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융
(扶餘隆,
615年
~
682年
)은
百濟
의 王族이자
唐나라
將軍이다.
者
는 융(隆)이다.
숭
(崇)이라고도 한다.
[1]
백제 滅亡 後
唐나라
에 歸順하여
百濟 復興運動
討伐에 協助하고 唐나라의 百濟軍공 熊津都督으로 赴任하여 백제 流民들을 掠奪하였다. 唐나라에서 光祿大夫 태上院畏敬 兼 熊津都督 帶方郡王까지 任命됐으나, 黨의
熊津都督府
는
新羅
에 依해 韓半島에서 逐出되어 搖動으로 移住했다. 부여융이 마지막 太子인지에 關해서는 學說 對立이 있다.
生涯
[
編輯
]
王子 時節
[
編輯
]
의자왕
(義慈王)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용했으며
선
(善)과
의
(義)를 따랐다.
[2]
637年
(
武王
38年)
唐 太宗
에게
朝貢
使臣으로 다녀왔다.
[3]
644年
(義慈王 4年) 太子에 冊封되었으나 義慈王 末年에
扶餘孝
로 交替되었다.
660年
陰曆 7月 聯合軍이 몰려와서 首都 泗沘城이 包圍되자 王과 太子 孝는
熊津城
으로 待避하였다. 이 틈을 타 義慈王의 次男
부여태
가 외람히 王을 稱하자 義慈王의 嫡孫
부여문사
와 함께 城을 나가 降伏하였다. 中國 記錄에서는 義慈王과 같이 熊津城으로 待避한 太子를 한결같이 융이라고 하여
[4]
무엇이 맞는지 明確히 알 수 없다. 이때
김법민
(後날
문무왕
)에게 얼굴에 침을 맞으며 엎드리는 屈辱을 當했는데,
642年
대야성 戰鬪
에서 法民意 누이
고타소랑
이 죽은 탓이었다.
[5]
熊津城으로 逃走한 의자왕 一行도 예군(?軍)과
禮式
(?植) 兄弟의 背反으로 잡혀오면서
[6]
百濟
는 敗亡했다. 陰曆 9月
蘇定方
이 歸國하며 義慈王과 부여융을 包含한 王族, 代身, 住民 1萬餘 名도
뤄양
[7]
으로 押送했다.
高宗
은 부여융에게는
司農卿
[8]
을 除授하였다.
百濟 復興運動 討伐
[
編輯
]
百濟는 滅亡했으나 復興 運動으로 인해
熊津都督府
가 孤立되면서
662年
(
鎔鑠
2年) 黨 朝廷에서는 熊進
都督
類人猿
에게 撤收 命令을 내렸다. 그러나
劉仁軌
는 이곳을 지켜야
高句麗
도 무너트릴 수 있다며 强力히 反對했고 오히려 增援軍을 要請했다.
[9]
이에
663年
손人事(孫仁師)와 부여융이 7,000名을 이끌고 派遣되었다.
[10]
6月(陰曆)
[11]
名匠
福信
이
부여풍
에게 처형당하는 等 復興軍의 內部 分裂을 捕捉한 羅唐聯合軍은 그들의 本據地인
走流性
을 職工하기로 하였다. 類人猿, 손人事, 文武王은 陸軍을 統率하고 劉仁軌, 頭狀(杜爽), 扶餘융은 水軍과 軍糧船을 引率下였다. 8月(陰曆)
白江 戰鬪
에서 倭船 400隻을 불사르는 大勝을 거두고 主流聖徒 陷落시킴으로써 百濟 復興軍을 完全히 討伐하였다.
[12]
熊津都督 隨行
[
編輯
]
664年
(
인덕
元年) 勅使 類人猿의 主宰로 新羅의
김인문
·
김천존
과 和親을 盟約했다.
[13]
10月(陰曆) 대방주
自社
(帶方州―) 兼 檢校熊津都督 劉仁軌가 票를 올려 비로소 熊津都督이 되었고
[14]
以內 百濟軍功에 封해지고 熊進都摠管 兼 馬韓도안무臺詞(馬韓道安撫大使)에 任命되어 遺民들을 統治하였다.
[2]
665年
類人猿이 다시 勅使로 와서 新羅
문무왕
과 취리산(就利山) 會盟을 周旋하니 드디어 옛 땅 一部에 對한 支配를 龍仁받고
[15]
1都督府 7
週
51
現
을 劃定하였다.
[16]
直後에 劉仁軌와 함께 唐나라로 건너가서
666年
(
件棒
元年) 高宗의 봉선(封禪)에도 參與하였다.
惡化되던 羅唐關係가 高句麗 滅亡 後 表面化되면서 熊津都督府와 新羅는 戰鬪를 벌였고 結局
672年
(
函形
3年)에 熊津都督府는 新羅에 依해 逐出되었다.
[17]
熊津都督府는
676年
(
上院
3年) 高句麗의 城이었던
建安城
(建安城)에 재설치되어 西周(徐州)와 連奏(?州) 等에 있던 百濟 流民들도 옮겨갔다.
[18]
677年
(
蟻封
2年)
羅唐戰爭
에서 唐나라가 完敗하여 唐나라 장수였던 扶餘융은 다시는 韓半島에 돌아오지 못했다. 代身 光祿大夫(光綠大夫) 태上院畏敬(太常員外卿) 四肢節(使持節) 熊津都督 帶方郡王을 任命받아
搖動
에서 百濟 流民들을 抑壓했다.
[19]
682年
(
영순
元年) 68歲의 나이에 뤄양에서 兵士海
北邙山
에 묻혔고 輔國大將軍(輔國大將軍)을 追贈받았다.
[2]
事後
[
編輯
]
地位는 孫子
부여경
이 물려받았다. 1920年 뤄양에서 〈부여융墓誌銘〉을 發見하여 現在 中國 河南省 博物館에서 所藏하고 있다. 이 因緣으로
뤄양市
와
扶餘郡
은 姊妹結緣을 맺고 義慈王의 墓 搜索 作業을 벌였다. 그러나 끝내 찾지 못하고 그 흙만 가져와서
扶餘 능산리 古墳群
에 義慈王과 함께 家廟(假墓)를 造成하였다.
迷宮의 마지막 太子
[
編輯
]
中國의 記錄은 一貫되게 부여융이 太子이며 맏아들이라고 했으나 《
三國史記
》에서는
扶餘孝
가 太子이며 맏아들이라고 하여 서로 相反된다. 그래서 크게 3가지 說이 對立하고 있다.
융이 太子이며 맏아들설
[
編輯
]
中國의 各種 記錄과 《
三國遺事
》
[20]
를 優先한 說이다. 무엇보다 〈
대당평백제국非
〉와 〈
黨類人猿記功碑
〉가 當代의 記錄이기 때문에 信賴性이 높다. 勿論 勝者의 記錄이기는 하지만 《三國史記》 亦是 勝者의 記錄을 基盤으로 했을 뿐더러 時期는 오히려
12世紀
로 늦다. 그러므로 《三國史記》가 誤謬라고 한다. 부여융이 615年生이라는 點도 强點이다. 整理하면 융이 644年 太子에 冊封된 以來 그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21]
[22]
孝가 太子이며 맏아들설
[
編輯
]
《三國史記》를 優先한 說이다. 《三國史記》가
新羅
紗를 除外하고는 相當數 中國의 記錄을 原典으로 했음에도 굳이 太子를 융에서 孝로 고치고
부여문사
가 泗沘城에서 얘기하는 相對도 부여융으로 設定했다. 융의 降伏 時期도 의자왕보다 앞서며 〈김인문展〉에서도 太子를 孝라 하는
[23]
等의 꼼꼼함이 보인다. 中國의 記錄은 太子가 누구인지 잘 몰랐거나 孝를 太子로 認定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융의 太子 冊封 記事에 對한 說明은 다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 융의 太子 冊封 記事는 孝의 오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孝가 太子였다.
[24]
- 644年 융이 太子로 冊封되기는 하였으나 義慈王 末年에 政局 變動이 일어나 孝로 交替되었다.
[25]
孝가 太子이며 三南 이하설
[
編輯
]
效勞의 太子 交替說을 基本으로 하면서도 융 太子說과 一部 符合하는 面이 있다. 卽 융이 첫째였기에 644年 太子로 冊封됐지만 義慈王 末年에 孝로 交替되었다고 한다.
[26]
評價
[
編輯
]
唐나라
장수로서 백제의 遺民들을 統治하고 百濟 復興運動을 討伐했기 때문에 백제 義慈王의 아들이었던 扶餘융은 否定的으로 評價된다. 飼料를 檢討했을 때, 부여융에 맞서 復興運動에 參與한 者들은 共通的으로 過去 부여융과 다툼이 있었거나
[22]
熊津都督府를 黨의 支配機構로 認識했던 것으로 보인다.
[27]
그러나 한便에서는 부여융이 團地 唐나라의 支配政策을 遂行했을 뿐 惡意는 없었을 것이라는 視角도 있다.
[28]
家計
[
編輯
]
- 祖父 :
武王
(武王, ? ~641, 在位:600~ 641)
- 조某 : 未詳
- 父王 :
의자왕
(義慈王, 599年~660, 在位:641~660)
- 母后 :
恩顧
(恩古)
[29]
- 王子 : 부여융(扶餘隆) - 義慈王의 三南日 수도 있다.
- 長男 :
부여문사
- 義慈王의 맏孫子는 明確한데 아버지가 융인지 孝인지 紛紛하다.
- 孫子 :
부여경
- 융(隆)의 맏孫子는 確實한데 아버지가 模糊하다.
- 次男 :
扶餘덕장
- 융(隆)의 次男 以下는 분명한데 앞뒤로 兄弟가 더 있을 수도 있다.
- 동생
:
부여태
- 義慈王의 次男이 確實하며 나머지 兄弟들의 順序는 正確히 알 수 없다.
- 동생 :
扶餘孝
- 동생 :
부여연
- 동생 :
부여풍
- 武王의 아들일 수도 있다.
- 동생 :
부여용
- 동생 : 扶餘충승(扶餘忠勝)
- 동생 :
扶餘충지
- 關係를 알 수 없는 王族 : 扶餘文選(扶餘文宣)
[30]
부여융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 ↑
《
堂會요
》, 《
統戰
》(通典).
黨 顯宗
의 이름인 이융기(李隆基)를
피휘
- ↑
가
나
다
〈부여융墓誌銘〉
- ↑
《
舊唐書
》3卷 本紀 第3 太宗 李世民下 定款 11年. “百濟王遣其太子隆來朝” 다만 이 해에 太子는 椅子이기 때문에 그 傲氣로 보기도 한다.
- ↑
〈대당평백제국非〉
,
〈黨類人猿記功碑〉
, 《舊唐書》, 《
新唐書
》, 《
資治通鑑
》 等
- ↑
《
三國史記
》5卷 新羅本紀 第5
태종무열왕
7年
- ↑
권덕영, 〈백제 流民 예씨일족 墓誌銘에 對한 斷想〉, 《史學硏究》no.105, 韓國史學會, 2012
- ↑
《新唐書》111卷 列傳 第36 蘇定方
- ↑
司農寺(司農寺)의 長官. 《舊唐書》〈백제전〉, 《新唐書》〈백제전〉, 《三國史記》에는 司農卿이 아니라 賜暇頃(司稼卿)이라고 되어 있는데, 司農寺가 662年 四家詩로 改稱했었기 때문이다. 函形 年間(
670年
-
674年
)에 다시 司農寺로 바뀌었다. 《舊唐書》44卷 지 제24 直觀3 司農寺
- ↑
《新唐書》108卷 列傳 第33 劉仁軌
- ↑
《三國史記》6卷 新羅本紀 第6 문무왕 3年 記事에는 40萬 名이라고 되어 었으나 《舊唐書》〈백제전〉, 《新唐書》〈백제전〉, 《三國史記》〈백제본기6〉을 따른다.
- ↑
《
日本書紀
》27卷
天地天皇
2年
- ↑
《舊唐書》84卷 列傳 第34 劉仁軌
- ↑
《三國史記》6卷 新羅本紀 第6 문무왕 4年
- ↑
《資治通鑑》201卷 當期 第17 高宗 인덕 元年. 《資治通鑑》에는 熊進
都尉
(都尉)라고 하였으나 都督의 傲氣이다. 《舊唐書》劉仁軌前科 《新唐書》劉仁軌前에는 都督이라고 하였다.
- ↑
《三國史記》6卷 新羅本紀 第6 문무왕 5年
- ↑
《三國史記》37卷 雜誌 第6 지리4 百濟
- ↑
《三國史記》36卷 雜誌 第5 지리3 新羅. 或은 泗沘城을 陷落시키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設置했다는
671年
이라고도 한다. 《三國史記》7卷 新羅本紀 第7 文武王 11年
- ↑
《資治通鑑》202卷 當期18 高宗 蟻封 元年
- ↑
《舊唐書》199卷上 列傳 第149上 百濟
- ↑
《三國遺事》1卷 第1기이 太宗春秋공
- ↑
陽起石, 〈백제 부여융 墓誌銘에 對한 檢討〉, 《국사관論叢》62輯, 國史編纂委員會, 1995. 김영관, 〈대당평백제국비명에 對한 考察〉, 《歷史와 談論》vol.66, 湖西史學會, 2013
- ↑
가
나
양종국, 〈의자왕 後裔들의 過去와 現在〉, 《백제文化》vol.33,
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2004
- ↑
《三國史記》44卷 列傳 第4 김인문
- ↑
이기백
, 〈百濟王位繼承고〉, 《歷史學報》vol.11, 歷史學會, 1959. 문안식, 〈義慈王의 親衛政變과 國政刷新〉, 《동국사學》vol.47, 동국사學會, 2009
- ↑
長引聲, 〈해동증자 백제 義慈王〉, 《韓國人物史硏究》vol.4, 韓國人物史硏究所, 2005. 김병곤, 〈百濟의 太子 冊封第 受容 過程 古刹〉, 《東아시아古代學》vol.24, 東아시아古代學會, 2011
- ↑
이도학, 〈백제 義慈王代의 政治 變動에 對한 檢討〉, 《백제文化》vol.33, 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2004
- ↑
김수미, 〈黨과 百濟 流民의 熊津都督府 認識의 變化〉, 《韓國民族文化》vol.42,
釜山大
韓國民族文化硏究所, 2012
- ↑
國史編纂委員會
, 《新編韓國史》, 2002. 김수미, 〈부여융 都督 體制 熊津都督府의 統治構造〉, 《歷史學硏究》vol.32, 湖南史學會, 2008
- ↑
《日本書紀》26卷
除名天皇
6年 記事에 “百濟王義慈 其妻恩古 其子隆等...”이란 句節이 있는데 융이 恩顧의 아들인지는 確實하지 않다.
- ↑
文士의 동생으로 보는 說이 있으나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 말고는 根據가 없다. 김영관, 〈백제국 의자왕 回孫女 태비 부여氏 墓地〉, 《百濟學報》no.1, 百濟學會, 2010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