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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光武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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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世祖 光武皇帝 有數
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광무황제 유수 부분
廉立本의 帝王歷代道權 中 光武皇帝 有數 部分
第1代 厚한 皇帝
在位 25年 ~ 57年
前任 한 輕視第
後任 命題
이름
有數(劉秀)
身上情報
父親 남돈群
母親 番否認
配偶者 肺皇后 郭氏
광렬皇后

한 世祖 光武皇帝 有數 (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紀元前 6年 ~ 57年 )는 中國 後漢 의 初代 皇帝로, 뛰어난 軍裁와 統治力으로 洋韓交替期 中國 大陸의 混亂期를 모두 平定하고 한 王朝의 腹壁 을 이뤄낸 君主이다. 中國 歷史에서 손꼽히는 聖君으로, 諡號인 '光武'는 한 王朝를 中興시켰다는 뜻에서 「光(光)」, 禍亂을 平定하였다는 뜻에서 「無(武)」의 文字를 使用한 것이다. [1]

傳한 의 初代 皇帝 高弟 의 二孫子(9世孫)로, 兒名 號(呼) , [2] 문숙 (文叔)이며 남양군 채양현(蔡陽縣) 사람이다.

生涯 [ 編輯 ]

出生 [ 編輯 ]

傳한 經濟 의 아들인 張師政王 誘發 의 내손(5세손)으로, 남敦寧(南頓令)으로 남돈軍에 追贈된 劉歆 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몹시 신중하고 차분한 性格으로, "벼슬을 한다면 執金吾 [3] , 아내를 얻는다면 陰呂火(陰麗華) [4] " [仕官當至執金吾, 娶妻當得陰麗華] 라는 程度의 希望을 이야기하고 다니던 平凡한 宗室의 한 사람이었다.

적美軍과 綠林群 [ 編輯 ]

王莽이 簒奪을 통해 申 王朝를 세우고, (周) 時代의 政治를 理想으로 삼아 現實을 度外視한 政策을 實施하는 等 民心을 잃고, 全國 各地에서 叛亂이 일어나 匈奴 · 西江 (西羌)· 高句麗 等 周邊 國家와 民族들의 反感을 사기에 이른다.

薦奉 元年( 14 ), 낭야 에서 女帽(呂母)라는 老婆가 縣令에게 殺害된 아들의 復讐를 위해 私財를 털어 數千의 무리를 모아 叛亂을 일으켰다. 呂某는 縣令을 죽인 뒤에 死亡했는데, 一旦 모여든 軍勢는 苛酷한 法에 무거운 租稅를 理由로 解散하지 않았고, 薦奉 5年( 18 ) 同鄕 사람인 蠜螽(樊宗)의 擧兵에 合流해 巨大한 勢力을 이룬다. 이들 軍은 彼我 識別을 위해 눈썹을 붉게 漆하여 적美軍 (赤眉軍)이라고 불렸다. 王莽 朝廷의 軍事였던 太史群(太師軍)·輕視群(更始軍)은 無理한 食糧 徵發 等으로 民心을 잃어, 當時에는 「차라리 敵美軍을 만날 망정 太史軍과는 만나지 말고, 太史를 만나지 않더라도 輕視軍이 모두 죽일 것이다(寧逢赤眉, 不逢太師 [5] . 太師尙可, 更始殺我.)」라고 揶揄했다고 한다. [6] 또한 같은 時期에 왕광 (王匡) [7] 이 貧民들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을 據點으로 反逆을 일으켰다. 이들을 綠林群 (綠林軍)이라고 한다.

地黃 3年( 22 ) 겨울, 兄 誘引 (劉縯)李 擧兵하였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兵士가 잘 모이지 않았지만, 신중한 性格에 評判도 좋던 동생 有數가 合流하자 有數의 判斷을 믿고 叛亂에 參加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 叛亂軍은 龍陵軍(?陵軍)이라 稱했다. 타고 다닐 말도 求하지 못할 程度로 가난했던 有數는 叛亂 指揮에 소를 타고 다녔으며, 綠林軍에 合流한 뒤에야 조정군으로부터 鹵獲한 말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綠林軍은 軍內에 疫病이 蔓延하면서 南陽 을 據點으로 하는 신시군(新市軍)과 南軍 을 據點으로 하는 下降軍(下江軍)으로 나뉘었다. 신시군은 南陽의 豪族이었던 評林群(平林軍, 여기에는 有數의 本家 血統인 유현 (劉玄)李 加勢했다)이나 誘引의 龍陵軍과 聯合하였는데, 나중에 이들이 다시 下降君을 吸收하고 誘引은 陸揚(?陽)에서 官軍을 擊破했다. 聯合軍이 完成(宛城)을 包圍한 뒤, 새로운 皇帝를 擁立하고자 綠林君의 部長들은 協議를 벌였다. 下姜君과 南陽 豪族을 中心으로 誘引을 擁立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實績이 있는 有能한 人物을 擁立하면 그들의 勢力이 弱化될 것을 두려워한 評林軍과 신시군의 部長들은 이를 棄却하고, 平凡한 人物로 여겨지던 遊絃을 擁立하였다( 輕視第 ).

輕視 元年( 23 ) 여름, 輕視第 討伐을 計劃한 汪茫은 洛陽(洛陽)에서 百萬(戰鬪兵 42萬, 나머지는 水松餠)이라는 大軍을 出陣시켰다. 그러나 汪茫은 軍事 知識이나 經驗이 不足했고, 조정군은 63파나 되는 兵法家(兵法家)를 同行시키면서 猛獸를 거느리는 等의 어긋난 偏在로 이루어져 있었다. 王莽軍은 有數가 據點으로 삼고 있던 곤陽性(昆陽城)을 包圍 攻擊하지만, 有數는 밤을 틈타 13欺瞞을 거느리고 곤陽性을 脫出해, 가까운 縣에서 3千의 援軍을 모아 昆陽을 包圍한 軍士와 맞섰다. 王莽軍은 總大將 備盡後(丕進侯) 王審(王尋)李 數千 名을 거느리고 邀擊했지만 流水와 그 部下들의 奮鬪로 大敗하였다(곤양 戰鬪). 昆陽에서의 勝利를 전후해 有數의 刑 有人島 完成(宛城)을 陷落시켰다. 이렇게 되어 誘引·有數 兄弟의 名聲은 天下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의 名聲이 높아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輕視制는 두 사람에 對한 牽制에 나섰다. 앞서 輕視制의 卽位에 反對했던 誘引의 部下이자 親戚인 有職(劉稷)李 輕視提議 벼슬을 辭讓하자 輕視制는 그를 反逆으로 몰아 죽이려 했고, 誘引이 이에 部下인 有職을 擁護하고 나서자 輕視制는 이를 트집잡아 誘引을 處刑했다. 이 事件에 즈음해 有數는 完成에 到着하여 警時祭에게 兄의 缺禮를 謝過하고, 兄을 위해 喪服도 입지 않았으며 弔問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事件에 對해서는 一切 言及하지 않는 等 自身도 災殃에 휘말리는 일이 없게 하려 애썼다.

昆陽(昆陽)과 완(宛)에서의 傳承이 알려지자 그때까지 狀況을 觀望하던 豪族들이 次例대로 輕視制의 軍에 合流했고, 短期間에 一帶 勢力으로 成長한 輕視制의 軍士는 落陽과 長安 을 陷落시키고 이곳으로 遷都하였다. 洛陽이 都城(都城)으로 定해질 때까지 有數는 輕視制와 側近들로부터 危險人物로 指目되어 中央 政界에 나서지 못했으나, 當時 寄主와 演奏 等의 黃河 以北으로 派遣할 마땅한 武裝도 없었을 뿐더러 大使도 類似 (劉賜)가 「여러 집안의 子弟로서 문숙(留數)李 쓸 만 하다(諸家子獨有文叔可用)」 [8] 고 推薦하면서 有數는 河北 赴任을 命받고, 流水에 對한 監視도 풀렸다.

以後 輕視制의 政治가 紊亂해져 民心을 잃게 되자 有數에게도 自立의 機會가 주어지게 되었다.

輕視 元年( 23 ) 겨울, 有數는 河北으로 向했다. 河北에서 有數가 한段 을 떠나 北上할 무렵, 한段에서 왕랑 (王郞)이라는 自家 성제 의 숨겨진 아들인 유자여(劉子輿)라고 稱하고 儒林 (劉林), 이육(李育) 等과 함께 擧兵하여, 有數의 목에 10萬 好意 賞金을 걸고 數倍에 나섰다. 有數는 등우 (鄧禹), 왕패(王覇), 風이 (馮異) 等의 가까운 部下를 거느리고 河北을 떠돌게 되었다. 그것은 苦難의 行軍으로, 猛추위까지 겹쳐 風이가 가까스로 땔감을 모으고 등우가 가져다 불을 지펴 콩粥이나 보리밥으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딜 程度였다고 한다.

그 뒤에는 왕랑에 맞서 有數의 庇護를 要求한 信徒 태수 임광(任光)과 그 麾下의 이충(李忠)과 만수 (萬脩), 華城郡(和成郡)의 태수 非융(??) 等이 流水를 불러들였고, 地方 豪族이던 侑食(劉植), 경순(耿純)도 陣營에 加擔했다. 이로서 임광, 이충, 만수, 非융, 侑食, 경순은 後代에 운대 28章(雲臺二十八將)으로 불리게 되었다. 有數는 왕랑의 部下로 10萬餘 名의 兵士를 거느리고 있던 鎭靜王(眞定王) 유양 (劉楊)에게 工作을 펼쳐, 柳孃의 女同生이 豪族 곽창(郭昌)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卽 柳孃의 조카)인 곽성桶(郭聖通, 後의 皇后 郭氏)에게 장가들어, 柳孃을 끌어들이는데 成功했다.

이렇게 왕랑과 對峙하는 渦中에 烏桓族 (烏桓族)의 精銳 突擊騎兵을 거느린 어양 상곡 이 有數側에 對해, 後世의 운대 28張의 한 사람으로 불릴 惡寒(吳漢)·甲宴(蓋延)·王輛(王梁)·瓊團(景丹)·九旬(寇恂)·警監(耿?) 等을 보내 流水와 合流했다. 이로서 氣勢가 더해진 유수군은 王郎君을 擊破하고 이듬해 여름에 邯鄲을 陷落시켰다. 왕랑은 逃走하던 中에 잡혀 죽었다.

輕視 2年 5月, 有數의 勢力을 두려워한 輕視制는 流水를 소왕 (蕭王)으로 봉하여 軍士를 解散시키고 長安으로 불러들였지만, 有數는 部下 輕減(耿?)의 助言을 받아들여 河北의 平定이 完了되지 않았다며 이를 拒否하고 自立하는 길을 擇했다. [9] 그 뒤 동마群(銅馬軍)이라는 地方 勢力軍을 끌어들여 그 兵力까지 손에 넣은 有數의 軍士는 數十 萬을 넘는 勢力으로 成長했다.

卽位 [ 編輯 ]

巾舞 元年( 25 ), 河北의 實力者가 된 有數는 部下들로부터 皇帝로 卽位하라는 상주를 받았다. 幼主 에서 改善하는 途中에 두 番이나 辭讓하다가 세 番째 要請에 「생각해보겠다」고 對答하고, 『적腹部(赤伏符)』라는 讖文(讖文)을 附記한 네 番째 要請으로 卽位를 受諾하여 6月에 卽位, 年號를 巾舞(建武)라 했다. 永川郡 여남군 을 掌握하고 있던 親戚 아저씨 有無 가 光武帝가 卽位했다는 消息을 듣고 降伏해 왔다. 이해에 輕視制는 西쪽으로 온 적美軍에게 降伏한 뒤 殺害되었다. 적美軍도 長安 및 그 周邊을 掠奪하다 食糧이 떨어지자 산둥으로의 歸還을 꾀했는데, 巾舞 3年( 27年 ), 光武帝가 派遣한 大使도 등우·情緖大將軍(征西大將軍) 風이가 敵美軍을 攻擊하였다. 처음에는 敗北했던 風이가 軍士를 整備해 敵美軍을 擊破하고, 西쪽으로의 退路를 끊고서 東쪽 의양(宜陽)에서 기다리고 있던 光武帝의 軍은 病量이 다한 적美軍을 戰鬪 없이 降伏시켰다.

巾舞 6年( 30 )에 산둥을 平定하고 巾舞 9年( 33年 )에는 農書 를 攻略하여 現地의 支配者 外孝 는 病을 앓다 굶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外筍(?純)은 巾舞 10年( 34 )에 降伏하였다. 巾舞 12年( 36 ) 蜀 땅의 公孫述 을 滅함으로써 中國 統一을 達成했다.

統一 뒤 [ 編輯 ]

光武帝는 洛陽을 첫 都邑으로 定하고, 長安을 陷落시킨 뒤에도 荒廢한 長安으로 薦度하는 代身 洛陽을 그대로 都城으로 維持했다. 한 王朝를 火덕(火德)이라 여겼던 光武帝는 洛陽의 「樂(洛)」에 들어간 數(水)字 變을 싫어해서 洛陽의 이름을 洛陽(?陽)으로 바꾸었다. 또한 中國 統一을 전후해 奴婢를 解放하고, 罪人들을 석방시키고, 租稅를 가볍게 줄였으며 軍士를 歸農시키고 水利事業을 일으키는 等의 政策을 통해 王朝의 基礎가 되는 百姓의 生活 安定을 圖謀하는 한便, 統治 機構를 整備하고 支配 體制를 確立한다(후술).

56年 에 年號를 巾舞中院 으로 바꾸고 봉선 을 行했으며, 그 이듬해 2月에 洛陽의 南宮에서 63歲로 死亡하였다.

政策 [ 編輯 ]

民政 · 財政 [ 編輯 ]

傳한 末 以來의 混亂으로 中國은 疲弊해져, 前漢의 全盛期에는 約 6千萬 名에 達하던 人口가 光武帝 時代에는 2千萬 名 程度로 減少해 있었다. 光武帝는 이에 對한 對策으로서 奴婢 解放 및 對赦免令을 몇 次例에 걸쳐 實施하고 自由民을 늘려 農村 生産力 向上과 民心 確保에 힘썼다. 徵兵制를 廢止하고, 平素에는 農業 生産에 從事시키다가 有事時에 軍事로 動員하는 屯田兵 (屯田兵)을 運用해, 生産과 需要의 均衡이 무너짐으로서 發生한 飢饉이나 變更으로의 食糧 輸送 問題를 緩和시켰다.

百姓의 身分에 對한 政策으로는 앞서 說明한 奴婢 解放令 外에도 巾舞 11年( 35年 )에는 「하늘과 땅의 存在 中에 人間이 가장 貴하다(天地之性、人爲貴)」는 文句로 始作하는 組(詔)를 내려, 奴婢와 良民의 刑法上 平等을 宣言하였다. 또한 이보다 앞선 巾舞 7年(31年)에는 每人法(賣人法), 13年(37年)에는 約人法(略人法)을 公布하여 人身賣買 를 規制하였다.

租稅에 對해서는 여지껏 王朝의 軍事 財政 不足을 理由로 收穫量의 1/10을 거두던 것을 巾舞 6年(30年)에 前漢의 制度와 같은 1/30로 하여 人民의 不滿을 緩和하고자 했다. 이러한 減稅가 可能하게 된 背景에는 屯田 施行으로 兵士의 食糧을 確保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몫하였다.

徵兵된 兵士들을 歸農시킨 뒤, 巾舞 15年( 39年 )에는 耕地 面積과 戶籍에 對한 全國的인 調査를 施行하여 人民 統治의 基礎를 다지고 國家 財政을 確立했다. 그러나 이때의 耕地 및 戶籍 調査에서는 首都가 있던 河南 이나 皇帝의 故鄕이기도 한 南陽에서 不正 新高價 行해졌는데, 該當 軍의 豪族들이 가지고 있던 權勢를 보여주는 事件이었다. 調査에 不滿을 품은 地方 豪族이 農民을 糾合해 叛亂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王莽이 貨幣 制度를 혼란시킨 바람에 後漢 初期까지 粗惡한 貨幣가 流通되고 있었으나, 巾舞 16年( 40年 )에는 過去 한 武帝 以後의 五銖錢 鑄造가 始作되어 貨幣 制度도 整備되었다.

이러한 制度를 통해 厚한 王朝의 統一 帝國으로서의 實體가 거의 갖추어졌다.

統治 機構 [ 編輯 ]

光武帝 治世의 統治 機構의 整備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後漢은 前漢의 統治 機構를 踏襲해 郡國制(郡國制)를 採用하면서도 諸侯王(諸侯王) · 列侯(列侯)의 封邑은 前漢의 비해 줄어들었다. 諸侯王의 封邑은 1個 君을 넘지 못했고, 功臣(功臣)을 後(侯)로 봉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도 몇個 現(縣)만을 봉해줄 뿐이었다. 王莽이 廢했던 前漢의 諸侯王으로 光武帝가 卽位하면서 地位를 回復한 者들도 巾舞 13年(37年)에는 列侯로 格下되고, 以後 光武帝의 治世에 諸侯王으로 봉해진 것은 皇帝의 同族이었던 南陽 龍陵 유氏 一族과 皇子 뿐이었다.

中央政府에는 大使도 · 大司空(大司空) · 大司馬(大司馬)의 三公(三公)을 政治의 最高 責任者로 두었다. 實務上에서는 皇帝의 祕書格인 相서(尙書)가 重用되었다. 그밖에 管制나 軍制에서는 役所(役所)를 統廢合하고 必要없는 官職의 削減을 實現하여 巾舞 7年( 31年 )에는 地方 常備軍이었던 재관(材官) · 記事(騎士) 等을 없애고 勞動力 部門의 民間 轉換을 實現하였다. 混亂期에 任命되었던 將軍도 大部分이 解任되고 小規模 常備軍만을 準備하는데 그쳐 財政 負擔의 輕減을 圖謀하였다.

또한 財政 機關의 再編成으로 過去 傳한에서는 皇室 財政을 맡고 있던 小部(少府)의 業務를 國家 財政 機關인 大司農 으로 移管시켜 皇室 財政을 國家 財政에 包含시키거나, 大司農 直屬이었던 國家 財政의 重要한 機關인 廉官(鹽官) · 鐵棺(鐵官)을 地方 郡縣에 屬하게 하기도 했다.

儒敎 振興 [ 編輯 ]

光武帝의 施策은 政治的 · 思想的 特色의 하나로서 儒敎를 振興시켰고, 學制 · 예제(禮制)를 整備했다는 데에 있다. 巾舞 5年( 29年 ) 洛陽에 태학(太學)을 設置하여 儒學을 講論하게 하고 14名의 五經博士(五經博士)를 두었으며, 비슷한 時期에 各地에 私學(私?)李 마련되어 現地의 學者가 門下生을 모아 經書를 講義하게 된다. 또한 官吏 登用制度人 香거리선(鄕擧里選)에서 孝行, 淸廉, 潔白을 趣旨로 하면서도 特히 孝廉 (孝廉)李 重視되어, 巾舞 12年( 36 )에는 三公 等이 每年 일정한 數의 孝廉을 薦擧하도록 하는 規定이 마련되었다. 巾舞中院 元年( 56 )에는 洛陽에 敎化 · 祭祀 施設로서 名當(明堂) · 領帶(靈台) · 躄翁(?雍)李 設置되었다.

光武帝가 統治의 根據로 삼은 儒敎는 傳한 後期 以來 盛行했던 讖緯說(讖緯說)과도 結合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豫言 等의 神祕主義 的인 要素가 짙게 加味되어 있었고 王莽度 이것을 利用하였다. 光武帝는 卽位하면서 『적腹部』의 豫言에 따른 것 外에도 三公의 人士와 봉선, 施行의 根據로서 참門을 쓴 事例도 있었으며, 讖緯說을 批判한 儒學者는 登用되지 못했다. 晩年인 巾舞中院 2年( 57年 )에는 圖讖(圖讖)을 天下에 宣布할 것을 命했다.

對外 政策 [ 編輯 ]

光武帝의 對外關係로는 다음과 같은 施策들이 있다.

東쪽으로는 高句麗의 大武神王이 멸망시켰던 韓半島 北部의 낙랑국 (樂浪國) 地域을 巾舞 6年(30年)에 다시 쳐서 平定하고 郡縣制를 통해 直接支配하였다. 한便으로 韓半島 東쪽의 首長들을 縣侯(縣侯)로 봉하였으며 半島 南部로부터 朝貢하러 온 使臣들을 받아들여 낙랑국에 屬하게 했다. 王莽이 後(侯)로 格下시켰던 高句麗가 巾舞 8年( 32年 )에 厚한 朝廷에 朝貢瑕疵 光武帝는 다시 王號(王號)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또한 巾舞中院 2年( 57年 )에는 왜(倭)의 露國(奴國)에서 온 使臣에게 金인(金印)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에도 時代 에 詩가 섬(志賀島)에서 恨위노國王인(漢委奴國王印)이 實際로 發見되기도 했다.

西쪽으로는 巾舞 11年(35年)에 侵略해온 强族(羌族)을 馬援(馬援)을 시켜 물리치고, 降伏한 者들은 天壽(天水) · 農牛(?西) · 右扶風(右扶風) 內의 軍으로 이주시켜 郡縣 管轄 아래 두었다.

南쪽으로는 巾舞 16年( 40年 )에 校誌 (交趾)에서 일어난 쯩(?) 姊妹 의 叛亂을 마원을 보내 鎭壓하게 하였다. 馬援은 武力 行使와 함께 城郭 復元, 灌漑水路 整備를 통해 農業을 振興시키고 現地의 慣習法을 尊重하는 等 後恨의 郡縣制 整備에서 現地의 習俗을 尊重했다.

北쪽에서는 過去 王莽의 强勁 外交 政策에 反撥한 匈奴가 勢力을 더하고 있었는데, 巾舞 6年(30年)에 光武帝는 화친 使者를 보냈지만 匈奴의 侵略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中 巾舞 24年( 48年 ) 匈奴가 內部 抗爭을 겪어 南北으로 分裂되고 이 中 南匈奴 (南匈奴)가 後漢에 歸順하였다(이 分裂로 烏桓과 선비족 도 匈奴에서 離脫한다). 光武帝는 이듬해인 巾舞 25年( 49年 )에 烏桓의 酋長을 侯王(侯王)에 封하고 선비로부터 朝貢을 받았다. 北匈奴 (北匈奴)는 南匈奴를 약화시키고자 巾舞 27年( 51年 )에 後漢에 使者를 보냈지만, 光武帝는 和親을 認定하지 않고 한便으로 北匈奴를 討伐할 方案도 認定하지 않은 채 緋緞 等을 주어 懷柔하는 線에서 그쳤다.

家族 關係 [ 編輯 ]

朞年 [ 編輯 ]

朞年
光武帝 元年 2年 3年 4年 5年 6年 7年 8年 9年 10年
西曆
(西曆)
25年 26年 27年 28年 29年 30年 31年 32年 33年 34年
干支
(干支)
乙酉 (乙酉) 丙戌 (丙戌) 定해 (丁亥) 巫子 (戊子) 基軸 (己丑) 京仁 (庚寅) 辛卯 (辛卯) 臨津 (壬辰) 繫辭 (癸巳) 甲午 (甲午)
年號
(年號)
巾舞 (建武)
元年
2年 3年 4年 5年 6年 7年 8年 9年 10年
光武帝 11年 12年 13年 14年 15年 16年 17年 8年 9年 20年
西曆
(西曆)
35年 36年 37年 38年 39年 40年 41年 42年 43年 44年
干支
(干支)
乙未 (乙未) 病身 (丙申) 精油 (丁酉) 武術 (戊戌) 己亥 (己亥) 경자 (庚子) 新築 (辛丑) 壬人 (壬寅) 癸卯 (癸卯) 甲辰 (甲辰)
年號
(年號)
11年 12年 13年 14年 15年 16年 17年 18年 19年 20年
光武帝 21年 22年 23年 24年 25年 26年 27年 28年 29年 30年
西曆
(西曆)
45年 46年 47年 48年 49年 50年 51年 52年 53年 54年
干支
(干支)
乙巳 (乙巳) 丙午 (丙午) 정미 (丁未) 무신 (戊申) 己酉 (己酉) 庚戌 (庚戌) 신해 (辛亥) 임자 (壬子) 癸丑 (癸丑) 甲寅 (甲寅)
年號
(年號)
21年 22年 23年 24年 25年 26年 27年 28年 29年 30年
光武帝 31年 32年 33年
西曆
(西曆)
55年 56年 57年
干支
(干支)
乙卯 (乙卯) 丙辰 (丙辰) 正史 (丁巳)
年號
(年號)
31年 32年
巾舞中院
(建武中元)
元年
2年

各州 [ 編輯 ]

  1. 後漢書 》 〈 卷1床 〉 “世祖光武皇帝諱秀字文叔 禮祖有功而宗有德光武中興故廟稱世祖 ”(世宗 光武皇帝의 휘는 수(秀)이고 字는 문숙(文叔)이다. 《禮記》에 兆(祖)는 功이 있음을, 種(宗)은 德(德)이 있음을 〔뜻한다〕. 光武는 〔韓(漢)나라를〕 中興하였으므로 廟號를 世祖라 稱하였다. )
  2. ?夏取名??(王泉根 著), 149 Page, 西漢開國皇帝劉邦小名劉季(季爲排行), 東漢光武帝劉秀小名呼 . 三國時的曹操小名阿瞞, 劉禪小名阿斗.
  3. 官服이 華麗하여 憧憬하는 사람이 많았다.
  4. 有數의 故鄕인 南陽에서 美人으로서 이름높던 豪族의 딸로 後날 皇后가 된다.
  5. 元나라 때 有進(?鎭)李 쓴 學逆거弼록(學易居筆錄)에서는 逢大師로, 中華民國 때 채同番(蔡東藩)이 쓴 歷史小說인 後한연의(後漢演義)에서는 逢大師로 적혀 있다.
  6. 漢書(漢書), 卷99, 王莽錢(王莽傳) 下(下)
  7. 後날 輕視第 幽玄(劉玄)에 依해 政局上空(定國上公)에 封해졌다.
  8. 資治通鑑 卷39
  9. 蕭王, 乃辭, 以河北未平, 不就徵. 始貳於更始. 資治通鑑, 卷31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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