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年 5月 10日, 마침내 프랑스의 ‘붉은 薔薇’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現職 大統領인 지스카르 데스탱을 물리치고 社會黨 出身으로는 처음 大統領에 當選됐다.
드골의 再登場 以後 20年 넘게 右派政權이 이어졌으니, 左派로서는 이날 “빛과 어둠을 갈랐다”고 感激할밖에.
미테랑은 任期 7年의 大統領 職을 두 番 꼬박 채웠다. 第5共和國 大統領으로 最長壽였고, 엘리제궁은 薔薇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在任 中 두 次例에 걸쳐 左派 大統領에 右派政府라는 怪異한 雙頭馬車를 몰았다. ‘左右同居’는 社會黨 改革主義에 對한 絶妙한 牽制와 均衡이었고, 當初 憂慮와는 달리 順航한다.
實用主義者人 미테랑은 수많은 改革措置에도 不拘하고 自由市場經濟에서 그리 멀리 떠나지 않았다. 1991年 유럽統合을 일궈낸 마스트리히트 條約은 最大 治績으로 꼽힌다.
그러나 任期 末 잇따라 政治的 스캔들이 터지면서 國民들은 미테랑의 또 다른 얼굴에 當惑했다.
英國의 옵서버는 미테랑이 비시政府(나치의 傀儡政權) 首班인 필리프 페탱에게서 勳章을 받았다고 暴露했다. 비시政府와 그 時代의 께름칙한 記憶은 프랑스 現代史의 아킬레스腱이다.
그는 얼버무렸다. “다른 大部分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페탱이 프랑스를 保護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無名의 新人이었고 어렸다.”
뒤이어 電話盜聽설, 疑問死 介入說, 健康記錄 造作說이 터져 나온다.
1994年 11月 파리마치는 미테랑이 婚外關係에서 ‘豌豆콩처럼 꼭 빼닮은’ 20歲 된 딸을 두고 있다며 寫眞을 公開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非難에 휘말린 것은 파리마치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게 르몽드가 뽑은 題目이다.
많은 프랑스人들에게 미테랑은 드골과는 다른 意味에서 ‘프랑스의 榮光’을 具現한 指導者로 記憶되고 있다. 그의 死後에도 ‘미테랑의 神話’는 繼續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96年 숨지기 前 미테랑은 歎息했다. “壽命을 넘겨 살고 있어….”
그는 周邊에 當付했다. “追慕演說은 必要 없네. 車빛 薔薇, 보라와 노란色 붓꽃 다발 外에는 그 어떤 調和도 놓지 말게.”
이기우記者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