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요시
(
日本語
:
?川家慶
,
1793年
陰曆 5月 14日
-
1853年
陰曆 6月 22日
)는
日本
에도 幕府
의 12代
쇼군
이다. 11代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
의 둘째 아들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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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3年
6月 22日
第11代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
의 次男으로
에도 城
에서 태어났다. 맏兄인
다케치요
가 夭折했기 때문에 將軍의 世子가 되어
1837年
(
덴抛
8年)에 45歲에 將軍職을 물려받았지만, 이에나리가 重鎭으로 强力한 發言權을 保有하고 있었다.
1841年
, 이에나리의 事後 이에요시는 넷째 아들 李에사다를 將軍 後繼者로 定했다. 또한 路中 首座로
미즈노 다다쿠니
를 重用하고 이에나리파를 肅淸하고
덴포의 改革
을 進行시켰다. 다다쿠니는 幕府 財政 再建에 나서 여러 改革을 進行하였고, 徹底한 奢侈 團束과 緊縮 財政 政策을 採擇했기 때문에 世人들의 支持를 얻지 못했다. 또한 言論 統制도 行하며,
다카노 조에이
와
와타나베 가잔
等의 改革派 學者를 彈壓했다. (萬事의 玉)
1843年
(
덴抛
14年) 幕府가
에도
,
오사카
周邊의
다이묘
,
하타모토
領地를 幕府 直轄 領地로 編入하려고 上部의 指令을 發令하자 猛烈한 反撥을 사서 이에요시의 判斷으로 이듬해 撤回를 하면서, 다다쿠니는 失脚하고 덴포의 改革은 挫折되었다. (以後 다다쿠니를 路中에 在任했다).
그 後, 이에요시는
도이 都市쓰라
,
아베 마사히로
,
쓰쓰이 마사노리
等에게 政治를 맡기고 요시나가 朋黨 事件에 介入해
사쓰마번
週
시마즈 나리오키
를 隱居시키고,
미토番
의 榮州
도쿠가와 나리아키
에 隱居, 謹愼을 命令했다. 또한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 시치로마에게 히토쓰바시 家門을 相續시켰다. (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
1853年
(
街에이
6年)
6月 3日
,
美國
의
매튜 페리
가 4隻의 軍艦을 이끌고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 (
黑線 內航
) 幕府 閣僚들이 그 對策에 腐心하는 가운데
6月 22日
享年 61歲로 死亡하게 된다. 더위를 먹고 쓰러진 것(
熱射病
에 依한
心不全
)이 죽음의 原因으로 알려져 있다.
[1]
容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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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遺骨 調査에서 나온 推定 伸張은 154.4cm와 몸집이 작고 獨特한 몸매였다. 머리가 매우 크고, 여섯 等身으로 턱이 길었다. 따라서 現存하는 肖像畫 이에요시의 生前의 特徵을 매우 忠實하게 描寫 한 것으로 推定되고있다.
毛髮 等의 調査 結果, 血液型은 B兄이었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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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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