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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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
朴是春
基本 情報
本名 박순동
朴順東
出生 1913年 10月 28日 ( 1913-10-28 )
日帝强占期 慶尙南道 密陽
死亡 1996年 6月 30日 ( 1996-06-30 ) (82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性別 男性
職業 作曲家, 기타 演奏者
장르 트로트
活動 時期 1929年 ~ 1984年
樂器 기타
宗敎 佛敎
代表作
哀愁의 小夜曲 1937年
가거라 三八線 1946年
비 내리는 고모령 1948年
新羅의 달밤 1948年
娘娘 十八世 1949年
굳세어라 金錞아 1953年
離別의 釜山停車場 1954年

박시춘 (朴是春, 1913年 10月 28日 ~ 1996年 6月 30日 [1] )은 大韓民國 大衆音樂 作曲家 기타 演奏者 이고 트럼펫 演奏者, 바이올린 演奏者 , 색소폰 演奏者, 映畫俳優 , 映畫監督 , 映畫製作者 , 映畫演出家, 映畫 音樂 監督으로도 活動한 바 있는 人物이다.

履歷 [ 編輯 ]

  • 1929年 트럼페터 데뷔.
  • 1929年 트럼펫 演奏曲 《몬테 카를로의 갓난이》를 作曲하여 作曲家 데뷔.
  • 1930年 바이올리니스트 데뷔.
  • 1931年 色素포니스트 데뷔.
  • 1932年 기타리스트 데뷔.
  • 1958年 大韓民國 映畫 《三等호텔》로 映畫監督 데뷔.

所屬 [ 編輯 ]

生涯 [ 編輯 ]

慶尙南道 密陽 出生이며 本名은 박순동 (朴順東)이다. 父親이 妓生 養成所인 券番을 運營한 影響으로 어릴 때부터 音樂을 가까이 하며 지냈다. 流浪劇團에서 樂器를 연주하다가 시에론레코드 이서구 , 박영호 를 만나 作曲家로 入門했다.

데뷔作은 〈몬테칼로의 갓난이〉, 〈어둠에 피는 꽃〉이다. 1935年 〈希望의 노래〉에 이어 〈港口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發表하며 人氣 作曲家가 되었다. 特히 1938年 남인수 가 불러 큰 反響을 얻은 〈 哀愁의 小夜曲 〉으로 두 사람은 絶頂의 人氣를 누렸다. 박시춘은 洋服 차림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기타를 연주하고, 남인수는 哀切한 曲調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象徵되는 〈哀愁의 小夜曲〉은 庶民의 哀歡을 잘 表現한 日帝 强占期의 代表的인 노래로 자리잡았다. [2]

以後 〈고향초〉, 〈가거라 三八線〉, 〈新羅의 달밤〉, 〈 비 내리는 고모령 〉, 〈娘娘 十八世〉, 신세영 이 부른 〈戰線夜哭〉, 〈戰友여 잘 자라〉, 〈 굳세어라 金錞아 〉, 〈 離別의 釜山停車場 〉, 〈럭키 서울〉 等 수많은 히트曲을 發表했다. 約 3千餘 曲의 노래와 樂想을 남겼으며, 이런 業績으로 박시춘의 登場 自體가 大衆歌謠의 새 場을 열었으며 "韓國 歌謠의 뿌리이자 기둥"李 되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1943年 映畫 《朝鮮海峽》으로 映畫音樂 監督 데뷔하였다.

韓國 戰爭 大韓民國 海軍 政訓局 所屬으로 參戰했다. "戰友의 屍體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歌詞로 始作되는 箋中가요 〈戰友여 잘 자라〉는 이때 作曲한 曲으로, 熾烈했던 洛東江 戰線의 戰鬪와 國軍의 北進 過程을 描寫하고 있다. 韓國 戰爭 後에 發表한 〈샌프란시스코〉와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은 時代的 雰圍氣를 反映하는 異國 趣向의 音樂이었다. [3]

1950年代 에는 映畫 音樂 作業을 많이 했고, 映畫史를 차려 直接 映畫 製作을 하기도 했다. 映畫 主題歌로는 반야월 과 呼吸을 맞춘 〈딸 七兄弟〉, 〈男性 No.1〉, 〈유정천리〉 等이 히트曲이 되었다. 1956年 映畫 《靑春雙曲線》의 端役으로 映畫俳優 로 데뷔하였고 1958年 에 製作된 《三等호텔》으로 映畫監督 映畫 製作者로 데뷔했고 映畫 音樂 監督 또한 擔當, 같은 해 製作된 《딸 七兄弟》는 直接 演出까지 맡았다.

박시춘의 作品은 旋律이 感覺的이고 세련된 點이 特徵이다. 이런 點에서 作詞者 조명암 과는 잘 어울렸다. 뛰어난 기타 演奏者 이기도 했던 박시춘은 作曲에 對해 매우 眞摯하여 前奏와 看做 部分까지 細心하게 神經을 썼다.

1961年 에 韓國演藝協會가 組織될 때 初代 理事長을 맡았다. 1982年 大韓民國 政府로부터 文化勳章 을 徐薰받았다. [4] 大衆歌謠 作曲家에게는 이때 文化勳章 保管腸이 처음 徐薰된 것이었다.

1996年 6月 30日 , 享年 84歲로 死亡했다.

親日 行跡 [ 編輯 ]

太平洋 戰爭 時期에 志願兵으로 參戰하는 것이 所願이라는 內容의 〈血書支援〉을 비롯하여 〈아들의 血書〉, 〈決死隊의 안해〉, 〈牧丹江 便紙〉 等의 親日 歌謠를 作曲한 바 있다. [5] 이 가운데 조명암 이 作詞한 〈血書支援〉은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血書를 쓴다는 歌詞를 담고 있으며 軍國家요 가운데서도 親日性이 짙은 노래이다. [6] [7]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音樂 部門에 包含되었고, 박시춘을 記念한 歌謠祭가 親日 論難에 휩싸이기도 했다. [8]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參考資料 [ 編輯 ]

  • 강옥희,이영미,이순진,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124~126쪽쪽. ISBN   978-89-90626-26-4 .  
  • 박성서 (2005年 3月 1日). “作家 探究 [01] 作曲家 朴是春 - 우리 歌謠의 뿌리이자 기둥, 作曲家 박시춘 이야기 ”. 韓國歌謠作家協會步.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各州 [ 編輯 ]

  1. “元老 作曲家 박시춘氏 83歲로 他界”. 中央日報. 1996年 7月 1日.  
  2. 이이화 (2004年 5月 1日). 《韓國史 이야기 22:빼앗긴 들에 부는 近代化 바람》. 서울: 한길사. 92쪽쪽. ISBN   89-356-5161-3 .  
  3. 申鉉濬 (2005年 6月 1日). “韓國戰爭과 大衆音樂의 ‘分斷’ - ③ 미아리와 테네시” . 한겨레新聞. 2006年 2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7日에 確認함 .  
  4. 김덕련 (2005年 8月 31日). “[發掘] 主要 親日名單 120名 中 34名 解放後 勳·褒章·表彰 徐薰 - 金性洙는 2等級, 柳寬順은 3等級” . 오마이뉴스 . 2008年 4月 10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5. 이기범 (2005年 8月 29日). " 이 사람도 親日派?" 豫想밖 '親日人士들' - 越北俳優 문예봉, 苦戰가요 남인수, 박시춘 等 大衆사랑 받던 演藝人들 多數 包含” . 노컷뉴스 . 2007年 11月 2日에 確認함 .  
  6. 이준희 (2004年 5月 28日). “日帝 侵略戰爭에 動員된 流行歌, ‘軍國家요’ 다시 보기 (44) - 歌手 남인수·백년설이 正말 '血書'를 썼을까?” . 오마이뉴스 . 2007年 10月 31日에 確認함 .  
  7. 방학진 (2005年 3月 1日). “〈新羅의 달밤〉과 〈血書 支援〉” . 작은책 . 2008年 3月 7日에 確認함 .  
  8. 윤성효 (2006年 9月 20日). ' 親日派 歌謠祭', 조명암·박시춘 '廢止' - 남인수 '繼續 ' . 오마이뉴스 . 2008年 6月 27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