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의 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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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文化 新羅 末期부터 始作되어 高麗 電氣에 꽃피운 豪族 文化 , 武臣 政權 氣의 隱居한 선비들의 詩가 文化, 後期의 性理學 적 文化와 元나라 의 影響을 받은 文化로 構成되어 있다. 한便 高麗 全般에 걸쳐 貴族 文化 의 性格을 띠었다.

여러 風俗에 影響을 받던 統一新羅와 嚴格한 儒敎秩序 아래 朝鮮 과 달리, 더욱 두드러지게 高麗時代에는 女性 尊重 의 社會 雰圍氣가 造成되었다. [1] 元나라를 建國한 쿠빌라이 칸이 高麗人의 能力을 매우 높이사는 內容으로 中國 《元士》에 “高麗는 작은 나라지만 技術者는 韓人에 비해 優秀하고 儒學者는 모두 經書에 通達하고 孔子 孟子를 배운다”라는 記錄이 있다. [2]

高麗 前期 [3] [ 編輯 ]

灌燭寺 彌勒菩薩 立像

9世紀 以後에 나타난 佛敎界의 새로운 傾向은 善終(禪宗)의 流行이었다. 禪宗은 所依經典(所依經典)에 따라 그 宗派를 區別하는 敎宗(敎宗)과 對照되는 立場에 선다. 이러한 禪宗은 善德女王 때에 처음 傳來된 以後 9世紀 初 度의(道義)가 크게 盛行시켜 9山(九山)李 成立되었다. 이 禪宗은 主로 新羅의 邊方에서 發達하였으며, 地方의 有力한 豪族들과 密接한 關係를 가지면서 자랐다.

최치원

新羅 末期에는 都堂(渡唐) 留學生 가운데 傑出한 學者가 많이 나왔는데, 金雲卿(金雲卿)·김가기(金可紀)·崔致遠 等은 代表的인 人物이었다. 特히 최치원 은 黨에까지 文名(文名)을 크게 날렸으며 많은 著述을 남겼으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若干의 詩文(詩文)만이 現存한다. 7~8世紀에 크게 發達한 鄕歌는 9世紀에도 널리 普及되었던 것 같다. 9世紀末에는 진성여왕 의 命에 따라 鄕歌集 《三代目(三代目)》李 大矩和尙(大矩和尙)과 角干(角干) 魏弘(魏弘)이 編纂하였다.

新羅 末에는 豪族 의 擡頭와 함께 風水地理說(風水地理說)李 널리 流布되었다. 僧侶 道詵 (道詵)李 宣揚한 風水地理說은 豪族 勢力에게 收用되었는데, 이에 各地의 豪族들은 風水地理說에 立脚해서 그들의 存在를 正當化하였다. 高麗의 統一 後 風水地理說은 크게 發展하여 支配者나 地方 豪族들에게 政治的으로 利用되는 境遇가 많았다.

地方 勢力이 成長한 裏面에는 地方文化가 發達하고 있었다. 新羅의 爛熟한 貴族文化는 地方으로 擴散되어 地方文化의 發達을 가져왔다. 豪族들이 主導하고 地方民들이 參與하는 地方 單位의 文化 活動이 展開되어, 地方社會 單位의 不辭(佛事)들이 推進되고 地方學校들이 세워졌다. 9~10世紀頃 地方에서 만들어진 佛像이나 石塔 等은 王卿(王京)에서 派遣된 一流 匠人들이 만들어낸 移轉 時期의 作品만큼 均衡잡히고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地方別로 素朴하고 꾸밈없는 개성미를 보여준다.

地方 出身들의 知的 水準도 向上되었다. 소경(小京)과 같은 地方의 中心地들에서는 일찍부터 著名한 學者들이 輩出되었으며, 新羅 末에는 學識을 갖춘 文人의 底邊이 크게 擴大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高麗 初에 이르면 太祖 王建을 비롯한 地方 出身 支配層들은 以前 時代의 矛盾을 批判하고 새로운 政策을 提示할 程度로 儒敎 經典에 對한 理解나 政治理念에서 體系를 갖추고 있었다. 高麗 官人層의 다른 한 部類인 新羅 6頭品 出身의 文人들보다는 水準이 낮았지만, 豪族 出身들도 大槪는 기초적인 文人的 素養을 갖추었고, 그것은 繼續 向上되어갔다. 高麗 初 以來로 豪族 出身들은 文人的 素養을 갖춘 官人集團의 주된 構成員이었다.

새로운 時代的 狀況은 人間觀과 身分觀의 變化와 함께 支配者로서의 관인(官人)에 對한 觀念의 變化를 가져왔다. 佛敎가 下層民에까지 擴散되고, 普遍的 個體로서의 人間의 本性에 對한 깨달음의 重要性을 强調하는 腺腫(禪宗) 敎團이 繁昌함에 따라 새로운 人間觀이 擴散되었다. 王族을 新星族(神聖族)으로 標榜한 建國神話나 王族이 前生에 部處의 血統이었다는 眞宗舌禍(眞宗說話)와는 對照的으로, 8世紀 中葉의 說話에서는 奴婢와 같은 下層民도 깨달음을 얻어 解脫할 수 있는 存在로 이야기되었다. 새로운 思潮에 따른 人間觀이 擴散되면서 血統別 身分 差異를 極度로 强調하는 骨品制에 立脚한 人間觀이 崩壞함에 따라, 새로운 社會秩序의 出現이 要求되었다.

骨品制 의 閉鎖性에 對한 批判은 일찍부터 提起되어, 高麗 初에는 學識이 높은 賢人을 官人으로 登用해야 한다는 認識이 널리 퍼졌다. 太祖 王建 이 卽位 直後 發表한 政治的 急先務의 하나도 賢人의 登用이었다. 그러한 理想이 實現되지 못한 境遇도 많았지만, 그것은 社會的 公論으로서 그리고 管理人士의 理想的 原則으로서 確固하게 자리잡았다. 血統에 따른 身分意識은 남아 있었지만, 그에 따른 制約과 閉鎖性은 크게 弱化되어 以前 時代와는 根本的으로 다른 方式으로 作用하였다.

高麗의 法制에서는 骨品制와 달리 支配層조차 身分別로 細分하여 官等의 上限을 두거나 官職을 制限하는 身分的 偏狹性이 除去되었고, 學識의 程度를 基準으로 하는 過去制度 가 새로이 重要한 管理登用 制度가 되었다.

民俗 [ 編輯 ]

茶 文化 [ 編輯 ]

當時 高麗에서는 民俗에서는 車를 藥用하기 始作한 한便 儀禮的 機能이 茶 文化에서 나타나기 始作했고, 다양한 階層이 茶를 즐기게 됨에 따라 茶 文化 또한 다양하게 發達하였다. [4] 考慮는 車를 管轄하는 官廳인 茶房과 車를 生産하는 多少(茶所)를 두었다. 이러한 文化에서 次時 (茶詩)를 記錄하던 文化는 當時의 茶 文化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歷史的 史料가 된다. [5] 考慮는 茶文化가 政治的 儀禮로서 기능하기도 했는데, 다시 (茶時)는 임금이 臣下에게 내릴 重刑을 決定하기 前 責任者와 함께 茶를 마시면서 意見을 나눈 뒤 決定했던 制度이다. 茶를 마시면 精神이 맑아지고 따라서 올바른 判斷을 내리게 한다는 當時 觀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6] 茶 文化는 形成과 普及에 있어 宗敎 가 重要한 役割을 遂行하였다. 以後 高麗에서 朝鮮으로의 王朝 交替 및 佛敎의 衰退로 茶 文化가 自然스럽게 衰退했다는 主張이 一般的이다. [7] 茶 文化가 衰退한 原因에 對해서는 茶 文化의 身分과 地域에 따른 制限에서 說明하려는 試圖가 있기도 하나, [8] 이 原因에 對한 說明은 文書의 主題를 벗어난다 .

男女의 만남 [ 編輯 ]

婚姻 形態는 一夫一妻制 가 一般的인 現象이었다. [9] 女性의 裁可 는 比較的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所生 子息의 社會的 進出에도 差別을 두지 않았다. [9] 徐兢이 적은 《 高麗圖經 》에 依하면 男女가 한 데 어울려 混浴 을 했다고 傳한다. [10] 비슷한 內容이 《魏書》에서도 言及된다. [11]

다양한 娛樂거리를 奬勵한 國家와 宮中 [ 編輯 ]

高麗時代의 民俗놀이는 三國時代보다 훨씬 豐富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이 民間次元보다는 國家에서 또는 宮中에서 이를 奬勵한 境遇가 많다는 點에서 特徵的이라 하겠다. [12] 놀이 는 一般的으로 娛樂 · 京畿 · 藝能 ·武藝·信仰·名節과 關係가 緊密하므로 그 槪念 속에는 競爭性과 遊戱性, 娛樂性, 藝能性 等이 複合的으로 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12] 處容 [13] , 儺戱 [14] , 山臺雜戱 [15] , 수희 [16] 가 藝能的 內容이 있고, 擊毬 [17] , 手搏戱 [18] , 各沮戱 [19] , 석전 [20] 가 競技的 內容이 있고, 推薦희 [21] , 지연희 [22] , 호기희 [23] , 척초희·超인희 [24] , 弄환희 [25] , 장간희 [26] , 죽마희 [27] , 투란희 [28] 遊戱 的 內容이 있고, 危機 [29] , 投壺 [30] , 紵布희 [31] , 雙六 [32] 이 娛樂的 內容이 있다.


高麗 時代의 王들은 사냥을 즐겼으며 高麗 後期 元나라의 支配를 받던 時期에는 自然스레 國政보다 사냥에 沒頭하게 된다. [33]

文學 [ 編輯 ]

武人들이 政權을 掌握하자, 一部 文人들은 出世를 斷念하고 草野(草野)에 隱居하며 飮酒와 詩가(詩歌)를 즐기는 傾向을 나타내었다.

이인로 (李仁老)· 林椿 (林椿) 等은 그 代表的인 人物로 中國의 竹林七賢 (竹林七賢)에 비기어 스스로를 海左七賢(海左七賢)이라고 自處하였다. 다른 한便 이규보 (李奎報)· 최자 와 같이 崔氏의 門客으로서 武人 政權下에서 새로운 出世의 길을 摸索하는 文人學者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政治的 進出에는 限界가 있었다. 文人들은 武臣政權 아래서 文筆과 行政事務의 技能人으로서 벼슬을 求하거나 그 門客(門客)李 되어 無人執政의 歡心을 사기 위해 詩나 文章을 짓곤 하였다.

이 두 部類의 文人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文學的 世界를 이룩하였고, 그 속에서 자라난 것이 神話(神話)·傳說(傳說)·逸話(逸話)·시화(詩話) 等을 素材로 한 說話文學(說話文學)이었다.

高麗時代 開京의 生活相을 담은 會話

文宗 때 박인량 (朴寅亮)의 《殊異傳(殊異傳)》을 先驅로 하여, 無人 時代에 이르러 이인로 (李仁老)의 《破閑集(破閑集)》, 최자 의 《補閑集(補閑集)》, 이규보 의 《白雲小說(白雲小說)》 等이 代表的인 作品이었는데, 이러한 作品들의 作者는 當代의 손꼽히는 文筆家로서 崔氏 政權에 拔擢되어 活動한 人物들이었다.

이 作品들은 비록 한담 式의 글들이지만, 그 속에는 武臣政權을 正面으로 거스르지 않는 範圍에서나마 種種 作者 나름의 생각이 담기곤 하였다.

特히 高價를 다룬 글들 中에는 《 三國史記 》에서 疏忽히 다룬 傳統文化에 對한 事實들에 注目하여, 새로운 歷史認識을 摸索하는 面도 엿보인다. 그러한 歷史認識은 다른 形態로도 著述되었으니, 李奎報는 敍事詩 〈東明王篇(東明王篇)〉에서 古代 神話에 對해 否定的인 金富軾의 歷史理解에서 벗어나, 古代 文化에 內在된 氣像과 活力을 새로이 發見하고 肯定的으로 評價하였다.

武臣政權의 基盤이 確固해진 以後 文人들은 武臣들이 主導하는 現實에 順應하면서도, 억눌린 現實로부터 무언가 變化를 꿈꾸었다. 이러한 가운데 景幾體歌(景幾體歌)라는 새로운 類型의 文人 詩가(詩歌)가 登場하여, 以後 高麗 後期와 朝鮮前期에 걸쳐 流行하였다. 崔氏 執權期에 지어진 〈翰林別曲(翰林別曲)〉은 當時 文人들의 文筆 才能과 知識을 誇示하는 것으로 始作하여, 當時 文人들의 周邊에서 높게 評價되거나 애호되는 것들을 豪快한 氣分으로 노래한 것이다.

史上 [ 編輯 ]

民族 意識 [ 編輯 ]

高麗 時代에는 民族 意識이 國家 社會를 이끌어 나갔다. [34] 高麗人들은 古代 社會의 矛盾을 克服하고 民族의 再統一을 이루어 낸 歷史的 經驗에서 自信感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土臺로 하여 强烈한 民族 意識이 形成되었다. [34]

儒學과 朱子學의 前例 [ 編輯 ]

高麗가 元나라 와 交涉을 갖는 동안에 받아들인 朱子學은 高麗 末의 學問·思想 面에 새로운 轉換期를 가져오게 하였다. 朱子學 은 宋나라 走者 (朱子, 朱熹)가 完成한 것으로, 朱子의 學說은 周敦頥(周敦?)·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나종언(羅從彦) 等의 學說을 繼承하여 大成된 것이다. 走者는 萬物의 根源을 이(理)·氣(氣)로 나누어, 이(理)는 萬物에 性(成)을 주며, 基(氣)는 萬物에 兄(形)을 준다고 하였다. 朱子學은 충렬왕 安珦 (安珦)李 最初로 받아들였고, 忠烈王의 遊學 奬勵로 漸次 發展하였다. 人生과 宇宙의 根源을 形而上學(形而上學)的으로 解明하는 朱子學은 新進 士大夫들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安享의 뒤를 이어 白頥正이 亦是 元나라에 留學하여 이를 배워 왔으며, 그의 弟子 이제현 이 그 뒤를 이었다. 高麗 末期에는 이숭인(李崇仁)· 異色 · 정몽주 · 吉再 等과 정도전 · 倦勤 等이 輩出되었다. 이 朱子學의 傳播는 佛敎 排斥의 기운을 造成하였고, 《 朱子家禮 (朱子家禮)》에 依한 儒敎 意識이 漸次 實施되었다.

技術 文化 [ 編輯 ]

印刷術 [ 編輯 ]

現存하는 世界에서 가장 오래된 金屬活字 出版物 [ 編輯 ]

優秀한 종이 製造技術, 金屬週兆·細工技術 等을 바탕으로 世界에서 처음으로 金屬活字가 發明되어, 高宗 21年( 1234年 )에는 人種 代에 編纂된 《 詳定古今禮文 (詳定古今禮文)》李 金屬活字로 印刷되었다. 現存하는 오래된 金屬活字本으로는 1297年 의 《淸凉答順宗心要法門(淸凉答順宗心要法文)》과 1377年 의 《 直指心經 (直指心經)》李 알려져 있다. 當時의 金屬活字 印刷는 活字를 固定시키는 技術의 制約으로 多量의 印刷를 할 때는 木版印刷보다 效率이 떨어졌지만, 적은 數量의 冊을 刊行할 때는 대단히 效率的이었다. 當時의 印刷物들은 發行 部數가 적은 境遇가 많았기 때문에 活字 印刷의 效用은 컸다.

精巧하게 加工된 大規模 印刷 木版 [ 編輯 ]

從來의 木版印刷術度 精巧하게 發達하여, 現在 海印寺 에 所藏된 大藏經板과 같은 傑作이 만들어졌다. 印刷 後 活字版을 解體하여 活字를 다시 使用하는 金屬活字 印刷와 달리 木版印刷의 境遇는 板木을 保管해 두고 必要할 때마다 印刷할 수 있는 長點이 있었으므로, 金屬活字의 作業으로 1251年에 完成된 재조대장경의 8萬 1千餘 枚에 達하는 板木은 變形이나 腐蝕 等을 防止하는 加工技術과 美麗한 板刻技術로써 製作함으로써 7百 年이 더 지난 現在에도 훌륭히 印刷를 해낼 수 있다.

佛敎를 除去하고 性理學을 普及하려던 革命家 정도전 [ 編輯 ]

高麗에서 木版 印刷術과 金屬活字 印刷術 [ 編輯 ]

高麗 後期에는 儒敎와 佛敎의 興隆에 따라 各種 書籍이 普及되었고, 이에 따라 印刷術이 發展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木版(木版) 印刷가 行하여졌는데, 只今도 남아 있는 大藏經板(大藏經版) 같은 것은 世界에 자랑할 수 있는 貴重한 佛敎 文化財이다.

木版 印刷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時代에는 金屬活字가 發明되었다. 活版(活版) 印刷는 11世紀에 北送(北宋)의 必勝(畢昇)李 처음 發明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土活字(土活字)로 世上에서 널리 使用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高麗에서 活字를 使用한 記錄으로는 高宗 21年(1234) 《 詳定古今禮文 (詳定古今禮文)》을 주자(鑄字)로 印刷했다는 記錄이 있다. 走者, 卽 金屬活字는 이보다 앞선 時代부터 使用된 것 같으며, 이것은 西洋에서 처음으로 活字가 나타난 1450年 보다 226年이나 앞서는 것이다.

小品種 大量印刷 國家 機關의 設置 [ 編輯 ]

現代의 印刷術과 달리 高麗와 朝鮮에서는 짧은 時間 안에 少量(少量), 多種(多種)의 印刷物을 얻는 目的의 印刷術이 金屬活字였고, 많은 印刷物을 얻고 싶으면 木版으로 印刷하였다. [35] 정도전 新進士大夫 의 核心 同志들을 向해 金屬活字로 冊을 印刷하기 위한 國子監 의 印刷機關 書籍鋪와 金屬活字를 만들어, 佛敎를 性理學 으로 代替하자고 提案한다. [35]

世界에서 最初로 金屬活字를 使用한 高麗는 이 試驗機(試驗期)를 거쳐, 공양왕 4年( 1392年 ) 1月에는 國家에서 書籍院(書籍院)을 設置하고 朱子와 印刷를 맡아보게 하였다. 書籍院의 設立後 不過 半年 뒤인 7月 [35] 朝鮮 이 建國되어 活字 印刷는 盛況을 이루었다. 그런데 書籍院은 金屬活字를 管掌한다 했지만, 實際 保有한 것은 木活字였다. [35]

天文學 [ 編輯 ]

400年을 이어온 宣明曆 [ 編輯 ]

考慮는 唐나라의 宣明曆 을 使用하다가 元나라의 駙馬 局으로 轉落한 以後인 충선왕 臺에 授時曆 을 使用하기 始作하였다. [36]

唐나라에서 宣明曆을 使用하기 始作한 장경 壬寅年(壬寅年) 822年으로부터 高麗 太祖가 建國한 918年까지 벌써 百年이 지나는 사이에 曆法이 差異가 나게 된다. [37] 그러나 高麗는 400年 동안 낡은 唐나라의 曆法 人 宣明曆만을 썼다. [37] 唐나라 以後 宋나라까지 걸쳐 22回의 曆法 改正이 있었다는 事實은 政治的인 壽命改除(受命改制: 天命을 받아 制度를 改革함 [38] )를 내세우기 위해서, 이름만 새 曆法이었을 뿐으로 科學的인 曆法의 發達과는 距離가 먼 것이었다. [37]

韓半島에서 日蝕과 月蝕 豫報의 始作 [ 編輯 ]

高麗 初에는 曆法이 發達하여 11世紀 初부터 日蝕 月蝕 豫報를 獨自的으로 하게 된다. 曆法의 獨自的 發達 없이는 日蝕과 月蝕의 獨自的 豫報란 期待하기 어렵다. [37] 그래서 歷史 記錄 上으로는 日食 豫報를 하지 못했다고 文宗 元年인 1047年에 처음으로 問題가 된다. [37] 그리고 高麗는 一陣 (日辰) 標示가 中國과 달라지기 始作한다.

店肆를 위한 曆法의 製作 [ 編輯 ]

只今의 基準으로 볼 때 迷信 敵人 役이었음이 분명하지만, 李縡(罹災)를 위한 特殊한 曆法으로 文宗 6年에 다섯 가지 役이 製作된다. [37] 이것들은 曆法의 發達에 起因한 高麗 天文力學子 들의 自信感 을 表現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7]

航海術 [ 編輯 ]

高麗가 圖書 地域에 設置한 烽燧 는 當時의 桶航路에 隣接한 곳에 位置하였고, 航海者가 24時間 識別할 수 있도록 낮에는 演技, 밤에는 횃불로 位置를 標示하였다. [39] 高麗 봉수는 現代 航路 表紙 基本要件을 滿足하며, 光達距離(視認性)는 約 29-39mile로 推定되고, 봉수의 광도 는 約 9,105-168,610cd로 推定할 수 있다. [39] 國家가 運營한 만큼 信賴性이 높아 安全 航海에 必須的인 航路 表紙 機能을 遂行하였다. [39] 船舶 을 利用하여 高麗를 訪問한 宋나라 使臣 徐兢은 島嶼地域의 烽燧를 利用하여 黑山島 에서 碧瀾渡 까지 航海 하였다. [39]

醫學 [ 編輯 ]

醫學은 國初부터도 重要視되어 學校에 醫學博士가 있었으며 過去에는 醫科가 設置되었다. 10世紀 말 成宗 代에 地方에 派遣된 敎育館 中에도 醫學博士가 經學博士와 함께 들어가 있었다. 또한 開京과 署經에는 일찍부터 東西大悲院(東西大悲院)李 設置되어 醫療事業과 依託할 곳이 없는 사람들의 救濟를 맡았고, 睿宗 7年에는 惠民局(惠民局)이 設置되어 百姓들에게 醫藥을 普及하는 等 國家的인 醫療事業을 施行하였다. 그러나 新羅 以來 그間의 醫術은 大槪 中國으로부터 導入된 것이어서 藥材도 大部分 輸入品이었다. 그런데 漸次 醫學이 發達함에 따라 12世紀 後半 以後에는 中國의 醫術로부터 나름의 體系를 세우려는 努力이 이루어져 醫書들이 編纂되었다.그리고 代表的인 것이 高宗 23年에 編纂된 《 鄕藥救急方 (鄕藥救急方)》이다. 이 冊은 韓國에서 編纂된 醫書 中 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鄕約은 中國에서 輸入되는 藥材인 當藥(唐藥)에 對해 土産藥材를 일컫는 말이다. 이 冊은 50餘 種에 達하는 疾病에 對해 값비싸고 求하기 어려운 輸入藥材 代身 180種의 土産 藥材들을 使用한 處方과 治療法이 세 卷으로 整理되어 있다. 이는 醫療惠澤의 範圍를 넓히는 데 重要한 役割을 하였고, 韓國 傳統醫術의 發達에 重要한 契機가 되었다.

建築 [ 編輯 ]

繁華街 宮闕과 富村 [ 編輯 ]

宮闕 滿月臺 停戰 (正殿)인 회경전은 規模도 매우 壯大한데 그 터는 높이가 5 (丈) 남짓이다. [40] 宋나라 의 複層 建物을 닮은 누 (樓觀)李 王城의 王宮이나 以外에 官道 兩쪽과 國相 , 富者 들까지도 있었다. [41] 開京의 西門인 線疑問을 들어가면 數十 家戶마다 樓閣 (樓閣)이 하나씩이 세워져 있어 使臣 이 지나가게 되면, 婦女子 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았다. [41]

一般 住宅街 [ 編輯 ]

京市司(京市司)에서 興國寺 다리에 이르는 길과 황성의 東쪽文人 光化門에서부터 奉先庫까지 行廊 [42] 數百 칸이 만들어져 있었다. [43] 그 理由는 비좁고 가지런하지 못한 百姓들의 집을 가려서 그 추레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였다. [43]

百姓 들의 住居地 는 居住하는 形勢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 개미 구멍 같았다. [44] 풍요롭고 여유로운 모습에 富裕한 집은 열에 한두 집 程度로 지붕을 多少 기와 를 덮었다. [43] 그 外에 집들은 를 베어 지붕 을 엮어 비바람을 避했다. [43]

겨울이 추웠지만 같은 것이 적어서 上流層 住宅에서는 寢牀 生活이었고, 庶民 住宅은 溫突 바닥에서 生活이었다. [45] 창우 (倡優)들이 사는 집은 긴 長대 를 세워 量갓 (良家)집과 區別하였다. [44]

商業 地域 [ 編輯 ]

都城 안에 中心 道路를 따라 이어진 行廊에는 市場 으로 向하는 을 標示하였다. [46] 그 門 안으로 五日場 等에 一定 期間을 두고 열리는 定期市가 있기도 하였기 때문에, [47] 해가 떠있는 동안에만 市場이 開設되던 露店 形態여서 거리 商店 들이 實際로 없기도 하였다. [43] 그래서 草木이 茂盛하며, 荒廢한 빈터로 整理되지 않은 땅이 있기도 했다. [46]

道路網 [ 編輯 ]

開京 의 都城圖로는 中國 等의 古代 都城과 같은 朱雀大路(朱雀大路)의 모습을 띠지 않고 地形과 守勢에 따라 格子形이 아니라 不規則한 形態였다. [48] 都城 內의 官道(官道)와 査察 參拜 道路가 서로 緊密하게 連結되었다는 點이 注目된다. [48] 그리고 國王의 書經 (西京) 및 南京 (南京)으로의 地方 巡行에 따라 幹線道路 가 크게 發達하였다. [48] 高麗時代 地方都市는 大體的으로 掘鑿하여 造成하였는데, 이는 聲討技法보다 더 쉬운 公法이었다. [49]

産業 [ 編輯 ]

農業 [ 編輯 ]

木綿의 栽培 [ 編輯 ]

恭愍王 때 元나라에 使臣으로 갔던 문익점 (文益漸)李 綿花(棉花)氏를 가져온 데서부터 始作된다. 이로써 韓國人의 衣生活(衣生活)에는 劃期的인 變化가 招來되었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온 綿花씨는 그의 丈人 정천익(鄭天益)에 依하여 栽培가 硏究되고, 씨아와 물레가 製作되어 無名(綿布)의 生産이 可能해졌다. 以後 木綿栽培의 價値가 널리 認識되기 始作하였고, 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全國 各地에 널리 普及되었다.

工業 [ 編輯 ]

火藥의 製造 [ 編輯 ]

火藥은 宋나라와 元나라에서 이미 使用하고 있었으나 高麗는 그 製造法을 모르고 있었다. 그 製造術을 最初로 習得하여 製造에 成功한 사람은 최무선 이었다. 그는 當時 高麗의 海岸 一帶를 어지럽게 하던 倭寇를 殲滅함에 있어서 火藥 의 必要性을 切感하고 元나라 에서 製造法을 배워 왔다. 이리하여 崔茂宣은 禑王 3年( 1377年 ) 王에게 建議하여 火㷁都監 (火? [50] 都監)을 設置하고 各種 火器(火器)를 만들어 火藥을 武器로 使用하게 된 것이다.화약 및 火器의 製造는 倂記(兵器)의 劃期的인 發展을 가져왔고, 倭寇 掃蕩에 이바지하였다.

參考 文獻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강민순 (2000). 《『高麗史 』에 나타난 高麗 女性의 社會的 地位》 . 《제주대학교 吏逋지터리》 (學位論文) (제주대학교 中央圖書館).  
  2. 《38回 왜 高麗人이 中國 이슬람聖地에 묻혔나》 . HD역사스페셜. KBS. 2006年 2月 24日.  
  3.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豪族의 文化〉
  4. 정서경 , 249쪽: 韓國의 茶文化가 古代를 거쳐 高麗時代에 多層的으로 發達하게 된 背景에는 民衆層의 藥用과 制度的 茶文化의 儀禮的 機能이 首班(隨伴)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華麗했던 茶文化의 歷史는 다양한 階層이 茶를 즐기고 民衆 삶의 重要한 部分을 차지하였다는 點이다. 그러나 茶文化의 株 享有階層은 大體로 權力과 密接한 關係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傳承 脈絡은 文獻資料로 남아 있는 車時 著者들의 身分 分析으로 把握할 수 있다.
  5. 정서경 , 251쪽: 茶文化 硏究에 對한 資料가 貧弱한 現實에서 比較的 厖大한 記錄物이라 고 할 수 있는 것이 此時이다. 本考에서는 系譜와 破片化된 過程이 記錄된 苦戰 飼料와 文獻을 分類?整理하고, 民俗資料를 통하여 國家 官吏集團의 車文化 政策으로서의 傳承을 分析하였다.
  6. 정서경 , 255쪽: 다시(茶時)制度는 賃金이 大臣에게 中 兄을 내릴 때 最高責任者와 함께 미리 車를 마시면서 意見을 듣고 最終 判決을 하는 意識이다. (中略) 車가 精神을 맑게 하여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判斷을 내리게 한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7. 서은미 , 40쪽:一般的으로 茶 文化는 形成과 普及의 初期過程에서 佛敎와 僧侶가 매우 重要한 役割을 遂行하였다. 그러한 狀況은 東北亞에서 普遍的이 어서 韓中日 모두가 그러한 過程을 同一하게 거쳤다. 初期 過程을 同一하게 거쳤던 韓中日에서 그 後 文化의 發展推移는 같지 않았다. 中國과 日本의 茶 文化가 持續的인 發展을 이루었던 反面에 韓國의 茶 文化는 그렇지 못하였다. 따라서 茶 文化의 衰退는 主로 韓國의 茶 文化를 論할 때 言及되는 主題이기도 하다. 韓國의 茶 文化는 佛敎가 衰退하고 王朝가 交替하면서 自然스럽게 衰退하였다고 理解되고 이에 크게 異議를 提起하지 않고 있는 것이 昨今의 狀況이다.
  8. 서은미 , 39-40쪽: 高麗의 次 消費는 王室과 査察, 그리고 文人이 그 中心에 있었던 貴族文化 의 性格을 가지고 있었다. 貴族的인 特定 集團의 消費段階를 넘어 普遍的인 消費段階로 發展하지 못했던 것은 根本的으로 國內 次 生産을 確立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中略) 茶의 生産이 王室의 徵稅와 査察經濟 範圍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限界는 如前하였지만 王朝가 安定期로 접어들면서 經濟의 發達에 따라 茶의 消費가 增大되었다. 都市를 中心으로 한 上層文化가 發達하면서 茶의 消費도 많아졌다. 結局 高麗의 次 消費와 文化는 身分的으로 地域的으로 制限的이었다.
  9. “7次 敎育課程 > 高等學校 國史 > Ⅴ. 社會 構造와 社會 生活 > 2. 中世의 社會 > [2] 百姓의 生活 모습 > 婚姻과 女性의 地位” . 《우리歷史넷》. 歷代 國史敎科書.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2日에 確認함 .  
  10. 홍민호 外 2人 , 226쪽: ?澣濯?은 高麗人의 빨래?沐浴에 關聯된 部分이다. 高麗 사람이 中國人에 對해 비웃는 地點을 漏落시키지는 않았지만, 高麗人들을 淫亂하다고 생각하는 點 또한 빼놓지 않았다.
  11. 홍민호 外 2人 , 249쪽: 이와 類似한 內容이 《魏書》 高句麗傳에 "그 風俗은 淫亂하여 歌舞를 좋아하고 밤에 男女가 무리지어 노는데 貴賤의 區別이 없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였다[其俗淫 好歌舞 夜則男女?聚而? 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라고 傳한다.
  12.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3.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1) 藝能的 內容 > 가. 處容戱”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4.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1) 藝能的 內容 > 나. 儺戱”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5.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1) 藝能的 內容 > 다. 山臺雜戱”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6.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1) 藝能的 內容 > 라. 수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7.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2) 競技的 內容 > 가. 擊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8.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2) 競技的 內容 > 나. 手搏戱”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19.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2) 競技的 內容 > 다. 各沮戱”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0.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2) 競技的 內容 > 라. 석前戱”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1.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가. 推薦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2.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나. 지연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3.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다. 호기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4.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라. 척초희·超인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5.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마. 弄환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6.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바. 장간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7.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社. 죽마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8.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3) 遊戱的 內容 > 社. 투란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29.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4) 娛樂的 內容 > 가. 危機”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30.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4) 娛樂的 內容 > 나. 投壺”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31.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4) 娛樂的 內容 > 다. 紵布희”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32. “高麗 時代 > 21卷 高麗 後期의 思想과 文化 > Ⅱ. 文化의 發達 > 9. 民俗 > 2) 民俗놀이 > (4) 娛樂的 內容 > 라. 雙六” . 《우리歷史넷》.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 2024年 3月 15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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