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本名
| 박창오
|
---|
藝名
| 추미림, 박남포, 남窮廬,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백舊夢, 不老草, 處女林
|
---|
出生
| 1917年 8月 1日
(
1917-08-01
)
日帝强占期
慶尙南道
馬山部
(現
大韓民國
慶尙南道
昌原市
馬山)
|
---|
死亡
| 2012年 3月 26日
(
2012-03-26
)
(94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陽川區
木洞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1]
|
---|
性別
| 男性
|
---|
國籍
| 大韓民國
|
---|
職業
| 作詞家, 歌手, 劇作家
|
---|
장르
| 트로트
|
---|
活動 時期
| 1937年
~
2012年
|
---|
宗敎
| 佛敎
|
---|
반야월
(半夜月,
1917年
8月 1日
~
2012年
3月 26日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의 大衆歌謠 作詞家이며 歌手이다. 歌手로 活動하던 때에는
진방남
(秦芳男)이라는 藝名을 使用했다.
生涯
[
編輯
]
出生地는
慶尙南道
馬山
이며, 本名은
박창오
(朴昌吾), 本貫은 密陽이다.
추미림
(秋美林),
박남포
(朴南蒲),
남窮廬
(南宮麗),
금동선
(琴桐線),
虛構
(許久),
고향초
(高香草),
옥단춘
(玉丹春),
백舊夢
(白鷗夢) 等의 여러 예명도 使用했다.
慶尙南道
鎭海
에서 태어났고 高等學校를 다니던 中 집안 形便이 어려워져
忠北
淸州
에서 洋服집을 하던 叔父를 찾아가 洋服일을 배웠다. 淸州 一帶에서 ‘노래하는 洋服쟁이’로 통하다 淸州 地域 콩쿠르를 휩쓸고 조선일보와 太平레코드가 主催하는 全國 콩쿠르大會에서 優勝하며 歌手로 데뷔했다. 진방남이라는 藝名으로 發表한 〈不孝子는 웁니다〉, 〈꽃馬車〉 等이 代表作이다. 以後 南大門樂劇團을 組織해 《山洪아 너만 가고》, 《마도로스 朴》 等의 樂劇을 製作했고, 放送極度 執筆하는 等 다양한 活動을 했다.
特히 作曲家
박시춘
, 歌手
이난영
과 더불어 '韓國 歌謠界의 3代 寶物'이라고 일컬어질 程度로 大衆의 사랑을 받은 노랫말을 많이 作詞했다.
[2]
〈넋두리 20年〉을 始作으로 自身이 불러 히트한 〈꽃馬車〉, 그리고 〈
斷腸의 彌阿里고개
〉, 〈유정천리〉 , 〈
울고 넘는 朴達재
〉 , 〈만리포 사랑〉, 〈碧梧桐 심은 뜻은〉, 〈비 내리는 三浪津〉, 〈아빠의 靑春〉, 〈무너진 사랑塔〉, 〈山莊의 女人〉,〈산유화〉, 〈외나무다리〉, 〈昭陽江處女〉 等이 잘 알려진 曲이나, 作詞한 노래만 數千 篇이 넘는다. <昭陽江處女>를 부른 歌手는
金泰希
이며 作曲者는
二號
이다.
1956年
大寒레코드作家協會,
1964年
韓國音樂著作權協會
,
1974年
韓國歌謠半世紀作家洞支會 等의 設立에 積極的으로 參與했다.
1966年
國際歌謠大賞 作詞上,
1967年
公報部長官 監査上을 받았고,
1991年
에는
文化勳章
國民葬을 徐薰 받았다.
韓國 歷史上 가장 많은 노래를 作詞하고 가장 많은 히트曲을 낸 作詞家이면서 가장 많은 노래碑를 保有한 作詞家로도 알려져 있다.
[3]
내 故鄕 馬山港, 斷腸의 彌阿里고개, 울고 넘는 朴達재, 만리포 사랑, 두메山골, 昭陽江處女, 三千浦아가씨 等의 노래碑가 全國 曲曲에 세워져 있다. 故鄕 馬山에서는 반야월 歌謠祭도 열려 왔다.
[4]
日帝 强占期 末期에 歌手로 〈少年初〉, 〈祖國의 아들〉 等을 불렀으며 〈決戰 太平洋〉, 〈一億 總 進軍〉와 같은 軍國家요 作詞에 參與한 經歷
[5]
[6]
이 있어,
2008年
에
民族問題硏究所
가 公開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의 音樂 部門에 包含되었다. 이에 對해 그는
2010年
6月 親日行跡에 對해 謝過를 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핑계다. 있었던 일은 認定해야 한다"고 밝혔다.
[7]
2012年
3月 26日
, 老患으로 別世했다. 享年 96歲.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