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무 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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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무 天皇
聖武 天皇
第45代 日本 天皇
在位 724年 3月 3日-749年 8月 19日
前任 겐쇼 天皇
後任 고켄 天皇
宰相
이름
誤비토 (首)
시호 寒風: 쇼무 (聖武)
畫風: 아메시루시 쿠니吳侍下라키 土曜사쿠라히코노 스메라미코토 (天璽?押開豊?彦天皇)
陵號 사호야마 남릉 (佐保山南陵)
年號 眞키 (神?), 덴표 (天平), 덴표칸抛 (天平感?)
身上情報
出生日 701年
死亡日 756年 6月 4日
王朝 야마토 王朝
父親 몬무 天皇
母親 후지와라노 미야코
配偶者 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

쇼무 天皇 (聖武天皇, 701年 ~ 756年 6月 4日 )은 45代 日本 天皇이다. 卽位 前에는 吳비토老미코 (首皇子) 라 불리었다. 몬무 天皇 후지와라노 後히吐 의 딸 미야코 의 아들이다. 아버지 몬무 天皇 이 死亡할 때 7歲에 不過했기 때문에 그가 成長할 때까지 할머니 겐메이 天皇 과 姑母 겐쇼 天皇 이 黃위의 空白을 채웠다. 또한, 皇后 高妙시는 후지와라노 後히吐 의 딸로 皇室 出身이 아닌 첫 番째 皇后이다.

略歷 [ 編輯 ]

몬무 天皇의 第1皇子로 태어났으나 일곱 살 때에 아버지 몬무 天皇이 죽고 어머니 미야코度 心身이 弱해 오랫동안 皇子와 만나지 못했고(모자가 서로 만난 것은 天皇의 나이 37歲 때) 몬무 天皇의 母后 겐메이 天皇(덴지 天皇의 딸)李 皇子가 長成할 때까지의 '代理'로서 卽位했다. 와도 (和銅) 7年( 714年 )에 元服과 함께 正式으로 太子가 되었으나, 太子 自身의 病弱함과 다른 皇親 勢力 및 外戚인 후지와라 집안과의 對立 問題로 卽位가 늦춰지면서 代身 몬무 天皇의 누나 겐쇼 天皇이 다시금 '代理의 代理' 格으로 皇位를 잇게 되어, 皇子의 나이 24歲 때에야 비로소 겐쇼 天皇의 兩位를 받아 卽位할 수 있었다.

治世의 初期는 皇親 勢力을 代表하는 나가야 王 (長屋王)李 政權을 맡고 있었다. 當時 후지와라 집안은 그들 一族으로 후지와라노 후히討議 딸인 告廟視 (光明子)가 皇后로 세워지기를 바랐지만, 일찍이 지토 天皇 의 事例에서도 보이듯 皇后는 男便인 天皇 事後 '代理' 天皇으로서 卽位할 可能性이 있다는 理由로 皇族이 아닌 者는 皇后가 될 수 없다는 것이 當時의 慣習이었다. 때문에 나가야 王은 告廟市價 皇后가 되는 것을 反對했다. 하지만 덴표 (天平) 元年( 729年 )에 나가야 王의 邊이라 불리는 事件이 일어나면서 나가야 王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反對 勢力이 없어지면서 高妙시는 皇后가 될 수 있었다. 이는 皇族이 아닌 者로서 皇后로 冊封된 最初의 事例였다.

오늘날에는 高妙詩를 皇后로 삼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나가야 王을 除去하기 위해 高卯時의 兄弟인 후지와라 氏 4兄弟가 꾀한 事件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덴표 9年( 737年 )에 후지와라 4兄弟를 비롯한 大部分의 政府 高官이 天然痘 로 死亡하는 大慘事가 일어났고, 나가야 王의 親아우人 스즈카 王(鈴鹿王)李 지태정官舍(知太政官事)로 任命되면서 가까스로 政府 體制가 整頓되었다.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 編輯 ]

當時 후지와라 집안의 사람으로서 朝廷의 要職을 맡고 있던 重鎭이었던 4兄弟가 잇달아 病死하면서 國政은 가쓰라기 王(葛城王) 다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가 맡게 되었고(그는 告廟 皇后와는 아버지가 다른 兄弟에 該當한다) 遣唐使 로써 黨에서 歸國한 基非盧 마키非 와 僧侶 겐步(玄昉)가 重用되면서 후지와라 勢力은 크게 後退했다. 앞서 天然痘로 죽은 후지와라 4兄弟의 한 名인 우마카히(宇合)의 맏아들 히로쓰구(?嗣)는 덴표 10年( 738年 ), 야마토老카미 (大養德守)에서 眞제이 (鎭西) 다자이노쇼니(大宰少?)로 옮겨졌는데, 이를 左遷이라 생각하고 크게 不滿을 품어, 덴표 12年( 740年 ) 8月 29日에 是正을 批判하고 基非盧 마키費와 겐補宜 處分을 要求하는 表文을 調整에 보냈다.

후지와라노 히로쓰구(《前現鼓室》 中에서)

9月 3日, 히로쓰구가 擧兵했다는 消息이 빠른 말을 통해 首都 헤이조쿄에 到着했고, 天皇은 오노노 아즈마히吐(大野東人)를 大將軍으로 삼아 節度를 하사하고 部長群으로는 기노 半馬로(紀飯麻呂)를 임명했다. 그리고 도카이 (東海), 島山 (東山), 山人 (山陰), 山腰 (山陽), 난카이 (南海) 等 5度(道)의 軍事 17,000名을 動員하도록 命했다. 4日, 調整에 出仕한 하야토 24名에게도 從軍할 것을 命했고, 다음날 사에키노 쓰네히토, 아베盧 無視마로가 勅使로 任命되어 戰勝 起源을 위해 二世 神宮 에 幣帛을 捧納하는 한便, 여러 拘泥에서 觀音菩薩像을 만들고 觀音經 10經을 死境하여 全勝을 祈願하라는 命令이 거듭 내려졌다.

9月 21日, 나가토國 에 到着한 오노노 아즈마히吐는 現地에 碇泊해 있던 新羅船의 人員과 機器를 採用할 수 있도록 許可해줄 것을 要求했다. 다음날인 22日에 勅使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盧 無視마로가 하야토 24名, 軍事 4千 名을 이끌고 航海하여 판궤진(板櫃鎭, 不젠 國 기쿠群)을 攻略. 등미(登美)·판櫃(板櫃)·卿도(京都) 3陣의 軍事 1,767名과 倂記 多數를 鹵獲한다. 히로쓰구는 기쿠群 近處의 原價軍에 到着하여 烽火불로 쿠니 안의 軍士들을 모으고, 히로쓰구 自身은 오스미 · 사쓰마 · 지쿠젠 · 奔告 의 軍事 5千으로 舊라테道路 나아가고, 동생 쓰나테(綱手)가 지쿠고 · 히젠 의 軍事 5千으로 奔告에서 進軍, 多故雇馬로가 殿下道路 進軍해 세 方面으로 官軍을 包圍한다는 것이 히로쓰구의 作戰이었다.

9月 25日, 不젠 의 여러 郡誌(郡司)들이 各其 5百 基, 80名, 70名 等을 이끌고 官軍에 投降해 왔다. 9月 29日, "히로쓰구는 凶惡한 逆賊으로 狂暴하게도 叛亂을 일으켜 人民을 괴롭히니 不孝不忠의 罪를 神이 벌하실 것이다. 따르는 者들은 卽時 歸順하라. 히로쓰구를 죽이는 者에게는 5位 異常을 내리겠다"는 內容의 칙이 규슈 여러 쿠니의 官吏와 百姓들에게 跋扈되었다. 10月 9日에 히로쓰구의 軍士 1萬 基는 판櫃하( 기타큐슈時 )에 이르러 江 西쪽에 布陣했고, 勅使로 보내진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盧 無視마로의 軍士들은 6千餘 名의 軍士로 江 東쪽에 布陣했다. 하야토를 先鋒에 세우고 組를 짜서 江을 건너려는 히로쓰구軍에 官軍은 쇠뇌를 쏘며 막았다. 한便으로 麾下의 하야토들을 시켜 敵側의 하야토에게 投降을 勸하게 했다. 이에 히로쓰구側의 하야토들은 화살을 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쓰네히토 等은 열 番이나 히로쓰구를 불렀다. 말에 탄 히로쓰구가 나타나 勅使를 찾고 말에서 내려 禮를 갖추면서 "나는 調整에 抗命하려는 것이 아니라 調整을 어지럽히는 두 사람(基非盧 마키費와 겐步)을 處罰할 것을 請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調停에 抗命하는 것이라면 모든 神들이 벌하실 것이다."라 對答했다. 그러나 쓰네히토 等이 "그렇다면 뭐하러 兵士까지 이끌고 왔는가?"라 묻자, 히로쓰구는 對答하지 못하고 말을 타고 돌아가버렸고, 問答을 듣고 있던 히로쓰구側의 하야토 세 名이 江에 뛰어들어 官軍쪽에 加擔해버렸고, 이어 히로쓰구君의 하야토 20名과 10餘 機가 잇따라 官軍에 降伏해 버렸다. 投降者들은 세 方面에서 官軍을 包圍한다는 히로쓰구의 作戰을 官軍에게 報告했고, 아직 다른 두 方面의 軍士들은 到着하지 않았음을 알렸다.

結局 판机下에서 敗戰한 히로쓰구는 배를 타고 히젠 (肥前) 마쓰우라 軍 지가 섬( 故土列島 )으로 건너가 그대로 新羅 (新羅)로 亡命하려 했지만, 耽羅 (耽羅) 近處까지 이른 倍는 더 나아가지 않고 逆風까지 불었다. 히로쓰구는 "나는 臺忠臣이다. 神靈이 나를 버리실 理는 없다. 神이시여, 風波를 가라앉혀 住所서."라 빌며 驛令을 바다에 던졌지만 風波는 더욱 激烈해졌고 끝내 배는 지가 섬으로 돌아왔다. 섬에 숨었던 히로쓰구는 10月 23日, 마침내 아베盧 舊로마路에게 붙잡혔고, 11月 1日에 오노노 아즈마히吐에 依해 兄弟인 쓰나테와 함께 히젠의 가라쓰(唐津)에서 處刑되었다. [1] 덴표 13年( 741年 ) 1月에 謝罪 16名, 沒官 5名, 流配罪 47名, 强制移住된 者 32名, 場을 맞은 者가 177名으로 蘭은 마무리되었고, 히로쓰구의 아우들도 大部分이 連坐되어 流配에 處해지면서, 히로쓰구의 後孫인 후지와라 시키케(式家)는 亂케와 홋케에 눌려 한동안 政界의 中心에서 밀려난다.

亂의 鎭壓되었음을 알리는 報告가 미처 헤이조쿄에 닿기도 前에, 쇼무 天皇은 갑자기 간토로 내려간다면서 마침내 首都를 떠나버렸다. 以後 天皇은 이家國 , 이세국 , 美露國 , 誤美國 을 돌아다닌 끝에 舊니노 미야코 (恭仁京, 야마시로國 )로 首都를 옮겼다. 그 後로도 거듭 나니와노 미야코 (難波京)로 옮겼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돌아온다는 式으로 거듭 遷都를 反復하게 된다. 머나먼 賑濟이에서 일어난 히로쓰구의 亂을 쇼무 天皇이 얼마나 무서워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佛敎에 빠진 天皇 [ 編輯 ]

쇼무 天皇의 治世인 덴표 時代는 各種 自然 災害나 疫病(天然痘)李 橫行했던 時代였다. 天皇은 佛敎에 깊게 歸依해 덴표 13年( 741年 )에는 고쿠분지(國分寺) 建立의 兆(詔)를, 덴표 16年( 743年 )에는 有名한 도다이지 (東大寺)의 毘盧遮那佛(大佛)의 建立의 條를 내렸다. 덴표 16年( 743年 )에는, 耕作되지 않은 荒蕪地들의 開墾을 奬勵하기 위해서 새로이 肝전영년私財法(墾田永年私財法)을 制定했다. 이 法은 새로 開墾한 土地에 對해 一定 期間 동안 開墾者의 個人 思惟를 認定한다는 것을 骨子로 하고 있었으며, 律令國家 日本의 根幹이기도 했던 律令制, 公知공민제 의 崩壞를 決定的으로 招來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덴표 17年( 744年 )에는 나니와로 다시 首都를 옮겼는데, 이 해 尹 1月 13日( 3月 7日 )에 餓死카(安積) 親王이 脚氣病 으로 急死한다(이에 對해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에 依한 毒殺이라고 보는 說이 있다). 덴표 18年( 745年 ) 시라카키쿄 를 首都로 宣言하였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還都하였다.

덴표쇼號 (天平勝寶) 元年 7月 2日( 749年 8月 19日 ), 딸이자 皇太子였던 아베(阿倍) 內親王(後날의 고켄 天皇 )에게 讓位한다(일설에는 스스로 ' 삼보 의 種'이라 稱한 天皇이 獨斷으로 出家해버리는 바람에 朝廷에서는 몹시 唐慌한 渦中에 退位 手續을 밟았다고도 한다). 男子로서 太上天皇이 된 것은 이것이 最初였다. 덴표쇼號 4年 4月 9日( 752年 5月 30日 ), 도다이지 大佛의 個案法要(開眼法要)를 實施했다(16미터 높이의 大佛 築造로 日本 內 靑銅과 金銀의 在庫가 바닥났다고 한다). 덴표쇼號 6年( 754年 )에는 黨의 僧侶 간진(鑑眞)李 日本을 訪問해 太上天皇이 皇太后나 天皇을 데리고 함께 만나기도 했는데, 이 무렵 오랫동안 病을 앓고 있던 母胎後 미야코가 世上을 떠났다.

덴표쇼號 8年( 756年 )에 덴무 天皇의 孫子 後나도 王(道祖王)을 皇太子로 삼으라는 遺詔를 남기고 崩御한다. 誡命은 勝만(勝?)이었다.

쇼무 天皇의 무덤

死後에는 告廟 皇太后의 意思도 反映되어 太上天皇이 生前에 아끼던 遺品들이 도다이사에 捧納되었는데, 一部가 오늘날까지 도다이지 쇼소인 (正倉院)에 傳해지고 있다. 덧붙여 1907年 에서 1908年 에 있었던 도다이사의 大佛殿 改修工事 때에 佛像의 蓮花座 옆에서 두 자루의 칼이 發見되었는데, 2010年 엑스레이 調査를 통해 이 칼들이 쇼무 太上天皇의 遺品들을 도다이사에 捧納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時點( 759年 12月)에서 다시 쇼소인에서 搬出되어 國家進步腸(國家珍寶帳, 쇼소인의 所藏品 目錄)에 '祭物(除物, 除外된 物件)'로 記載된 '요노步켄(陽寶劒, 羊의 寶劍)'과 '人노보켄(陰寶劒, 音의 寶劍)'임이 判明되었다. 이 한 雙의 칼은 모두 쇼무 太上天皇이 生前에 아끼던 것으로 쇼소인에 한 番 捧納되었다가 다시 告廟 皇后에게 返還된 것으로 여겨진다.

天皇의 무덤은 只今의 日本 나라시 호렌쵸(法蓮町)에 있으며 社호야마노미나미노 미사詐欺(佐保山南陵)라 불린다. 이 무덤 東쪽에 告廟 皇太后의 무덤도 함께 모셔져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 日本 第42代 몬무 天皇 (文武天皇, 683~707)
  • 어머니 :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 ?~754)
    • 皇后 : 코墓皇后 후지와라氏(光明皇后 藤原氏, 701~760)
      • 次女 : 日本 第46·48代 고켄 天皇 (孝謙天皇, 718~770)
      • 長男 : 皇太子 모토이王(皇太子 基王, 727~728)
    • 否認 : 阿伽陀老이누카이 히로토地(?犬養?刀自, ?~762)
      • 長女 : 이노에내친왕(井上?親王, 717?~775)
      • 3女 : 後臥內親王(不破?親王, 723?~795?)
      • 次男 : 餓死카친王(安積親王, 728~744)
    • 否認 : 후지와라氏(藤原氏, ?~748)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武智麻呂, 680~737)의 딸
    • 否認 : 타치바나노 코나카치(橘古那可智, ?~759) - 타치바나노 사이(橘佐?, ?~737)의 딸
    • 否認 : 후지와라氏(藤原氏, ?~760) - 후지와라노 後嗣사키(藤原 房前, 681~737)의 딸

各州 [ 編輯 ]

  1. 군談小說 《 헤이케 이야기 》에는 후지와라노 히로쓰구는 非젠에서 교토를 하루만에 往復할 수 있는 名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배를 띄워 바다로 나아갔다가 風浪을 만나게 되자 이 말을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하는 傳說이 收錄되어 있다. 韓國의 實學者 이덕무 는 《 靑莊館全書 》에서 싸움에서 敗한 히로쓰구 스스로가 목을 자르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