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丙琪 (189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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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琪
李秉岐
大韓民國의 國防部 政訓局 戰史編纂委員長
任期 1950年 10月 1日 ~ 1954年 10月 2日
大統領 李承晩
長官 신성모 國防部 長官
장경근 國防部 長官 職務代理
이기붕 國防部 長官
신태영 國防部 長官
손원일 國防部 長官

이름
別名 號(號)는 嘉藍(嘉藍)
身上情報
出生日 1891年 3月 5日 ( 1891-03-05 )
出生地 朝鮮 全羅道 益山
死亡日 1968年 11月 29日 ( 1968-11-29 ) (77歲)
死亡地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學歷 한성사범학교 卒業
經歷 時調 詩人 兼 國文學者 및 大學 敎授
新聞學院 感謝
正當 無所屬
宗敎 儒敎 ( 性理學 ) → 大倧敎

李丙琪 (李秉岐, 1891年 3月 5日 1968年 11月 29日 )는 大韓民國 時調 作家 兼 國文學者이다. 本貫은 沿岸 (延安)이고 號는 嘉藍(嘉藍)이며 全羅北道 益山 에서 出生하였다.

生涯 [ 編輯 ]

한성사범학교 를 나와 京城 휘문高等普通學校 에서 敎鞭을 잡으면서 많은 時調를 發表하였다. 1926年 時調 復興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時調란 무엇인가》를 發表한 後부터 現代的 感覺을 띤 새로운 時調를 짓기 始作하였다. 1939年 《嘉藍 時調集》을 發刊하였으며, 또한 文獻學者로서 숨어 있던 많은 古典을 學界에 紹介하였다. 光復 後에는 韓民族 의 古典 文學을 現代語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文理大 學長· 서울大學校 講師· 중앙대학교 敎授 等을 지냈다.

韓國戰爭時 行跡 [ 編輯 ]

1950年 6月 28日 人民軍이 서울대에 進入할 때 '人民軍의 서울 入城을 眞心으로 歡迎한다'는 大型 플래카드를 손수 正門에 내걸고 直接 歡迎을 나갔다는 證言이 있다. 國軍의 서울 收復 後 左翼學生과 김삼불 , 이명선 等과의 親分으로 困境에 處하여, 故鄕 全北으로 落鄕해 全州 명륜臺, 全北戰時聯合臺, 전북대 敎授로 展示를 보냈다. 1950年 10月부터 1954年까지 國防部 政訓局 戰史編纂委員會의 委員長으로 勤務하였다. [1]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咀嚼 [ 編輯 ]

  • 著書 《國文學 開設》, 《國文學 戰서》 等
  • 代表作 《初》, 《별》, 《냉이꽃》 等

關聯 文化財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성칠 , 歷史 앞에서, 創批, 1993年 [ 쪽 番號 必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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