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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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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 》(春秋)는 孔子 魯나라 史觀이 著作한 歷史書에 自身의 글을 적어서 다시 編纂한 魯나라의 歷史書이다. 孟子 는 《春秋》가 登場한 後에 奸臣賊子들이 떨었다고 할 만큼 이 冊이 嚴重한 歷史의 評價가 담겨있으며, 大義名分을 强調한 歷史書라고 하였다. 그리고, 《 三國志 》의 關羽 杜預 는 平生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혔다는 冊이기도 하다.

槪要 [ 編輯 ]

《春秋》라는 冊 이름은 一 年을 春夏秋冬으로 나누어 歷史를 記錄하였기에 나온 이름이다. 筆體가 매우 嚴重하였으며, 大義名分을 强調한 歷史書이다. 春秋大義라 함은 《春秋》에서 내린 嚴重한 大義名分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春秋筆法이라 하면 嚴重한 歷史的 評價를 내리는 글쓰기 法이라는 뜻이다.

《春秋》의 著者 [ 編輯 ]

傳統的으로 儒敎에서는 《春秋》의 著者가 孔子였다고 傳해진다. 다만 時代마다 學者들이 달리 主張하여 한결같지 않다.

最初로 孔子가 《春秋》를 지었다고 말한 사람은 孟子 이다. 孟子는 (堯)임금으로부터 現在까지의 混亂했던 歷史를 말하고, 周나라 의 衰退하는 難題를 解決하기 위하여 孔子가 《春秋》를 만들었고, 그 文章에는 歷史가 記錄되어있지만, 그 안에 孔子의 以上인 道理를 담았다고 했다.

傳한 의 歷史가 司馬遷 이 지은 《 詐欺 》에도 비슷한 技術이 있어, 孔子가 魯나라의 歷史書인 原本 《春秋》에 自身의 글을 添加하여 《春秋》를 지었다고 推定한다. 이처럼 전한時代 春秋學에서는 오로지 《春秋》에서 孔子의 숨겨진 意味를 찾으려고 하는 《 春秋公羊傳 》을 根據하는 公羊學이 隆盛하였다.

新나라 를 거쳐 後漢 이 建國된 以後에 孔子를 住公 (周公)의 祖述子(祖述者, 船人이 말한 바를 根本으로 하여 敍述하고 밝히는 者)로 하는 古文學이 隆盛하였고, 《 春秋左氏傳 》에 있는 內容의 文章을 解釋하는 學問이 登場하였다. 住公의 傳統을 繼承했던 魯나라의 史觀이 쓴 魯나라의 詐欺 그 自體를 보고 孔子는 말하였지만 적지 않았다는 것을 《春秋》를 祖述했다고 하는 見解가 一般的이었다.

唐나라 時代가 되자 維持氣 (劉知幾)의 《 四通 (史通)》을 始作으로 《春秋》를 疑心하는 主張도 나타나기 始作했다. 北宋의 王安石 은 《春秋》의 內容은 孔子가 숨긴 意味가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고, 單純한 文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孔子가 숨긴 意味를 찾겠다면서 對立은 繼續되었다.

淸나라 時代가 되자 尙州學派(常州學派)가 다시 漢나라 時代의 公羊學을 硏究하여 《春秋》를 包含한 六卿의 編輯者로 孔子를 提示했다.

그 後, 近代가 되어서 古史辯 (古史辯)을 主로 삼는 의고파(擬古派)가 나타나 孔子와 《春秋》의 關係를 完全하게 否定했다. 現在는 孔子의 咀嚼이라는 强力한 主張은 없지만 어떠한 關係를 認定하는 것과 完全히 관계없다고 하는 것의 두가지 意見이 있다.

《春秋》 주석서 [ 編輯 ]

《春秋》는 經文으로 된 單獨本이 現存하고 있지 않다. 一般的으로 《春秋》(春秋頃)로 불리고 있는 것은 戰國時代부터 전한時代에 걸쳐 製作된 前(傳)이라 불리는 註釋書로 불린 冊으로 傳해진 것들이다. 現存하고 있는 전(주석서)은 《 春秋左氏傳 》, 《 春秋公羊傳 》, 《 春秋穀梁傳 》 等 3 種類가 있으며, 이들을 春秋三傳이라 부른다.

이 三電이 傳하는 各各의 春秋에는 若干의 差異가 있다. 言及하는 連帶도 《 公羊傳 》, 《 穀梁傳 》은 애공 12年까지이고, 《 左氏傳 》李 애공 14年까지이다. 어느 前을 選擇하는가에 따라서 主張이 달라서 歷代 中國 王朝에도 論爭이 되었다. 初期 論爭에서는 漢나라 時代의 論爭이 有名하다.

春秋學 [ 編輯 ]

《春秋》는 簡潔하게 된 年表와 簡單하게 된 文體로 쓰여있어 文章에는 特別한 思想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後世에 孔子의 思想이 本文의 여러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見解가 一般的이었다(춘추필법). 그렇게 《春秋》에서 孔子의 思想을 읽으려고 하는 春秋學이 일어났다.

傳한 武帝때에 公羊傳에 따르는 春秋學을 내건 董仲舒 는 《春秋》를 法家 思想의 統治 原理를 나타내는 冊이라 主張하였다. 그 後, 五經博士 가 設置되어 《 公羊傳 》, 《 穀梁傳 》을 硏究하는 學館을 세웠고, 新나라 때에는 劉歆 이 《 左氏傳 》을 硏究하는 學館을 세웠다. 後漢 代에는 《 左氏傳 》을 學館에 維持했음에도, 學者들이 主로 《 公羊傳 》을 硏究를 하였다. 結局 《 左氏傳 》을 幅巾 訓詁學 에 根據하여 註釋을 만드는 等, 《 公羊傳 》을 硏究하는 公羊學 을 壓倒하였다. 이에 對抗하여 公羊學 에서는 何休 (何休)가 註釋을 붙여 《春秋共諒解고》를 만들었지만, 西進 杜預 가 《春秋》 經文과 《 左氏傳 》을 하나로 합쳐서 註釋을 단 《春秋頃典執해》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以後 春秋學의 基本이 되었다. 唐나라 時代에 《春秋頃典執해》을 바탕으로 《春秋正義》(春秋正義)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唐나라 以後에는 三電(特히 《 左氏傳 》)은 《春秋》의 主席으로는 否定的으로 생각되어, 宋나라 時代에는 三銓을 排斥하고 새로운 註釋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