 마셨다. [126] 追憶談을 나눌 때는 거의 모두 요미우리 時節의 일이었다. [126]

2009年 시즌 終了 後 고바야시는 다시 후쿠이에 돌아오면서 올스타 후쿠이의 指導에만 專念했고 제87회 選拔 高等學校 野球 大會에서 優勝한 쓰루가케히 高等學校의 히라누마 쇼他 와 야마모토 高다이 等을 育成했다. [127]

에가와와의 和解 [ 編輯 ]

고바야시는 1999年에 發行된 《校眞 자이언츠를 떠난다는 것》 中에서 에가와에 對해 “에가와 個人에 對한 怨恨은 아니다. 但, 다른 사람의 人生을 바꿔버린 것은 틀림없는 事實이다” [128] , “한 사람이 醉한 行動이 다른 누군가의 人生을 全혀 다른 方向으로 밀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怨恨이라기보다는 複雜하게 얽힌 앙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28] 라고 말한 後 다음과 같이 말했다.

結局 ‘價値觀이 다른 人間이다’라고 생각합니다. 自身이 이렇게 하고 싶다는 所望이 있을 때 그것은 自身의 손으로 잡는 것이지 무언가를 발板으로 하고 누군가를 희생시켜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 本質的인 내 思考方式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에가와) 全혀 異質的인 人間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때의 호된 批判으로 인해 그도 苦痛을 맛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죠.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들은 것이 아니라 自身이 積極的으로 選擇한 것이지요. 그래서 本人은 그런 覺悟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구요. 그래서 非難을 받았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의 立場에서는 그것은 달게 甘受해야만 한다는 覺悟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것은 알고 있었겠죠.
? 고바야시 시게루 [129]

2007年 가을, 하쿠호도 記者쿠라 廣告 를 통해 에가와, 高뱌야시 두 사람이 日本株를 마시며 對談을 나눈 일이 있었다. 當初 고바야시는 “이제 와서 廣告에 나올 생각은 없다”, “내가 한다고 해도 에가와는 어떨까? 아마 拒絶할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으나 에가와는 “고바야시가 좋다면 하고 싶다”라고 出演하겠다는 意向을 밝혀 이를 承諾했다. [130] 廣告의 主題는 ‘두 사람의 和解’였다. [131]

事前에 協議 없이 그대로 對談 錄畫를 進行했다. 고바야시와 에가와는 그때까지 거의 直接 對話를 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에가와는 ‘謝罪’를 主題로 綠化에 臨했고 “正말 오랫동안 面目이 없었습니다”라고 乾杯하기 前에 謝罪했다. 거기에 對해 고바야시는 “謝過할 것 없어!”라고 對答했고, “마음 苦生이 많았네. 나도 많이 힘들었어. 둘 다 苦生했고 힘들었다”라며 에가와에게 말했다. 또한 고바야시는 本篇에서 술盞을 기울이며 “(이番 廣告 出演으로)한숨 돌리는 時間을 갖게 됐다. 남은 人生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고바야시는 對談 後 에가와에 對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時節에는 自身이 힘든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 에가와度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괴로운 人生을 보내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結末을 붙여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힘든 것에 結末을 붙이지 않으면 나도 結末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에가와랑 함께 이야기하면서 또 한 가지 알았던 적이 있다. 그것은 저 親舊에게도 趣味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趣味가 없는 것처럼 事故가 무섭기 때문이라고 해도 週末엔 家族과 함께 드라이브하러 데려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野球가 全部였다. 家族을 위해 犧牲해서까지 우리들은 野球를 하고 있었다. 저 親舊도 精神없이 野球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구나라고 實感했다.
? 고바야시 시게루 [132]

갑작스런 死亡 [ 編輯 ]

2010年에는 닛폰햄의 1군 投手 코치로 昇格돼 [週 18] 前날 밤에도 自身의 房에서 이番 시즌부터 入團하는 새로운 外國人 投手의 DVD 映像을 보고 스프링 캠프에 對備하는 等 [133] 새 시즌을 向해 準備를 進行하고 있었지만 스프링 캠프를 2週日 앞둔 1月 17日, 후쿠이市의 記者쿠라 CM 개런티를 契約金으로 購入한 맨션 [126] 에서 “등이 아프다”고 痛症을 呼訴해 후쿠이 현립 病院에 緊急 移送됐다. 病院으로 移送할 當時에는 心停止 狀態였고 病院에 到着하자마자 心肺蘇生에 들어갔지만 午前 11時頃 心筋 梗塞 에 依한 心不全으로 死亡했다(향년 57歲). [134] [135] 死亡 前날에는 닛폰햄 本社 主催로 열린 이벤트에 參席하면서 平常時와 변함없는 健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만큼 고바야시의 갑작스런 死亡으로 인해 野球界에서는 큰 衝擊을 받았다. 永訣式은 1月 20日에 擧行됐고 다음날인 20日 후쿠이市內에서 告別式이 열려 요미우리 時節의 팀 同僚였던 니우라 히사오 를 비롯한 球團 關係者와 고바야시의 親舊 等 約 500名이 參席했다. 喪主는 內緣 關係를 맺었던 女性(고바야시에게 있어서는 事實上 세 番째의 아내)李 맡았다. 法名은 ‘ 球愛院釋?繁 ( きゅうあいいんしゃくせいはん ) 큐右아이人샤쿠세離韓 [ * ] ’. [136]

3月 3日, 삿포로 돔 에서 열린 닛폰햄과 韓信의 競技는 ‘고바야시 시게루 追悼 京畿’로 열렸으며 [137] 같은 달 3月에는 돗토리縣 구라요시視 에 位置한 쇼핑몰 ‘퍼플 타운’에서 ‘고마워요 고바야시 시게루 投手’라는 이름의 醜挑戰이 열렸다. [週 19]

遺骨의 一部는 후쿠이縣 요시다君 에이헤이지情 에 있는 魂가쿠지 에 있으며 2016年 1月에는 7周忌에 맞춰 自身이 總監督을 맡았던 올스타 후쿠이에 依해서 魂가쿠지에 記念碑가 建立됐다. [139]

플레이 스타일 [ 編輯 ]

韓信에 移籍했을 무렵 日本 프로 野球界에서 스피드 건 이 導入됐지만 고바야시가 던지는 공의 速度는 最高 速度인 時速 130km大 後半이었다. [140] 고바야시는 自身에 對해 “野球 選手로서의 元來 가지고 있는 能力은 그렇게 높지 않다”라고 評價했다. 게다가 “몸이 좋은 投手는 80%의 힘을 낸 것만으로도 나보다 10km 以上이나 빠른 공을 던질 수가 있는데 나는 그 速度 밖에 낼 수 없지만 投球 하나하나를 恒常 120%의 힘을 내면서 던졌다”라고 말했다. [140]

고바야시의 投球폼은 吳 사다하루 의 외다리 打法을 參考에 構築된 것으로 ‘몸을 가라앉히듯이 하여 외다리 狀態에서 한番 깊게 모아두어 거기서부터 모으는 時間을 調節하여 相對 他者의 타이밍을 빼앗도록’ 던지는 것이었다. [141] 고바야시의 말에 依하면 “世界 第一의 打者인 사다하루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생각한 끝에 짜낸 폼이었기 때문에 사다하루는 “가장 던지기 쉬운 相對”였다고 말했다. [142] 요미우리 時節 고바야시는 韓信의 언더핸드 投手였던 우에다 지로 를 假定한 打擊 演習으로 投手 役割을 맡았는데 [143] 사다하루는 고바야시가 던지는 공에 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打擊 練習 後에 컨디션이 떨어지는 境遇도 있었다. [141] 韓信에 移籍한 後에도 고바야시는 사다하루와 宮合이 잘 맞았고 사다하루는 고바야시를 攻掠하기 위해 외다리 打法을 封印하고 두 다리로 打席에 선 적도 있었다. [144]

阪神 時節에 고바야시와 배터리를 構成했던 와카나 요시하루 는 고바야시에 對해 “ 牽制球 를 能熟하게 던질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스냅 스로(손목의 힘을 利用해서 던지는 것)가 서툴러 1982年 4月 3日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前에서는 打者 다카기 요시카즈 故意 死球 하려고 던진 공이 3壘 側으로 벗어나 暴投 가 되어 끝내기 敗北를 當했다. [145] ‘故意 死球 暴投에 依한 끝내기 敗北’는 1952年에 가네다 마사이치 가 記錄한 以後 두 番째 事例이며 [146] 開幕展에서는 勿論 史上 最初였다.

街케後 마사유키에 依하면, 危機 狀況에서도 마운드에 內野手가 모이는 것을 拒絶해 ‘그것이 나의 美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76]

詳細 情報 [ 編輯 ]

出身 學校 [ 編輯 ]

  • 돗토리 현립 유라이쿠에이 高等學校

選手 經歷 [ 編輯 ]

指導者·其他 經歷 [ 編輯 ]

指導者
解說者

受賞·타이틀 經歷 [ 編輯 ]

타이틀 [ 編輯 ]

受賞 [ 編輯 ]

個人 記錄 [ 編輯 ]

첫 記錄 [ 編輯 ]

  • 첫 登板 : 1973年 9月 26日, 臺 주니치 드래건스 24次戰( 고라쿠엔 球場 ), 7回初에 3番째 投手로서 救援 登板·마무리, 3이닝 無失點
  • 첫 脫三振 : 상동, 7回初에 에토 쇼조 로부터
  • 첫 勝利 : 1974年 4月 20日, 대 주니치 드래건스 1次戰(고라쿠엔 球場), 4回初에 2番째 投手로서 救援 登板·마무리, 6이닝 無失點
  • 첫 選拔·첫 完投 勝利·첫 完封 勝利 : 1974年 5月 26日, 臺 히로시마 도요 카프 9次戰( 히로시마 市民 球場 )
  • 첫 세이브 : 1974年 6月 2日, 臺 야쿠르트 스왈로스 9次戰(고라쿠엔 球場), 9回初에 2番째 投手로서 救援 登板·마무리, 1이닝 無失點

記錄 達成 經歷 [ 編輯 ]

  • 通算 1000投球 이닝 : 1979年 7月 3日, 臺 야쿠르트 스왈로스 13次戰( 한신 고시엔 球場 ), 9回初 2社에 達成
  • 通算 100勝 : 1981年 4月 28日, 臺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3次戰( 요코하마 스타디움 ), 10이닝 2失點 完投 勝利 ※歷代 79番째
  • 通算 1500投球 이닝 : 1981年 5月 29日, 臺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6次戰(요코하마 스타디움), 9回末 1社에 達成
  • 通算 1000脫三振 : 1981年 8月 4日, 臺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6次戰(요코하마 스타디움), 4回末에 野시키 가나메 로부터 ※歷代 62番째
  • 通算 2000投球 이닝 : 1983年 9月 4日, 臺 야쿠르트 스왈로스 20次戰( 삿포로시 마루야마 球場 ), 4回末 2社에 達成

기타 [ 編輯 ]

등番號 [ 編輯 ]

  • 40 (1973年)
  • 19 (1974年 ~ 1983年)
  • 70 (1997年 ~ 2001年)
  • 79 (2009年)

年度別 投手 成績 [ 編輯 ]














4






















4














W
H
I
P
1973年 요미우리 6 0 0 0 0 0 0 -- -- ---- 40 11.1 5 0 2 0 0 6 1 0 0 0 0.00 0.62
1974年 44 9 2 1 0 8 5 2 -- .615 538 130.1 125 10 29 5 4 72 2 0 48 35 2.42 1.18
1975年 28 12 3 1 1 5 6 0 -- .455 456 106.1 103 8 32 5 14 42 0 0 50 39 3.31 1.27
1976年 43 29 7 1 1 18 8 2 -- .692 868 217.1 192 30 47 5 9 129 0 0 77 72 2.99 1.10
1977年 42 30 11 3 0 18 8 7 -- .692 897 216.1 197 25 65 9 4 155 0 2 89 70 2.92 1.21
1978年 43 31 5 0 2 13 12 2 -- .520 805 191.1 176 23 73 11 12 130 3 1 97 87 4.10 1.30
1979年 阪神 37 36 17 5 2 22 9 1 -- .710 1129 273.2 227 23 75 7 15 200 4 0 101 88 2.89 1.10
1980年 37 34 21 1 0 15 14 0 -- .517 1127 280.1 241 36 57 3 20 179 1 0 104 94 3.02 1.06
1981年 32 30 17 2 2 16 10 2 -- .615 937 230.0 202 15 53 7 14 156 0 1 82 77 3.01 1.11
1982年 27 25 4 2 1 11 9 0 -- .550 688 163.1 154 17 47 3 8 95 1 0 72 62 3.42 1.23
1983年 35 32 9 3 2 13 14 1 -- .481 890 209.0 202 31 60 3 11 109 0 0 116 94 4.05 1.25
通算 : 11年 374 268 96 19 11 139 95 17 -- .594 8375 2029.1 1824 218 540 58 111 1273 12 4 836 718 3.18 1.16
  • 굵은 글씨 는 시즌 最高 成跡.

關聯 情報 [ 編輯 ]

著書 [ 編輯 ]

  • 《男子는 언제나 외로운 히어로( 男はいつも淋しいヒ?ロ? )》(프로메테우스 出版社, 1983年) ISBN   4-938499-01-0
  • 《고바야시 시게루의 즐거운 野球: 投手便( 小林繁の?しい野球:投手編 )》( 苦味네 쇼텐 , 1989年 9月) ISBN   4-338-08505-3

連載 [ 編輯 ]

  • 《고바야시 시게루의 歲완 파란 半生氣( 小林繁の細腕波?半生記 )》(2006年, 當時 專屬 評論家를 맡은 《도쿄 스포츠》에서 連載했던 自敍傳. 死亡한 2010年 1月부터 《再錄·고바야시 시게루의 歲완 파란 半生氣》로서 再演再) [100] [週 20]

映畫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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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 編輯 ]

註解 [ 編輯 ]

  1. 고바야시는 初等學生 時節에 軟式野球 으로 드롭 커브를 던질 수 있게 됐다. [12]
  2. 當時에는 前年度 드래프트 會議 指名 後 3月부터의 시즌에서 社會인 팀에 所屬돼 있었을 境遇, 가을의 日本 産業 對抗 野球 大會가 終了할 때까지는 프로팀에 入團할 수 없었다.
  3. 韓華 로 치면 2億 8,336萬 8,000원이다.
  4. 阪神에서는 只今까지 構圖 가즈히코 의 등番號가 19番이었지만 고바야시의 異跡에 依해 26番으로 變更했으며 [74]
  5. 가케후는 이 1979年 시즌에 個人 最多인 48個의 홈런을 記錄하여 홈런王 을 차지했다.
  6. 곤도 다카오의 말에 依하면, “韓信은 요미우리와는 달라 모두가 힘을 모아 이긴다고 하는 意識이 적은 팀이었다”라고 말했다. [90]
  7. 1951年 5月에 ‘라디오 도쿄’라는 商號로 會社를 設立. 같은 해 12月 25日에 라디오 放送局으로서 個國. 1953年 12月부터 KRT의 略稱을 使用. 1955年 4月에 텔레비전 本放送 開始·라디오 텔레비전 兼英國이 된다. 1960年 11月 29日에 會社名을 도쿄 放送·略稱을 TBS로 變更. 以後 라디오 部門에 對해 ‘도쿄 라디오’(1961年 以後에는 ‘TBS 라디오’), 텔레비전 部門에 對해서는 ‘도쿄 TV’(1961年 以後에는 ‘TBS TV’)로 불리게 된다. 2001年 10月에 라디오 部門이 TBS 라디오&커뮤니케이션즈 (略稱: TBS R&C), 2009年 4月에 텔레비전 部門이 TBS TV로 各各 分離하여 放送 持株會社化(會社名을 도쿄 放送 홀딩스 ·略稱을 TBSHD로 各各 變更). TBS의 略稱은 ‘TBS 테레비’로 履行됐다. 2016年 4月에 TBS R&C는 TBS 라디오로 會社名을 變更. 2020年 10月에 TBS HD는 TBS 홀딩스로 會社名 變更.
  8. 參考:
    • TBS 野球 解說者였던 것에 對해서… [97]
    • TBS 野球 解說者로서의 在任 期間에 對해
      • TBS 師事의 歷代 프로 野球 解說者 目錄에서 1984年부터 1991年까지 明記 [98]
      • 긴테쓰 코치 退任 後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에서 解說者로 紹介됐을 때, 現役 隱退 後 긴테쓰 코치로 就任할 때까지 13年間 일한 것으로 取扱된다. [1] [2] [3] [4] [5] [6]
  9. 參考:
    • ‘꽂히고 있다’라는 表現을 考案한 것에 對해서는 다음 記事에서도 本人의 發言으로 紹介되고 있다. [100]
  10. 아내 구미코는 후지 TV 系列에서 當時 放送됐던 料理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 料理의 鐵人 》에 出演한 經歷이 있어(1998년 6月 5日 放送, 相對는 프랑스 料理師인 사카이 히로유키 ) 시즌 中의 OA면서 고바야시 本人도 같은 프로그램에 出演했다.
  11. 1951年 3月 15日에 아사히 放送(ABC)이라는 商號로 會社를 設立. 같은 해 11月 11日에 라디오 單英國으로서 個國. 1959年 6月에 오사카 TV 放送 (OTV)을 合倂하여 라디오·텔레비전 兼英國이 된다. 2018年 4月에 아사히 放送 그룹 홀딩스 로 會社名 變更·放送 持株會社化하여 라디오 放送 業務는 아사히 放送 라디오 (ABC 라디오), 텔레비전 放送 業務는 아사히 放送 TV (ABC TV)로서 各各 子會社의 運營으로 履行.
  12. 參考:
    • ABC 野球 解說者였던 거에 對해서… [97]
  13. 나시다는 고바야시의 1年 後輩이며 當時 隣接한 現이자 시마네縣 에 있는 시마네 현립 하마다 高等學校 野球部에 所屬돼 있었다. [108]
  14. 參考:
    • 2003年부터 2004年까지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에서 J SKY SPORTS의 野球 解說者로 紹介(2003年에는 ‘J스카이스포츠’로 表記 [1] , 2004年은 ‘J스카이S’로 表記 [2]
    • J SKY SPORTS 野球 解說者였던 것에 對해서는 아래 情報도 參照.
      • 2002年… 5月 3日 야쿠르트 대 주니치 [114]
  15. 參考:
    • 도쿄 스포츠 專屬 評論家였던 것에 對해서는 다음 情報를 參照.
  16. 參考:
    • 2007年에 SK 2군 投手 코치를 맡았음을 明記(年號는 헤이세이 19年으로 表記 [120] ).
    • 2007年에 SK 投手 인스트럭터로 맡았음을 明記(年號는 헤이세이 19年으로 表記 [97] ).
    • 다음 資料를 통해 2008年 2月 當時에도 도쿄 스포츠 評論家로 活動하던 中에 SK의 臨時 投手 코치였음을 明記 [100]
  17. 그 사이 2005年부터 2008年까지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에는 CS界 解說者로 紹介된 바 있다. [3] [4] [5] [6]
  18. 參考:
    • 2010年 1군 投手 코치가 된 것은 다음 資料를 參照(헤이세이 22年으로 表記 [97] ).
  19. 이 醜挑戰에서는 고바야시가 高校 時節에 出戰했던 모든 競技(練習 競技를 包含)의 記錄表와 아버지가 만든 스크랩북, 다이마루 時節 緋緞 販賣帳에서 勤務했던 모습이 담긴 寫眞 等이 展示됐다. [138]
  20. 參考:
    • 2006年 5月…(2010年 웹에서의 再錄 [147] )
    • TBS 解說者 時節에도 評論家로 活動한 적이 있다.
  21. 參考:

出戰 [ 編輯 ]

  1.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 2003》(《홈런》 2003年 3月號 증간. 桐 29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37 揭載된 프로필.
  2.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 2004》(《홈런》 2004年 3月號 증간. 桐 31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37 揭載된 프로필.
  3.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 2005》(《홈런》 2005年 3月號 증간. 桐 31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37 揭載된 프로필.
  4.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 2006》(《홈런》 2006年 3月號 증간. 桐 31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37 揭載된 프로필.
  5.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 2007》(《홈런》 2007年 3月號 증간. 桐 26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36 揭載된 프로필.
  6.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 2008》(《넷머니》 2008年 3月號 증간. 桐 31日, 고사이度 出版 發行) P.280 揭載된 프로필.
  7. 參考(出身地) :
  8. 곤도 다카오 2010 , 16-19쪽.
  9. 《프로 野球人國紀 주고쿠便 完全版》( 베이스볼 매거진社 )
  10. 곤도 다카오 2010 , 20쪽.
  11. “審判にクレ?ム、小林少年の素顔 虎番疾風?其の四(10)” . 산케이 新聞. 2022年 3月 18日 . 2022年 3月 29日에 確認함 .  
  12. 곤도 다카오 2010 , 18-19쪽.
  13. 곤도 다카오 2010 , 24쪽.
  14. 곤도 다카오 2010 , 25-27쪽.
  15. 곤도 다카오 2010 , 29-30·32쪽.
  16. “天?から地獄へ ?大から告げられた衝?事? 虎番疾風?其の四(11)” . 산케이 新聞. 2022年 3月 22日 . 2022年 3月 29日에 確認함 .  
  17. 곤도 다카오 2010 , 31쪽.
  18. 곤도 다카오 2010 , 30-37쪽.
  19. 시즈메 가쓰野 2014 , 62쪽.
  20. 시즈메 가쓰野 2014 , 185쪽.
  21. 곤도 다카오 2010 , 38-42·45쪽.
  22. “勤務は?服?り場?「でもまた野球ができる」 虎番疾風?其の四(12)” . 산케이 新聞. 2022年 3月 23日 . 2022年 3月 29日에 確認함 .  
  23. 곤도 다카오 2010 , 45-47쪽.
  24. 곤도 다카오 2010 , 47-48쪽.
  25. 곤도 다카오 2010 , 47쪽.
  26. 곤도 다카오 2010 , 48쪽.
  27. 곤도 다카오 2010 , 19쪽.
  28. 곤도 다카오 2010 , 48-51쪽.
  29. 곤도 다카오 2010 , 55쪽.
  30. “「助けてくれたのは大丸です」 プロ入りを拒否 虎番疾風?其の四(13)” . 산케이 新聞. 2022年 3月 24日 . 2022年 3月 29日에 確認함 .  
  31. 곤도 다카오 2010 , 55-59·62쪽.
  32. 곤도 다카오 2010 , 62쪽.
  33. 곤도 다카오 2010 , 59-63쪽.
  34. 곤도 다카오 2010 , 64-65쪽.
  35. 곤도 다카오 2010 , 66-67쪽.
  36. 곤도 다카오 2010 , 67-68쪽.
  37. 곤도 다카오 2010 , 70-73·78쪽.
  38. 곤도 다카오 2010 , 180쪽.
  39. 곤도 다카오 2010 , 76-77쪽.
  40. 곤도 다카오 2010 , 77-79쪽.
  41. 곤도 다카오 2010 , 79-84쪽.
  42. 곤도 다카오 2010 , 85쪽.
  43. 곤도 다카오 2010 , 123-124쪽.
  44. 곤도 다카오 2010 , 76쪽.
  45. 곤도 다카오 2010 , 88쪽.
  46. 「?めてやる」…再就職はプロゴルファ? 虎番疾風?其の四(74) - 산케이 新聞, 2022年 6月 23日
  47. 곤도 다카오 2010 , 94-100쪽.
  48. 「死ぬ?でやれ」…心に響いた先輩の言葉 虎番疾風?其の四(75) - 산케이 新聞, 2022年 6月 24日
  49. 곤도 다카오 2010 , 100-103쪽.
  50. 곤도 다카오 2010 , 105쪽.
  51. 곤도 다카오 2010 , 108·111-112쪽.
  52. 곤도 다카오 2010 , 112-113쪽.
  53. 곤도 다카오 2010 , 113-122쪽.
  54. 곤도 다카오 2010 , 122쪽.
  55. 〈シリ?ズ連載 レジェンドを訪ねる 昭和世代の言い?し 新浦壽夫?2〉. 《슈칸 베이스볼》. 2023年11月20日?. 베이스볼 매거진社. 61쪽.  
  56. 江川氏「申し?ない。一生消えない」 - 닛칸 스포츠, 2010年 1月 18日
  57. 슈칸 分슌 2000 , 29-30쪽.
  58. 곤도 다카오 2010 , 123-125쪽.
  59. 곤도 다카오 2010 , 124쪽.
  60. 夜自키 료이치 1999 , 19·23·25쪽.
  61. 곤도 다카오 2010 , 125쪽.
  62. 夜自키 료이치 1999 , 25쪽.
  63. 곤도 다카오 2010 , 129쪽.
  64. 곤도 다카오 2010 , 121-122쪽.
  65. 곤도 다카오 2010 , 130쪽.
  66. 곤도 다카오 2010 , 130-131쪽.
  67. 夜自키 료이치 1999 , 31쪽.
  68. 곤도 다카오 2010 , 131쪽.
  69. 곤도 다카오 2010 , 133쪽.
  70. 곤도 다카오 2010 , 138-139쪽.
  71. 곤도 다카오 2010 , 139쪽.
  72. 夜自키 료이치 1999 , 52-53쪽.
  73. 곤도 다카오 2010 , 142쪽.
  74. 곤도 다카오 2010 , 144쪽.
  75. 곤도 다카오 2010 , 147쪽.
  76. 에가와 스구루 & 街케後 마사유키 2010 , 82-84쪽.
  77. 곤도 다카오 2010 , 149-155쪽.
  78. 夜自키 료이치 1999 , 20쪽.
  79. 곤도 다카오 2010 , 127-128쪽.
  80. 곤도 다카오 2010 , 155쪽.
  81. 곤도 다카오 2010 , 162쪽.
  82. 곤도 다카오 2010 , 162-163쪽.
  83. 곤도 다카오 2010 , 166쪽.
  84. 곤도 다카오 2010 , 166-167쪽.
  85. 곤도 다카오 2010 , 167-168쪽.
  86. 곤도 다카오 2010 , 168쪽.
  87. 夜自키 료이치 1999 , 47-48쪽.
  88. 곤도 다카오 2010 , 171쪽.
  89. 곤도 다카오 2010 , 171-172쪽.
  90. 곤도 다카오 2010 , 164쪽.
  91. 곤도 다카오 2010 , 172-173쪽.
  92. 야마다 다카미치 2013 , 11쪽.
  93. “13勝投手、電?引退のナゾ 虎番疾風?其の四(8)” . 산케이 新聞. 2022年 3月 16日 . 2022年 3月 29日에 確認함 .  
  94. 곤도 다카오 2010 , 173-174쪽.
  95. 곤도 다카오 2010 , 175쪽.
  96. 川藤ひとりだけに打ち明けていた引退の?相。(5/5) - ‘Number Web’, 2010年 4月 9日 傳達. ※《Sports Graphic Number》 751號, ‘創刊 30周年 特別 編輯 프로 野球 人間 交叉點 2010’( 「創刊30周年特別編集 プロ野球 人間交差点 2010」 , 2010年 4月 1日 發賣) 揭載 《에가와 스구루×고바야시 시게루 “‘悲劇의 英雄’ 油田의 31年間”( 『江川卓×小林繁 「“悲劇のヒ?ロ?”流?の31年間」』 )》(門: 아베 다마키)으로부터의 再收錄(有料 會員 限定 記事).
  97. 트루마사 公式 홈페이지의 프로필 (인터넷 아카이브 2010年 1月 20日子 保存 캐시)
  98. TBS50年史 》 資料便 P.234 揭載 ‘主要 스포츠 프로그램 解說者’에서 프로 野球 解說者 目錄을 參照.
  99. 곤도 다카오 2010 , 182쪽.
  100. 小林繁さんの言葉 - 『東スポWEB』(東京スポ?ツ電子版)?「デスク?ウラ話」 2017年6月12日12時配信(文:山口?司=運動部デスク)
  101. 곤도 다카오 2010 , 186쪽.
  102. 곤도 다카오 2010 , 185쪽.
  103. 《'95 프로 野球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홈런》 1995年 3月號 증간. 桐 15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03 揭載된 프로필.
  104. 《'96 프로 野球 12球團 前 選手 컬러 百科 銘感》(《홈런》 1996年 3月號 증간. 桐 31日, 日本 스포츠 出版社 發行) P.202 揭載된 프로필.
  105. 곤도 다카오 2010 , 187-188쪽.
  106. 곤도 다카오 2010 , 188쪽.
  107. 阿部珠樹『神?は返事を書かない スポ?ツノンフィクション傑作選』文藝春秋、2023年11月27日、 ISBN 4-16-391783-7 、p255。
  108. 곤도 다카오 2010 , 44쪽.
  109. 「ボクは生き急ぎ過ぎていた」 さまざまな挑?、借金…これも人生、波?の半生に悔いなし 虎番疾風?其の四 小林繁?(429)
  110. 곤도 다카오 2010 , 188-189쪽.
  111. 小林さん?けるような投手に…岩?タイトル宣言 - Sponichi
  112. 球?最後の優勝を??した唯一の現役選手、岩?久志が近?時代に?んだ大切なこと - 料米타이
  113. 곤도 다카오 2010 , 189-190쪽.
  114. Jスカイスタジアム2002 ヤクルト vs 中日(05/03) - J SKY SPORTS 公式 홈페이지로부터, 2002年 5月 3日 18:00부터 放送 豫定인 야쿠르트 대 주니치展 中繼 情報(인터넷 아카이브 桐 4月 24日子 保存 캐시) ※解說者로서 ‘고바야시 시게루’의 크레디트가 있음.
  115. 阿部珠樹『神?は返事を書かない スポ?ツノンフィクション傑作選』文藝春秋、2023年11月27日、 ISBN 4-16-391783-7 、p257。
  116. 곤도 다카오 2010 , 190쪽.
  117. 『神?は返事を書かない』、p258。
  118. 『神?は返事を書かない』、p259。
  119. 곤도 다카오 2010 , 196쪽.
  120. 트루마사 公式 홈페이지 프로필 (인터넷 아카이브 2008年 8月 27日子 保存 캐시)
  121. ハム小林繁コ?チ、方針は「シカト育成」 - 닛칸 스포츠
  122. 곤도 다카오 2010 , 198-199쪽.
  123. “小林?監督永眠” (日本語). オ?ルスタ?福井 . 2010年 10月 1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24. 元阪神?小林繁が遺した「ノ?ト」 MVP左腕が"夢追う野球人"へ?える若き日の財産 - Full-Count
  125. 곤도 다카오 2010 , 206-209쪽.
  126. 『神?は返事を書かない』、p260。
  127. 곤도 다카오 2010 , 209쪽.
  128. 夜自키 료이치 1999 , 34쪽.
  129. 夜自키 료이치 1999 , 34-35쪽.
  130. 곤도 다카오 2010 , 9-10쪽.
  131. 곤도 다카오 2010 , 12쪽.
  132. 곤도 다카오 2010 , 197쪽.
  133. 日本ハム小林繁投手コ?チ突然死…57? - 닛칸 스포츠
  134. 곤도 다카오 2010 , 213-214쪽.
  135. 小林繁さん急死=57? 巨人、阪神の元投手 ’ - 마이니치 新聞, 2010年 1月 17日.
  136. 곤도 다카오 2010 , 215쪽.
  137. 곤도 다카오 2010 , 215-216쪽.
  138. 곤도 다카오 2010 , 44-45쪽.
  139. “小林繁さん功績たたえ記念碑建立 山田修義や平沼翔太を指導” . 후쿠이 新聞 . 2016年 1月 1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1月 16日에 確認함 .  
  140. 곤도 다카오 2010 , 169쪽.
  141. 곤도 다카오 2010 , 157쪽.
  142. 夜自키 료이치 1999 , 45-46쪽.
  143. 곤도 다카오 2010 , 78쪽.
  144. 곤도 다카오 2010 , 158-161쪽.
  145. 【プロ野球OBに?いに行く】王さんに1本足打法させなかった小林繁投手を語る【若菜嘉晴】【高橋慶彦】 - YouTube
  146. 곤도 다카오 2010 , 170쪽.
  147. 小林繁さんが語った江川事件(2) - 『東スポWEB』?「ハミ出し東スポ」【小林繁の細腕波?半生記:プレイバック2】2010年1月18日配信 ※《도쿄 스포츠》 2006年 5月 24日子 地面으로부터의 再錄. 링크는 인터넷 아카이브 2011年 12月 11日子 保存 캐시
  148. 《도쿄 스포츠》2019年 3月 29日子 6面에 揭載된 곤도 아키히토 의 訃告로부터, 1987年 當時 本紙 野球 評論家의 對談 企劃에서 곤도, 지바 시게루, 오시타 쓰요시와 함께 臨하는 모습이 寫眞 添附에서 紹介.
  149. allcinema 프로필 을 參照
  150. ??CMで、小林繁さん?江川卓さんが初共演!! - 記者쿠라 公式 홈페이지內의 報道 資料, 2007年 10月 12日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