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承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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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
基本 情報
出生 1911年 11月 24日 ( 1911-11-24 )
日帝强占期 朝鮮 江原道 洪川郡
死亡 1969年 8月 8日 ( 1969-08-08 ) (57歲)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性別 女性
國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配偶者 안막
子女 안성희 (딸)
活動 情報

崔承喜 (崔承喜, 1911年 11月 24日 ~ 1969年 8月 8日 )는 江原特別自治道 洪川郡 出身이며, 朝鮮 最高의 舞踊家 였으며, 6*25 戰爭 當時 男便 眼膜을 따라 越北을 하게 되었다. 以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舞踊家 로 活動하였으며, 많은 弟子들을 輩出하였지만 脫北을 하는 過程에서 밤나무에 달려 銃殺 當하였다고 傳해진다. 本貫은 海州 (海州)이다. 男便은 文學評論家 안막 이다.

마지막 남은 直系 弟子는 現在 2000年代 初盤 脫北을 한 舞踊家 김영순이다.

生涯 [ 編輯 ]

舞踊 入門 [ 編輯 ]

江原道 洪川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江原道 春川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뒤 京城府 에서 成長하였다. 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하고 1926年 日本 에 留學하여 現代舞踊家 이시이 바쿠 를 師事했다.

舞踊 活動 [ 編輯 ]

두 次例 日本 留學 以後에 國內에서 獨自的인 近代 舞踊 公演을 가지면서 大衆的으로 큰 人氣를 모으게 되었고, 《半島의 舞姬》(1936)라는 映畫 에 出演하고, 自敍傳 《나의 自敍傳》(1936)을 出刊할 程度로 有名해졌다. 1930年代 後半에는 數 年 동안 칠레 等에서의 海外 巡廻 公演을 벌이면서 世界的인 名聲도 얻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藝術 活動 [ 編輯 ]

光復 後 男便인 眼膜을 따라 越北해서 최승희舞踊硏究所( 평양시 )를 세워 所長에 就任하고 功勳俳優 , 人民俳優 稱號를 받은 뒤 最高人民會議 代議員에 選出되기도 했다. 1958年 안막 이 肅淸되면서 年金 當했다는 說이 나돈 以來, 行跡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肅淸된 것으로 推定된다. 그러나 死後 34年뒤인 2003年 2月 한설야 와 함께 復權되었고, 같은해 墓地는 愛國烈士陵 으로 移葬되었다. [1]

1936年 夏季 올림픽 마라톤 優勝 直後 한 飮食店에서 최승희와 손기정

舞踊界의 影響 [ 編輯 ]

최승희는 新舞踊의 創始者로서 韓國 舞踊界에 끼친 影響이 至大하다. 作品으로는 〈靈山춤〉, 〈에헤라 노아라〉, 〈달밤의 曲〉, 〈반야월聲曲〉, 〈禹조춤〉, 〈칼춤〉, 〈菩薩춤〉, 〈草笠童〉, 〈高句麗 舞姬〉, 〈狂想曲〉, 〈假面의 춤〉, 〈僧舞〉, 〈印度人의 悲哀〉, 〈解放을 求하는 사람들〉, 〈放浪人의 설움〉, 〈鳳山탈춤〉, 〈遊擊隊의 아들〉 等이 있고, 北韓 에서 쓴 著書로 《朝鮮民族舞踊基本》, 《朝鮮兒童舞踊基本》이 있다.

딸 안성희 [ 編輯 ]

안막 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안성희도 蘇聯 에서 발레 留學을 하고 돌아와 北韓 에서 舞踊家 및 按舞家로 活動했다.

事後 [ 編輯 ]

2007年 , 1930年代 初盤에 歌手로 音盤을 낸 '最勝이'가 音聲 分析 結果 최승희와 同一 人物로 밝혀졌다는 主張이 나왔다. [2]

日帝强占期 末期에 日本軍 慰問 公演에 參與하고 여러 次例 巨額의 國防獻金을 내는 等 日帝에 協助한 行跡이 있어 親日 論難이 繼續되었다. 1941年에는 軍國主義를 宣傳하는 映畫 《그대와 나》에서 舞踊 公演을 펼쳤고 1943年에는 75,000원이 넘는 巨額의 國防獻金을 寄附했다. 그 外에 中國에서 열린 皇軍 慰問 公演에 參與했고 國民總力文化表彰을 받은 日本風 創作 舞踊 《무魂》(武魂) 製作에 參與했다. 이러한 行跡으로 因해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包含되었다.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에서도 최승희를 《 日帝强占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 》에 明示된 親日反民族行爲 決定 審議 對象者 名單에 올렸지만 그의 親日 行爲와 關聯된 論難이 많다는 事實, 日帝 强占期 當時의 社會的 雰圍氣에서 드물게 朝鮮 文化를 世界에 알린 事實이 認定되어 棄却했다. [3]

최승희의 國防獻金 獻納은 强要된 것이었으리라는 推測이나, 設或 親日行爲가 事實이더라도 이로 인해 그의 춤에 對한 歷史的 評價가 貶下되어서는 안 된다는 主張 等 日帝 强占期의 行跡에 問題가 없었으리라는 主張도 있다. [4] [5]

洪川郡에서 최승희의 춤 煽揚事業 等을 한 豫定이었으나, 光復會 等 團體와 輿論의 反對로 中斷되었다. [6]

受賞 [ 編輯 ]

1999年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選定 20世紀를 빛낸 韓國의 藝術인

參考資料 [ 編輯 ]

  • 정수웅 (2004年 6月 7日). 《崔承喜 - 激動의 時代를 살다간 어느 舞踊家의 生涯와 藝術》. 서울: 눈빛.   ISBN   978-89-7409-841-4

최승희를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崔承喜 69年 8月 8日 死亡했다.”. 聯合뉴스. 2003年 2月 11日.  
  2. 유상우 記者 (2007年 8月 23日). “舞踊家 崔承喜, 歌手 '最勝이'와 同一人” . 뉴시스 . 2007年 10月 27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9).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 報告書 Ⅱ》. 서울: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22쪽.  
  4. 류재일 記者 (2008年 3月 8日). “舞踊家 崔承喜 “歷史的 評價마저 貶下말라”” . 강원일보 . 2008年 3月 30日에 確認함 .  
  5. 신재우 (2008年 4月 29日). “`親日名單 發表' 後孫ㆍ關聯團體 反撥 거세” . 聯合뉴스 . 2008年 5月 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洪川郡 "親日論難 `최승희춤 煽揚事業' 暫定 中斷" 2010年 12月 31日 作成 聯合뉴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