告廟 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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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廟 皇后 ( 日本語 : 光明皇后 こうみょうこうごう [ * ] , 多耳壺 (大?) 元年( 701年 ) ~ 덴표호지 (天平?字) 4年( 760年 ) 6月 7日(陽曆 7月 27日))은 日本 나라 時代 (奈良時代)의 人物이다.

쇼무 天皇 (聖武天皇)의 皇后로 후지와라노 後히吐(藤原不比等)의 딸, 어머니는 阿伽陀老이누카이노 미치요(?犬養三千代, 다치바나노 미치요橘三千代)로 쇼무 天皇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미야코 (藤原宮子)의 異腹 女同生(卽 쇼무 天皇은 나이 비슷한 姨母와 婚姻한 셈). 이름은 아스카베히메(安宿媛)로, 告廟視(光明子), 倒産죠(藤三娘)라고도 불린다. 한便 「告廟 皇后」(光明皇后)라는 稱號는 시호나 追尊이 아닌 統稱으로써, 正式 尊號는 千坪應眞인정황태후 ( 天平??仁正皇太后 )이다. 또한 皇族이 아닌 者로써 皇后가 된 先例이기도 하다.

生涯 [ 編輯 ]

쇼무 天皇이 아직 皇太子로 있을 때 婚姻하였고, 要路 (養老) 2年( 718年 )에 딸 아베 內親王 (阿倍?親王, 後날의 고켄孝謙?쇼토쿠?? 天皇)李 태어났다. 眞키 (神?) 元年( 724年 )에 男便이 天皇으로 卽位하고 同時에 後宮(後宮)의 位階인 否認(夫人)의 號를 얻었다. 眞키 4年( 727年 ), 아들 모토 王(基王)李 태어났다.

그러나 眞키 5年( 728年 ), 皇太子로 세워진 모토 王(基王)李 夭折하고 後嗣 問題로 나가야 王 (長屋王)李 逆賊으로 몰려 죽는 事件이 發生하는(나가야 王의 政變) 等 朝廷은 어수선했다. 나가야 王의 政變 以後, 덴표(天平) 元年( 729年 )에 皇后로 삼는다는 條가 내려졌다. 이는 王族 以外의 집안에서 王后가 나온 最初의 事例였다. 그 뒤 후지와라氏 (藤原氏)의 子女가 皇后가 되는 것이 日本에서 하나의 先例가 되었다.

모토 王의 죽음으로 唯一한 딸인 아베 내친왕이 太子로 冊封되었다. 이 太子가 天皇으로 卽位하고 난 뒤인 덴표쇼號 (天平勝?) 元年( 749年 ) 以後 皇后宮職(皇后宮職)을 是非秋다이(紫微中台)라 改稱하였다. 是非秋다이의 長官으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任命되었다.

덴표쇼號 8年( 756年 )에 男便 쇼무 太上天皇(太上天皇)李 崩御하고, 그 2年 뒤에 皇太后의 稱號가 더해졌다.

덴표호지 4年( 760年 )에 붕어, 社호산東陵(佐保山東陵)에 묻혔다.

告廟 皇后는 佛敎에 歸依해 도다이지 (東大寺), 고쿠분지 (?分寺) 設立을 男便 쇼무 天皇에게 進言하였다고 傳한다. 또한 가난한 者를 救濟하기 위한 施設 비電源(悲田院), 醫療 施設인 試藥圓(施?院)을 지어 慈善 事業에도 힘을 쏟았다. 쇼무 太上天皇 事後 49制에 遺品을 도다이지에 寄贈했는데, 그 寶物을 保管하기 위해 지었던 것이 바로 쇼소인 (正倉院)이다. 나아가 高후쿠지(興福寺), 好코지(法華寺), 新야쿠시지(新?師寺) 等 많은 절을 짓거나 整備하였다.

書藝에도 뛰어났는데, 皇后 自身이 몸소 베낀 동진의 書藝家 王羲之 (王羲之)의 《樂毅論》(?毅論)과 唐나라 두正裝(杜正?) 等 三兄弟의 文集 《두加入性雜書要略》(杜家立成?書要略)이 모두 쇼소인에 남아 傳한다. 쇼소인에 氣盡되어 所藏하게 된 物品 가운데는 新羅 의 僧侶 元曉 (元曉)가 지은 《判比量論》(判比量論)의 筆寫本度 包含되어 있다.

告廟 皇后가 지은 와카 (和歌) 4首가 《만요슈》(萬葉集)에 남아 傳한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