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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人類를 사랑했던 두 男子의 아킬레스腱|東亞日報

그림과 人類를 사랑했던 두 男子의 아킬레스腱

  • 週刊東亞
  • 入力 2019年 2月 9日 09時 41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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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필가이사 사회사상가였던 존 러스킨(1863?·?위)과 그의 부인 에피 그레이를 그린 토마스 리치몬드의 초상화(1865·왼쪽) 그리고 러스킨이 직접 그린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로즈 라 투셰의 초상화(1861). [위키미디어, 위키피디아]很݋ꀰށ罠݈
英國의 文筆家理事 社會思想家였던 존 러스킨(1863?·?위)과 그의 夫人 에피 그레이를 그린 토마스 리치몬드의 肖像畫(1865·왼쪽) 그리고 러스킨이 直接 그린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로즈 라 투셰의 肖像畫(1861). [위키미디어, 위키피디아]??????
두 男子가 있다. 한 名은 英國 美術評論의 原點으로 불리는 사내이고, 다른 한 名은 日本 漫畫의 原點으로 불리는 사내다. 2月 8日 誕生 200周年을 맞는 존 러스킨(1819~1900)과 2月 9日 逝去 30週期를 맞는 데즈카 오사무(1928~89)다.

오늘날 韓國人에겐 데즈카가 더 有名하다. ‘宇宙少年 아톰’과 ‘密林의 王子 레오’를 모르는 中·壯年 世代가 있을까. 하지만 이름의 무게로만 따지면 1980年代까지 러스킨이 더 有名했다고 봐야 한다. 名言 하면 떠오르는 英國人이 오스카 와일드나 조지 버나드 쇼라면 過去엔 斷然 러스킨이었다.

‘高尙하고 幸福한 사람을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富裕한 나라다’ ‘人生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채워지는 것이다’ ‘自由와 節制는 빛과 그림자의 關係다’ ‘世上에 나쁜 날씨欄 없다. 여러 種類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

사랑에 失敗한 人類愛子 러스킨

이 名言 製造家의 人生은 興味롭다. 와인 輸入商으로 큰돈을 번 父母의 든든한 後援을 바탕으로 豐富한 讀書와 여러 次例의 유럽 旅行을 통해 畫家로서 資質을 닦은 그는 옥스퍼드대를 卒業한 20代 中盤에 이미 藝術評論家로 名聲을 얻었다.

英國의 傑出한 畫家 윌리엄 터너(1775~1851)를 英國 美術界의 酷評으로부터 救해낸 것도,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理想化된 美術을 拒否하고 自然에 充實한 描寫로 돌아가자는 英國 ‘라파엘전파’의 燈臺가 돼준 存在도 러스킨이었다.

그의 眞짜 偉大함은 勞動力을 商品으로만 看做한 古典經濟學을 批判하며 靈魂의 經濟學을 展開한 點이다. 일찍 온 일꾼이든, 늦게 온 일꾼이든 똑같은 품삯을 준 葡萄밭 主人을 하느님에 比肩한 聖經 마태복음의 句節을 土臺로 ‘人間의 얼굴을 한 資本主義’를 主唱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1862)가 代表的이다. 레오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 조지 버나드 쇼 같은 爲人들이 19世紀 最高 思想家로 러스킨을 뽑은 理由도 여기 있다.

그런 그에게도 아킬레스腱은 있었다. 平生 제대로 된 사랑 한番 못 해본 ‘오쟁이 陳 男便’이란 點이다. 그의 아내 에피 그레이는 當時 無數한 畫家의 모델이 될 程度로 아리따운 外貌를 자랑했다. 열두 살의 그女를 보고 반해 러스킨이 쓴 童話가 ‘황금강의 王’이었고 스무 살이 되자 바로 結婚式을 올렸다. 하지만 結婚은 5年 만에 破綻이 났다. 에피가 러스킨의 後援을 받던 畫家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와 눈이 맞아 달아나서다.

더 놀라운 點은 離婚訴訟 過程에서 밀레이와 社통하기 前까지 에피가 處女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에피가 남긴 便紙에 따르면 첫날밤 그女의 알몸을 보고 衝擊을 받은 러스킨이 以後 잠자리를 拒否했다고 한다. 러스킨 亦是 에피의 ‘身體的 狀況’에 拒否感이 생겼다고 認定했다. 이 때문에 女性의 陰謀를 그리지 않는 西洋畫에 익숙해 있던 러스킨의 幻想이 무너져서라는 主張과 同性愛 性向 때문이라는 主張이 쏟아졌다.

에피는 밀레이와 사이에 8名의 子女를 낳았지만 러스킨은 餘生을 獨身으로 살았다. 가슴 아픈 點은 그가 不惑의 나이에 다시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相對 亦是 에피와 닮은꼴이었으니 열 살 나이에 그의 데생 弟子가 된 로즈 라 투셰(1848~1875)였다. 러스킨은 그女를 모델로 엄청나게 많은 데생을 그리며 그女에게 執着하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請婚했지만 거절당했다. 以後 러스킨은 發作을 일으킬 程度로 깊은 喪失感에 빠졌는데, 病弱하던 로즈가 스물일곱 살에 結局 숨지자 絶望感에 精神疾患이 再發했고 25年의 餘生을 精神疾患과 싸우며 외롭게 보낸다.

텐爐의 批判을 받은 申, 데즈카

영국의 문필가이사 사회사상가였던 존 러스킨(1863?·?위)과 그의 부인 에피 그레이를 그린 토마스 리치몬드의 초상화(1865·왼쪽) 그리고 러스킨이 직접 그린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로즈 라 투셰의 초상화(1861). [위키미디어, 위키피디아]很݋ꀰށ罠݈
英國의 文筆家理事 社會思想家였던 존 러스킨(1863?·?위)과 그의 夫人 에피 그레이를 그린 토마스 리치몬드의 肖像畫(1865·왼쪽) 그리고 러스킨이 直接 그린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로즈 라 투셰의 肖像畫(1861). [위키미디어, 위키피디아]??????
‘漫畫의 神’으로 불리는 데즈카는 여러모로 러스킨과 比肩된다. 아버지가 大企業 重役이고 어머니는 陸軍 中將의 딸인 裕福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時節부터 집에서 映寫機로 찰리 채플린 映畫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며 漫畫家의 꿈을 키웠다. 工夫도 잘해 1945年 열일곱 나이에 오사카帝國對 附設 儀典(軍醫官 輩出을 위한 略式 醫大)에 들어가 少年出世 했다는 點도 닮았다.

醫大生 身分으로 1946年 열여덟 살 때 ‘麻兒짱의 日記帳’이라는 4컷 漫畫로 데뷔한 그는 1952年 醫師資格試驗을 通過할 무렵 레오(1950)와 아톰(1952)의 原形을 發表했다. 게다가 1963年 日本 첫 TV 漫畫映畫로 ‘宇宙少年 아톰’이 放映되면서 재패니메이션의 神話가 始作될 때 그 先鋒將이 됐다. 1962年 無視프로덕션을 設立하며 ‘日本의 디즈니’를 꿈꾼 그는 1973年 無視가 부도나자 다시 종이漫畫로 돌아가 ‘블랙잭’ ‘붓다’ ‘아돌프에게 告한다’ 같은 傑作을 發表하며 過去 名聲을 되찾았다.

그는 딱 두 番 데이트한 아내와 結婚할 때도 原稿 마감으로 結婚式에 知覺할 만큼 사랑에 招演했다. 1989年 숨지기 直前 遺言이 “付託이니까 일하게 해줘”일 程度로 일벌레였던 點은 러스킨과 달랐다. 하지만 그의 漫畫家 生命 尊重과 平和 愛護에 充滿했다는 點에선 휴머니스트였던 러스킨을 빼닮았다. 初中高 時節 帝國主義 日本의 狂氣를 接한 데즈카는 日本이 敗戰한 1945年 8月 15日을 漫畫世界의 原點으로 삼았으며 戰爭 反對, 生命 尊重, 自然保護, 科學文明에 對한 會議를 그 네 기둥으로 配置했다. 그런 데즈카에게도 弱點은 存在한다. 그보다 13年 年下로 ‘재패니메이션의 텐노(天皇)’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9年 “漫畫家로서 데즈카는 ‘넘사壁’이었지만 애니메이터로서 데즈카를 넘어섰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었다”는 趣旨의 追悼文을 發表했다. 그래서 애니메이터로서 데즈카의 限界를 迂廻的으로 批判했다는 解釋이 나온다.

애니메이션 製作에는 수많은 원貨가 들어가야 해 人件費 比重이 높다. 1960年代 日本 애니메이션 草創期에 이 問題가 불거졌을 때 데즈카는 秒當 24프레임이 必要한 원貨를 6~12프레임으로 壓縮하고 周邊 描寫를 省略하는 ‘리미티드 技法’으로 突破했다. 재패니메이션에 종이漫畫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理由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로 因해 애니메이션 完成度가 떨어졌고 漫畫家의 輸入이 줄어들어 生活이 어려워지는 副作用이 發生했다.

미야자키는 完璧한 디테일을 追求하면서 데즈카를 뛰어넘어 日本的 리얼리즘을 具現하고자 孤軍奮鬪한 結果 大成할 수 있었다. 미야자키는 이를 이렇게 表現했다.

“데즈카 氏에게 挑戰하고 그와 訣別해 새로운 作品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데즈카 氏도 眞正 바라고 있는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권재현 記者 confetti@donga.com

<이 技士는 週刊東亞 1175號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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