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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電話式의 아프리카 奇行] 카사블랑카|東亞日報

[電話式의 아프리카 奇行] 카사블랑카

  • 入力 2002年 5月 3日 15時 05分


◇ 하얀 집과 浪漫 출렁 ‘大西洋의 眞珠’

모로코는 北아프리카에서 가장 西쪽에 자리잡고 있어 北쪽으로는 地中海를, 西쪽으로는 大西洋의 푸른빛을 품에 안고 있다. 일찍이 모로코를 征服하려던 아랍 征服者들에게 ‘未知의 西쪽’이라 불릴 만큼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던 나라다. 그 有名한 映畫 ‘카사블랑카’가 아니었다면 모로코는 우리에게 아직도 未知의 나라일지 모른다. 泄瀉 映畫 ‘카사블랑카’를 잘 알고 있더라도 그 都市가 모로코의 最大 港口都市라는 事實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파리空港에서 飛行機가 모로코를 向해 離陸하자, 나는 이 映畫 主人公인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을 떠나 보낸 後 카사블랑카 飛行場에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던 모습을 떠올렸고, 映畫 속에서 흘러 나오던 ‘As Time goes by’를 흥얼거렸다. 映畫 ‘카사블랑카’의 잔잔한 感動을 暫時 後면 實際로 느끼게 될 것이라는 期待를 안고 말이다.

飛行機는 파리를 떠나 葡萄酒로 有名한 보르도 地方의 푸른 丘陵地帶를 거쳐 피레네 山脈을 넘었다. “피레네 山脈을 넘으면 아프리카”라고 했다는 나폴레옹의 말대로 아프리카와 유럽의 緩衝地帶인 이곳을 지나자 大地의 色깔이 變하고 곧바로 지브롤터 海峽이 나타났다. 그것도 暫時. 바로 모로코 땅이 내려다보였다. 그 옛날 ‘未知의 西쪽’이라 불렸다는 모로코가 이처럼 유럽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事實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首都 라바트에서 南쪽으로 90km 떨어진 大西洋 沿岸에 자리잡고 있는 港口都市 카사블랑카는 平均 氣溫이 겨울에는 攝氏 15度, 여름에는 攝氏 24度로 1年 내내 快適한 氣候를 자랑한다. 때문에 여름이면 이곳의 海岸은 北아프리카의 밝은 햇빛과 地中海의 푸른 바다를 찾아오는 觀光客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程度다. 푸른빛으로 물든 바다와 하늘, 따사로운 햇살을 벗삼아 한가로이 낚시질하는 사람들, 뛰어내릴 場所만 있다면 躊躇 없이 다이빙을 하는 구릿빛 皮膚의 아이들, 푸른 椰子樹가 어우러진 海水浴場에서 日光浴을 즐기는 休養客들…. 카사블랑카는 映畫에서 본 것보다 훨씬 現代化된 休養地의 面貌를 갖추고 있었다. 20世紀 들어와 西區 風으로 크게 改造되어 高層 建物이 늘고 車와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탓이다.

▲모로코 最大 港口, 休養地 名聲▼

이슬람敎 國家인 이들의 宗敎的 발자취를 따라 港口에서 西쪽으로 1km 程度 떨어진 곳에 있는 下山 모스크(下山 2歲 寺院)로 向했다. 하산 모스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모스크에 이어 世界에서 세 番째로 큰 이슬람敎 寺院으로, 지난 1994年 約 7年間의 工事 끝에 完成되었다. 約 6000坪의 大地 위에 세워진 이 모스크는 2萬5000名이 同時에 禮拜 볼 수 있는 規模이며, 높이가 200m로 世界 모스크 中 가장 높다.

建物 全體가 흰色으로 漆해진 寺院 外壁에는 단조로움을 避하려는 듯 釉藥 바른 푸른色 彩色타일이 抽象的이고 幾何學的인 아라비아 무늬로 모자이크되어 있다. 雄壯한 外觀뿐 아니라 모로코式으로 裝飾된 社員 內部 裝飾도 보는 이들을 感歎하게 한다. 內部 裝飾을 위해 全國의 工藝家 3300名이 動員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精誠과 努力이 이렇게 雄壯하면서도 精巧하고 華麗한 아라베스크 藝術의 極致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슬람敎 寺院의 雄壯함을 뒤로하고 카사블랑카의 心臟部라 할 수 있는 모하메드 5歲 廣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廣場 附近 하얏트호텔에 있는 映畫 ‘카사블랑카’의 追憶이 담긴 ‘카사블랑카 바’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事實 映畫 속의 ‘카사블랑카 바’는 實際 카사블랑카에는 없다. 映畫 속의 바는 美國 캘리포니아에 마련된 것이었는데, 이곳 하얏트호텔에서 이 映畫의 小品들을 옮겨오고 當時의 舞臺를 그대로 再現해 놓은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映畫 主演 俳優들의 大型 포스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古典的인 雰圍氣로 꾸며진 內部 곳곳에는 映畫 속 名場面들이 마치 映畫를 上映하듯 裝飾되어 있다.

이 都市의 起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카사블랑카라는 都市 이름은 15世紀에 이 都市를 建設한 포르투갈人이 붙인 것으로 ‘하얀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카사블랑카에는 하얀 집이 많다. 市街地 구석구석에 줄지어 들어선 하얀 집들과 그 사이로 迷路처럼 난 좁은 골목길은 퍽 印象的이다.

市 中心地를 벗어나 麻兒리프 地球로 들어서면 菜蔬와 과일, 特히 민트 잎 等 갖가지 香辛料를 파는 가게들이 많다. 모로코에서 普通 티라고 하면 민트 잎을 듬뿍 넣은 민트 티를 뜻하는데, 그래서인지 어디서나 민트를 쌓아놓고 팔고 있다. 잘 익은 누런 호박을 半으로 잘라 반갑게 손님을 맞는 露店 商人의 모습은 우리네 在來市場의 人心 좋은 아저씨의 모습을 닮았다.

카사블랑카 거리에서 또 하나 눈길 끄는 것은 지나는 이의 渴症을 달래주는 물장수의 獨特한 모습이다. 어깨 한쪽에 염소 가죽으로 만든 물자루를 메고 原色의 華麗한 帽子를 쓴 이들은 눈에 잘 띄도록 强烈한 빨간色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물장수라기에는 너무도 멋져 보인다. 그들은 몸에 金屬으로 된 컵을 여러 個 달고 있는데, 컵을 종처럼 두드려 自身의 存在를 알린다고 한다.

市 中心地의 高層 建物과 煩雜함, 外郭의 하얀 집들, 그리고 在來市場의 모습…. 이처럼 過去와 現在가 조화롭게 共存하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에서 歷史가 오랜, 그러면서도 또다시 새로운 歷史를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都市’ 카사블랑카를 볼 수 있다. 카사블랑카의 신비로움은 아마도 이러한 옛것과 새로운 것의 共存에서 出發하는 것이 아닐까.

< 글·사진/="" 전화식(magenta="" international="" press)=""> magenta@kornet.net

◈ Tips

▷ 모하메드 5歲

모로코 國王(在位 1957~61). 프랑스로부터의 完全 獨立을 위해 民族運動을 指導하다 코르시카섬으로, 이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追放되었다가 1955年 歸國했다. 1956年 스페인과 프랑스의 調印으로 모로코가 獨立되자 1957年 國王으로 卽位했다. 1961年 카사블랑카에서 아프리카 非同盟 中立系 5個國의 首腦會議를 開催해 카사블랑카 그룹을 結成하는 等 急進的인 對外政策을 取했다.

▷ 下山 2歲

모로코 國王. 프랑스의 보르도大學을 卒業하고, 모하메드 5歲 前(前) 國王과 함께 獨立運動을 指導하다 1953∼55年 類型當했다. 1956年 모로코가 完全 獨立한 뒤 軍司令官에 就任했다. 1957年 王世子로 冊封되고, 1960年 副總理 兼 國防長官이 되었다. 1961年 國王의 死亡으로 王位를 繼承했으며, 1966∼67年에는 總理를 兼任했다. 1972年 아프리카統一機構(OAU) 首腦會議 議長으로 推戴되었다.

▷ 映畫 '카사블랑카'

1943年 아카데미 監督賞, 脚本賞, 作品賞을 受賞한 映畫. 1943年 워너브라더스 製作. 黑白 映畫로 M.커티스가 監督하고 잉그리드 버그먼, 험프리 보가트가 主演을 맡았다. 韓國에서는 1957年 開封되었다. 파리가 나치스에 占領되었던 1940年代에 當時 프랑스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舞臺로 한 男子의 옛사랑에 對한 未練과 犧牲을 그린 美國 映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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