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 로마의 演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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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植民地 演劇의 影響 [ 編輯 ]

古代 로마의 演劇

플라우투스 들이 로마 國文學을 獨自的인 높이로 승화시키기 數百年 以前부터 이탈리아 半島의 南北에서는 갖가지 素朴한 初期 演劇的인 潮流가 흐르고 있었다.

아테네 悲劇 是認 아이스킬로스 시칠리아 의 各 都市에서 悲劇을 上演하고 自己 自身도 시칠리아의 겔라에서 死亡했다. 그 後 다시 에우리피데스 의 各 作品은 特히 歡迎을 받았던 模樣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라쿠사 의 獨裁者 디오니소스 에 이르러서는 스스로가 悲劇의 創作에 熱中했다고 하며,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 悲劇의 顯著한 流行을 斟酌할 수 있겠다.

그러나 南이탈리아 곳곳에서의 獨自的인 演劇活動은 主로 喜劇 創作과 上演에로 기울어졌다. '즐거운 悲劇(Hilarotragodia)'이라 불렸던 이 喜劇은 오래前부터 南이탈리아에 植民(植民)韓 펠로폰네소스 의 住民들이 이 땅에 가져왔던 模樣으로, 主로 敍事詩나 傳說의 英雄·美女를 荒唐無稽한 狀況에 두고, 여러 모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演技를 하게 한다는 趣向의 것이다.

紀元前 300年頃 시라쿠사의 是認 린턴 이 이를 文學的으로 整理하였다고 하나 作品은 完全히 없어져 傳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當時 시칠리아나 南이탈리아의 各地에서 사 온 缸아리 等에는 裝飾으로서 이런 種類의 演劇에 나오는 各 場面을 그린 것이 많다. 그래서 그 當時의 旺盛한 流行을 알 수 있는 同時에 詩人들이 즐겨 使用한 大食漢(大食漢) 헤라클레스 , 奸計(奸計)의 오디세우스 , 人間 以下로 그 稟性이 低劣한 諸臣들의 各 테마와 어느 極에서나 登場하는 基本的인 3-4個의 타입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윽고 '아테라나 極'의 이름으로 로마에 傳해지는 演劇의 原形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또 플라우투스 가 <癌피트루오>에서 使用했던 政經設定 等도 예로부터 이 '즐거운 悲劇'의 테마로서 즐겨 使用되어 왔다. 그러나 한便 是正(市井)의 葛藤을 다룬 劇도 있고,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메르카토르>, <아시나리兒> 等에서 볼 수 있는 한 女子를 둘러싼 父子間의 싸움이나, <아우룰라리아>의 도둑 騷動 等의 原型으로 생각되는 情景도 描寫되고 있다.

이 소란스러운 演劇은 이윽고 南이탈리아의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캄파니아 地方의 오스크인 사이에 번지며 變形한다. 브코, 막스, 道稅누스, 팝스의 네 가지 基本的 喜劇人物의 타입으로 設定되고 '아테라나 極(劇)'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普及된다. 한두 個의 병화(甁畵)에 依하면, 이에 이르러 區(舊)喜劇과 多分히 共通되고 있던 露骨的인 喜劇衣裳은 改正되고 파로스는 없어졌으며, 奴隸 等 下層人物의 衣裳도 그때까지의 것보다 若干 긴 것을 着用하게 되었다. 이것 亦是 巡廻 俳優의 一旦(一團)李 普及시키는 種類의 演劇으로서, 劇場의 樣式도 簡單하게 組立할 수 있는 木造舞臺(木造舞臺)가 使用되고, 거리의 廣場이나 或은 旣成 競技場의 오케스트라에 卽席舞臺가 만들어졌던 模樣이다.

에트루리아 演劇의 影響 [ 編輯 ]

에트루리아人의 文化는 初期 로마인의 宗敎를 비롯하여 精神生活의 各 分野에서 큰 影響을 주었으며, 처음으로 에트루리아의 藝能人들이 로마를 찾아온 것은 紀元前 364年이었다. 라틴語의 히스트리오(俳優)는 에트루리아語 (語)의 히스테르(댄서)에서, 그리고 페르소나(演技者 乃至는 假面)는 假面을 쓴 에트루리아의 댄서 페르스에서 由來된다. 이러한 音樂·춤·노래는 로마 共和國 初期의 農民들 사이에서 많이 불렸던 이른바 파스켄니시(詩) 等과 混合되어 死鬪라(혼합시)의 母胎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앞서 말한 남이탈리아에서의 喜劇이 오스크인(人)을 통해 로마에도 普及되고, 로마인의 趣向을 誘發시켜 로마 演劇이 擡頭하는 直接·間接的 契機가 되었던 것이다.

共和制 時代의 로마演劇 [ 編輯 ]

로마에서의 演劇創作의 움직임은 紀元前 3世紀 後半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의 그리스극 飜譯에서 始作된다. 紀元前 240年부터 207年에 걸쳐 소포클레스 , 에우리피데스 , 메난드로스 의 作品을 잇따라 라틴語로 飜譯·上演했으며, 이와 함께 南이탈리아의 喜劇 테마를 改良한 2-3個의 作品도 上演했던 模樣이다. 이러한 作品의 大部分은 登場人物이 그리스人이며 衣裳 또한 그리스風이기 때문에 '그리스 옷차림의 演劇(Fabula palliata)'이라고 불리었으나, 結局 이와 竝存하여 <爐몰로스> 等 로마 固有의 英雄 小說을 테마로 한 劇作이 나에비우스 에 依해 著述되었으며, 로마 貴族의 衣裳을 使用한 때문에 파불라 프라에텍스타타(Fabula Praetextata)라 불리고, 또 로마의 市民生活을 模倣한 喜劇도 登場人物이 로마인의 土價를 着用했기 때문에 파불라土價打(Fabula Togata)라는 이름으로 區別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作品은 모두 喪失되고 겨우 傳해지는 劇作品의 除名이나 引用短篇, 또한 當時의 徒弟 人形俳優 等에서 片鱗(片鱗)을 엿볼 수 있음에 不過하다.

共和制 時期의 로마에서는 演劇은 1年 中 일정한 國家의 祝祭日에 안察觀(按察官)의 減毒下에 開催되었으나 次次 그 頻度가 늘어만 갔다. 가장 오래되고 盛大한 '로마인의 祝祭', 紀元前 220年부터의 '民衆의 祝祭', 紀元前 212年부터의 '아폴로 祝祭', 紀元前 194年의 '큐베레 祝祭' 等 해를 거듭하면서 演劇祭의 數는 늘어가고, 紀元前 200年頃에는 1年에 10餘 일밖에 演劇이 上演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治世下에선 國家가 指定한 上演일이 40餘 일이나 되어 있었다. 또한 그 밖의 定例·改善 等이 있을 때마다 特別 上演이 있었던 模樣이다.

로마의 悲劇 [ 編輯 ]

新喜劇 이 着實하게 로마의 觀客을 魅惑시키고 있을 무렵에 아테네의 3大 悲劇作家의 여러 作品도 엔니우스 (Ennius, B.C. 239-B.C.169), 파쿠非우스 (Pac­uvius, B.C. 220-B.C. 130景), 아키우스 (Accius, B.C.170-B.C.86景) 等의 손으로 라틴語로 改作되고 있었다.

이러한 劇作家들의 作品은 거의 全部 없어져버려 겨우 作品의 이름과 引用에 依한 短篇(斷片)만이 傳해질 뿐이나 에우리피데스 의 여러 作品을 模倣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原作과 比較하면 若干의 短篇에서이긴 하나 誇張되고 修辭的(修辭的)인 臺詞가 두드러지며 또한 그들이 즐겨 使用한 테마는 걸핏하면 피비린내나는 刺戟的인 制裁가 많았던 模樣이다. 뒤에 호라티우스 는 悲劇作家 志望者들을 訓戒하면서 그리스의 大詩人들이 말하고자 한 바를 잘 배우고 竊盜와 均衡이 잡힌 作品을 쓰도록 타이른 바 있으나 그 忠告도 헛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飜譯 始球(詩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그로테스크한 課長은 當時의 彫刻이나 壁畫에 그려진 悲劇假面이나 俳優의 衣裳에서도 볼 수 있다. 巨大한 눈과 입, 높다랗게 맨 머리, 그것에 어울리도록 큼직한 패드를 넣은 衣裳, 그리고 키를 돋보이게 한 굽이 높은 신발 等은 이 時代에 와서 最高度로 發展했던 模樣이다. 이와 같은 衣裳을 걸친 俳優가 그 修辭的인 大使를 朗朗하게 읊을 때 얼마나 莊重한 雰圍氣를 傳達할 수 있었는지 或은 生氣를 잃은 鈍重한 重壓感으로 始終(始終)하였는지에 對해서는 充分한 資料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분명치 않으나, 로마의 觀客은 이보다 오히려 假面이 없는 寸劇(寸劇)이나 舞踊 乃至는 曲藝 等을 歡迎했던 模樣이다.

그 동안에 또한 劇場 그 自體의 構造도 그리스의 告傳旗(古典期) 乃至 헬레니즘 의 樣式과는 顯著하게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南이탈리아의 區(舊) 그리스 植民 都市에서는 옛時代의 劇場이 喜劇을 上演했으나 로마에서는 아직도 常設的인 劇場이 없었으며, 競技場이나 거리의 廣場에 假設舞臺를 設置하여 觀客을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共和制 末期가 됨에 따라 그리스風 劇場의 바탕 위에 로마 固有의 條件에 적합한 것을 만들어 냈다.

두세 個의 重要한 變更을 든다면 完全한 원(圓)이었던 오케스트라는 半圓(半圓)李 되고, 舞臺와 오케스트라가 한 建造物에 包含되었다. 그리고 後者의 舞臺는 그 面積이 넓어지는 한便 일찍이 合唱隊가 차지했던 오케스트라는 近世의 오페라 劇場과 마찬가지로 貴賓席으로 變해버렸다. 舞臺의 背景은 室內의 壁面처럼 伴奏(半柱)나 그림·彫刻으로 裝飾되고, 호화로운 裝飾的 雰圍氣를 지니는 境遇도 있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丘陵地의 傾斜面을 利用하여 設置하는 것이 常禮였으며, 劇場은 聖域化(聖域化)되었으나 로마에서는 平地에 지은 콜로세움上(狀)의 것이 많고, 그 外面은 朱悅(柱列)이나 彫刻 等으로 호화롭게 裝飾되어 있고, 內部의 座席도 身分이나 階級의 上下에 따라 儼然히 區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高度의 文學 作品을 鑑賞하는 곳이었던 劇場은 로마에서는 모든 것을 구경시켜 주는 觀覽場이며 文藝作品의 上演은 그 一部에 不過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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