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고경명
別名 字는 이순(而順), 號는 제봉(霽峰)·태헌(苔軒)·太史(苔?), 諡號는 忠烈(忠烈).
出生日 1533年 11月 30日
出生地 朝鮮 全羅道 광주목 壓步村
死亡日 1592年 7月 10日 ( 1592-07-10 ) (58歲)
死亡地 朝鮮 全羅道 錦山郡 와은평 벌판
國籍 朝鮮
學歷 1558年 式年試 文科 甲과 1位(장원).
經歷 文身, 政治人, 作家, 義兵將
本館 長興 (長興)
父母 고맹영(簿)
配偶者 金氏 夫人
子女 고종후 , 고인후 , 高준후, 高旬後, 고유후, 고용후, 딸 盧氏 婦人과 安氏 否認
宗敎 儒敎 ( 性理學 )

고경명 (?敬命, 1533年 11月 30日 ~ 1592年 7月 10日 )은 朝鮮 中期의 文臣· 義兵將 이다. 字는 이순(而順), 號는 제봉(霽峰) 또는 制俸(霽峯)·태헌(苔軒)·太史(苔?), 本貫은 長興 (長興)이며, 諡號는 忠烈(忠烈)이다. [1] 1592年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全羅左道 義兵大將으로 活躍하다 錦山 戰鬪에서 殉國하였다. 그의 生前에는 1591年 (宣祖 24) 광국 原從功臣 1等에 特別히 책록되었고, 死後에는 義兵將으로 活動한 功勞로 1605年 (宣祖 38) 宣撫 原從功臣 1等에 追敍되었다. 백인걸 의 文人이다.

1552年(明宗7) 進士試에 合格하고 1558年 式年 文科 에 壯元으로 及第하여 官職에 나갔다. 1563年 明宗 인순왕후 의 親庭 外三寸인 吏曹判書 이량 (李樑)과 그 一派의 專橫을 삼사에서 論할 때 敎理(校理)로서 參席하였다가, 論議를 丈人 김백균 을 거쳐서 이量에게 알려주었다가 發覺되어 蔚山 郡守 로 左遷당하고 곧 罷免되었다. 1581年에 起用되어 明나라에 使臣으로 다녀왔다. 1591年 東來府使로 있다가 西人 이 逐出될 때 辭職하고 落鄕했다. 1592年 (宣祖 25) 4月 壬辰倭亂 이 터지자 潭陽 에서 6,000餘 名의 義兵을 모아 倭軍과 交戰하였다. 全州, 恩津을 거쳐 錦山에서 倭軍과 交戰하던 中, 그해 7月 全州, 흥덕에서 追加로 온 倭軍과 相對하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뒤쫓아온 倭軍의 칼에 맞아 戰死하였다. 바로 그의 아들 고인후(高因厚) 亦是 남은 義兵과 함께 戰死하였다.

倭亂 後 湖南 儒生들이 세운 포충사 (光州廣域市 記念物 第7號)에서 高敬命과 그의 두 아들 從厚, 인후 그리고 유팽로, 晏嬰의 殉節을 함께 기리고 있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1533年 光州 壓步村(鴨保村) [2] 에서 大司諫 고맹영 과 成均館眞사 서걸의 딸 남평徐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孤雲은 조광조 와 親하게 지냈다는 理由로 承義郞, 刑曹佐郞 等을 지냈으나 1519年 己卯士禍 로 官爵을 삭탈당하고 故鄕에 내려와 餘生을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聖人과 같아서 백인걸 이 唯獨 그를 稱讚하고 아꼈다.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勤務할 때 그를 처음 본 백인걸 은 그가 凡常치 않은 아이임을 알고 그를 아꼈다. 백인걸 의 門下에서 詩書와 傾斜 等을 修學하였다.

그는 젊어서 해서, 黃海道에 갔다가 한 妓生을 데려오려 했으나 끝내 데려오지 못했다. 그는 妓生의 치마幅에 詩를 남겨주고 떠났는데 "江머리에 말을 세워 離別 슬퍼 遲滯하니, 높은 버들가지만큼 미운 마음 이區구나, 美人은 情이 엷어 새 사람에 마음 두나, 사나이는 情이 깊어 뒷날 期約 다짐하네. 복사꽃 떨어지는 이 좋은 寒食철에, 鷓鴣새 黃昏時에 날아갔다 날아오네. 南浦의 풀 우거지고 봄 물결은 출렁이니, 마름꽃에 情을 담아 꺾어가서 두리로다."라고 하였다. 뒤에 새로 온 黃海道 觀察使가 妓生의 치마에 쓰인 詩를 읽고 詩才를 感歎하고, 그 事緣을 물어보았다. 나중에 監査가 고맹영을 만나자 當身 아들 고경명은 재주와 얼굴이 뛰어났지만, 行動에는 좋지 않은 面이 있다며 비꼬았다. 그러자 고맹영은 自己 아들의 모습은 제 어미를 닮았지만 行動은 나를 꼭 닮았다며 웃자 觀察使도 함께 웃었다 한다. 현호瑣談에 실린 內容으로 여기에 그가 지었다는 詩 1首가 傳言 收錄되어 있다.

1552年 (明宗 7年) 進士試와 生員試 2等(二等) 18位(23/100)에 同時 入格하여 進士가 되었고, 進士試에는 1等(一等) 4位(4/100)으로 合格했다. 1558年 (明宗 13年) 明宗 成均館 에 儒生들을 試驗할 때 首席을 차지하여 바로 直赴殿試에 命을 받았다.

科擧 及第 以後 [ 編輯 ]

1558年 (明宗 13年) 바로 戰時에 應試하여 式年試 文科에 甲과 1位로 壯元及第하고, 成均館戰績에 任命되고, 이어서 戶曹佐郞이 되었다가 다시 共助佐郞이 되었다. 이어 刑曹佐郞·司諫院正言 等을 歷任했다. 1559年(明宗 14) 世子侍講院史書에 任命되고, 1560年(明宗 15) 봄 司諫院 正言이 되었다가 刑曹佐郞을 거쳐, 兵曹佐郞 知製敎에 任命되었다가 湖堂(湖堂)에 들어 賜暇讀書(賜暇讀書)를 받았다.

1561年 봄 司諫院獻納이 된 뒤 司憲府地平, 弘文館의 副修撰·副校理를 거쳐 다시 司諫院獻納으로 任命되었다가 그해 가을 弘文館副修撰을 거쳐 暗行御史로 平安道를 다녀왔다. 그해 겨울 副校理를 거쳐 1562年 (明宗 17) 봄에 病으로 成均館 前戰績에서 蔚山郡守로 左遷되었다. 1563年 敎理가 되었다. 1563年 (明宗 18年) 인순왕후 의 外叔인 吏曹判書 이량 의 專橫을 論할 때 敎理(校理)로서 이에 參與하여 이量을 攻擊하였지만 丈人 김백균 인순왕후 의 外三寸 이량 에 무슨 일인지 坐罪되어 蔚山 郡守가 되고만다. 그해 11月 司憲府가 그를 彈劾한다.

蔚山 郡守 고경명(어려서부터 재주가 있다는 이름이 있더니 일찍 外科(巍科)에 올랐으나 浮薄하고 허황되고 교만하고 俠氣(俠氣)가 있었다. 그 아비 고맹영, 丈人 김백균과 함께 李孃을 섬겨 請現職(淸顯職)을 얻었다.)은 앞서 間人들을 除去하던 날에 玉堂(玉堂)에 있으면서 臺의(大議)에 參與하였으니 宜當 操心하여 漏泄하지 않았어야 할 터인데 마음씀이 反復 無償(反覆無狀)하여 匠人 김백균 에게 隱密히 便紙를 보내어( 諺文 으로 便紙를 써서 보냈으니 더욱 奸邪하다.) 移讓 에게 傳하도록 하였으니 至極히 奸譎(奸譎)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官爵을 保存하고 있으므로 物情이 憤慨하고 있습니다. 罷職하고 敍用夏至 마소서. [3]

司憲府 의 彈劾을 明宗 이 承認, 곧 罷職되었다. 얼마 뒤 蔚山郡守로 左遷되었지만 다시 罷職되었다. 그는 壯元及第子인데다가 임금의 信任을 받아 昇級이 빠르子, 이것이 同僚들의 時期, 不平感이 되기도 했다.

復職과 官僚 生活 [ 編輯 ]

1571年 (宣祖 4年) 宣祖 가 그의 才能을 아깝게 여겨 敍用하려 하였으나 士林派 言官들의 猛烈한 反對로 霧散되었다. 1581年 (宣祖 14年) 同人 의 反對를 견뎌내고 復職, 그해에 靈巖 郡守로 再登用되고 이어서 明나라 公式 記錄에 李成桂 이인임 의 아들로 記錄된 것을 바꾸는, 宗契 변무 奏請使(宗系辨誣奏請使)가 明나라 에 派遣될때, 김계휘 의 推薦을 받아 抃舞 州廳舍의 書狀官으로 任命되어 年庚 에 다녀왔다. 그는 勳舊派 의 子弟라는 誹謗에도 不拘하고 栗谷 李珥 가 그의 能力을 認定해주어 拔擢함으로써 官職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때 그는 成均館直講 兼 司憲府地平의 職責에 任命되어 明나라를 다녀왔다.

1582年 (宣祖 15年) 瑞山 郡守 로 前任 되었는데, 名士遠接使에 任命된 李珥의 薦擧로 그 從事官(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宗簿寺 僉正에 任命되었다. 그뒤 司贍寺 僉正이 되었으며 使臣으로 만난 明나라 使臣들과 詩文을 주고 받았다. 1583年 漢城府 [[庶尹]李 되었다가 閑散郡守를 거쳐 그해 말 文翰(文翰)으로 推薦되어 禮曹 正郞 에 任命되었으나 赴任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光州의 집으로 落鄕했다. 1584年 (宣祖 17年) 宗簿寺 僉正에 任命되었다가, 이 해 司僕寺 僉正이 된 뒤 그해 말 成均館 社例를 거쳐 1585年 (宣祖 18) 軍資監 정이 되었으나 病을 理由로 辭職하였다. 그 해 淳昌郡守로 赴任했다가, 在職 中 傳染病에 걸려 昏睡狀態에 빠졌다가 며칠만에 奇跡的으로 깨어났다. 유몽인 於于野談 에 依하면 이때 그는 저승使者에게 끌려갔다가 다른 私子가 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한다. 얼마 뒤 巫俗人의 굿 소리를 듣고는 獅子를 데리고 巫俗人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저승使者에게 술이 醉하도록 먹인 뒤 깨어났다 한다. 淳昌郡守로 在職 中 1588年 罷職되었다.

1590年 (宣祖 23) 承文院板橋로 다시 登用되었다. 그해 여름 內贍寺 정이 되고, 代身들의 推薦을 받아 다시 承文院판교가 되어 知製敎 兼 春秋館 編修官職을 兼職했다. 이때 名望家들이 그를 自身의 便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그는 辭讓하고 물러나 있었다. 1590年 가을 通政大夫로 昇進하여 東來府使로 發令되었다.

壬辰倭亂과 最後 [ 編輯 ]

1591年 (宣祖 24) 봄 東來 府使로 있다가 宗系辨誣가 成事되자 그는 광국 原從功臣 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여름 西人 이 除去될 때 同人 이 坐像(左相) 鄭澈 (鄭澈)을 論罪(論罪)하며, 그를 指目하여 鄭澈 (鄭澈)의 推薦을 받은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辭職하고 말을 타고 故鄕으로 돌아왔다. 1592年 (宣祖 25) 初, 그는 어느날 하늘의 별을 보고 異變이 發生할 것을 豫想하였다. 그 해 4月 壬辰倭亂 이 일어나고 倭軍의 漢城 占領 消息 및 宣祖가 義州로 避難갔다는 消息을 듣고 潭陽 에서 義兵을 일으켰다. 全羅道 觀察使 李珖(李洸)과 光州牧使 權慄 等이 이끄는 官軍 5萬 名이 數千 名의 倭軍에게 龍仁 等地에서 慘敗하자 그는 檄文을 돌려 6千餘 名의 義兵을 募集했다. 5月 29日에 같이 義兵을 일으킨 양대박(梁大樸), 光陽 玉과 出身으로 成均館學諭를 지냈던 유팽로(柳彭老) 等이 그를 義兵將으로 推戴하고, 양대박은 全州로 가서 2千 名의 義兵을 募集했다.

1592年 6月 1日 에 潭陽을 出發하여 北上을 始作, 6月 13日 全州로 가서 아들 고종후 (高從厚)에게 嶺南에서 올라오는 倭軍을 막게 하였다. 22日 忠淸道 여산(礪山)을 거쳐 27日 恩津(恩津)으로 移動했다. 倭軍이 錦山을 占領하고 漸次 湖南에 侵入할 것이라는 情報를 入手하자 演算(連山)으로 移動하였다. 그런데 全羅道 光州 長興 等에서 募集한 6千餘 名의 義兵을 이끌고 賃金을 지키러 義州로 가던 中 電柱에서 軍士를 整頓하여 말머리를 돌려 금산으로 갔다. 日本軍이 錦山에서 錦山 官軍과 義兵을 전멸시키고 郡守도 戰死한 狀態였다. 그는 錦山 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兵力을 再整備하고, 錦山 에 集結하고 있던 倭軍과 싸우다가 아들 權知成均館學諭 고인후 (高因厚)와 함께 戰死하였다.

錦山의 城郭이 튼튼해서 陷落이 어렵자 그는 防禦使와 함께 軍士를 움직여 8百餘名의 騎兵을 이끌고 攻擊했다. 그러나 中間에 곽영의 部下將帥 김성헌 等이 逃亡갔다. 錦山의 日本軍은 光州, 흥덕에서 追加로 올라온 日本軍과 合勢하였다. 그해 7月 10日 그는 와은평(臥隱坪) 一帶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倭軍과 싸우던 中 고경명은 에서 落馬, 떨어졌다. 바로 晏嬰과 유팽로가 말에서 내려와 그를 부축했지만 뒤쫓아온 日本軍의 칼에 모두 베어 모두 죽었다. 性에 있던 아들 고인후 亦是 義兵들과 함께 戰死한다. 그의 屍身은 바로 收拾되지 못하고, 죽은지 40餘 日 만에 찾아냈는데, 여러番 여름비를 겪었으나 屍身이 썩지 않고 살 色이 山사람 같아서 보는자가 모두 異常하게 여겼다. 當時 享年 59歲였다.

事後 [ 編輯 ]

그해 10月 全羅南道 和順縣 黑土坪(黑土坪) 언덕에 埋葬했다가 1609年 (光海君 1) 3月 9日 全羅南道 장성현 오동리(現, 長城郡 장성읍 영천리 430-2番地)로 이장하였다. 바로 宣祖 의 王命으로 贈職 되어 增 資憲大夫 禮曹判書 (贈資憲大夫 禮曹判書) 兼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競演 春秋館 成均館 社(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에 追贈 되었다. 아들 고유후는 그의 3年喪을 하던 中 病이 들어 脫喪 後 1年만에 死亡했다. 한便 그의 아들 中 살아남은 고순後는 1591年에 司馬試에 合格했는데, 그가 殉國한 일로 特別採用되어 司憲府 監察을 지냈다.

다른 아들 고종후 亦是 喪中에 起伏하여 다시 義兵을 이끌고 晉州城 에서 싸우다가, 敗하고 江물에 投身하여 自決했다. 高從厚는 承政院都承旨에 追贈되었다.

이때 巡察使는 전일의 嫌疑를 가지고 어두운 밤에 行軍하다가 軍士가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니냐며 疑心했지만, 後任 巡察使로 赴任한 李霆嚴(李廷?)李 再調査하여 그의 死亡 情況을 確認하였다. 1595年 (宣祖 28) 여름 王命으로 靜慮 되어 正門이 세워졌으며, 1601年 에는 門下生인 司憲府監察 박지효와 儒林 等의 名義로 祠宇를 지어주도록 上疏를 하였으나 實現되지 못하고, 집안, 儒林 等의 도움으로 光州에 社友를 세우고, 1603年 에 朝廷에서 砲忠이란 賜額만 내려졌다.

뒤에 다시 增 議政府左贊成(議政府左贊成)에 追贈되고, 1605 年(宣祖 38) 宣撫原從功臣 1等에 錄勳(錄勳)되었다. 光州의 포충사(褒忠祠), 錦山의 聲曲서원(星谷書院) 및 종용사 (從容祠), 淳昌의 火山서원(花山書院)에 配享되었다. 諡號는 忠烈(忠烈)이다. 詩,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著書에는 《제봉집 (霽峰集)》,《서석록 瑞石錄》, 《유서석록 遊瑞石錄》 等이 있다.

家族關係 [ 編輯 ]

  • 曾祖父 : 高自檢(高自儉)
    • 할아버지 : 고운(高雲)
      • 아버지 : 고맹영(高孟英)
      • 어머니 : 남평 徐氏 , 서걸(徐傑)의 딸
        • 否認 : 蔚山 金氏 , 김백균(金百筠)의 딸
          • 長男 : 고종후 (高從厚), 號 峻峯(?峰), 시호 孝烈(孝烈)
            • 孫子 : 高부립(高傅立)
            • 孫子 : 고부언(高傅言)
          • 次男 : 고인후 (高因厚), 號 鶴峯(鶴峯), 시호 義烈(毅烈)
            • 孫子 : 고부림(高傅霖)
            • 孫子 : 고부천(高傅川), 文科 及第
            • 孫子 : 古阜집(高傅楫)
            • 孫子 : 고부량(高傅良)
          • 三南 : 高준후(高遵厚), 요사(夭死)
          • 사남 : 高旬後(高循厚), 號 정헌(靜軒), 司憲府 監察
          • 오남 : 고유후(高由厚), 號 廳舍(晴沙), 判決事
          • 肉男 : 고용후(高用厚), 態인 縣監
          • 딸 盧氏 婦人과 安氏 否認
          • 長女 : 光州 朴氏 , 박숙(朴?)에게 出家
            • 外孫子 : 朴蟲廉(朴忠)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제봉집》
  • 《서석록 瑞石錄》
  • 《유서석록 遊瑞石錄》

作品 [ 編輯 ]

  • 고경명簡札

受賞 經歷 [ 編輯 ]

기타 [ 編輯 ]

月定 윤근수 (尹根壽)는 그가 詩를 잘 짓는다 하였다. 그의 詩文 中 몇篇이 現代까지 傳해진다.

關聯人物 및 事件 [ 編輯 ]

關聯 文化財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33_1_0000386
  2. 大韓民國 光州 南區 대촌면 壓村마을
  3. 明宗實錄 29卷, 明宗 18年(1563 癸亥 / 名 家庭(嘉靖) 42年) 11月 6日(紳士) 2番째記事 "憲府에서 蔚山 郡守 高敬命의 罷職을 請하다"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