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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鳳柱·황영조가 말하는 ‘나와 東亞마라톤’…“내 人生 黃金期 뒤엔 東亞마라톤 있었다”|동아일보

李鳳柱·황영조가 말하는 ‘나와 東亞마라톤’…“내 人生 黃金期 뒤엔 東亞마라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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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0年 3月 18日 07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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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마라톤 신화를 남긴 이봉주(왼쪽)와 황영조도 동아마라톤을 통해 태어나 성장했다. 두 불세출의 마라톤 영웅은 동아마라톤이 “꿈의 무대”라고 말하고 있다. [스포츠동아 DB]
大韓民國 마라톤 神話를 남긴 李鳳柱(왼쪽)와 황영조도 東亞마라톤을 통해 태어나 成長했다. 두 不世出의 마라톤 英雄은 東亞마라톤이 “꿈의 舞臺”라고 말하고 있다. [스포츠동아 DB]
2010서울國際마라톤大會 兼 第81回 東亞마라톤大會가 21日 午前 8時 서울 世宗路 李舜臣 將軍 銅像 앞에서 出發 銃聲을 울린다. 乙支路∼淸溪川∼鍾路∼東大門∼어린이大公園∼서울숲∼蠶室大橋를 거쳐 蠶室올림픽主競技場으로 골인하는 42.195km의 풀코스를 누빌 男女 170餘名의 國內外 鐵脚들과 마스터스 部門(午前 8時5分 스타트)에 나설 2萬3000餘名의 一般 參加者들이 내뿜는 열기로 벌써부터 大會 雰圍氣는 限껏 高調되고 있다. 民族과 함께 지난 한 世紀를 달려온 東亞마라톤은 特히 올해부터는 國際陸上競技聯盟(IAAF)李 認定하는 最高等級인 골드 라벨을 받음으로써 世界 最高의 보스턴마라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國內를 넘어 世界 톱클래스의 大會로 발돋움한 2010서울國際마라톤大會 兼 第81回 東亞마라톤大會 開幕을 앞두고 大韓民國이 낳은 두 不世出의 마라톤 英雄, 황영조(40) 大韓陸上競技聯盟 마라톤 技術委員長과 李鳳柱(40) 손기정記念財團 理事에게서 東亞마라톤의 아주 특별한 意味를 들어봤다.

○李鳳柱 “내 人生에서 東亞마라톤은 反轉의 契機’

李鳳柱(40)의 表現을 빌리자면, “東亞마라톤은 韓國마라토너들에게 꿈의 大會”다. 歷史와 傳統을 자랑하는 동아마라톤大會에 出戰하는 것만으로도 自負心을 느끼기 때문이다. 歷代 東亞마라톤大會 優勝者 名簿에는 손기정(3回·1933年) 等 傳說的인 英雄들의 이름이 登載돼 있다.

“東亞마라톤 大會요? 恒常 제 人生에서는 反轉의 契機였죠.” 이 가운데서도 이봉주는 東亞마라톤과 唯獨 因緣이 깊었다. 1996年 第67回 東亞國際마라톤大會. 이봉주는 1995世界選手權 優勝者 마틴 피스(스페인)와 接戰을 펼쳤다. 結局 1秒 車로 2位를 차지했지만, 이봉주는 “이 大會가 가장 記憶에 남는다”고 했다. 1996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슬럼프를 털고, 해볼 만하다는 自信感을 얻은 大會이기 때문”이었다.

歷代東亞마라톤 史上 最高의 名勝負로 꼽히는 2007年 第78回 大會의 主役도 李鳳柱였다. 當時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다들 “이제 이봉주는 끝났다”고 수군거릴 때였다. ‘豫想대로’ 35km地點에서 이봉주가 처졌다. 하지만 5km에서 숨을 고른 이봉주는 40km 地點에서 다시 치고 나갔다. 結局 케냐의 폴 키프로프 키壘이를 따돌리고 優勝(2時間8分4秒). 經濟危機 속에서 풀이 죽어있던 中年 家長들에게 希望을 준 레이스였다. 이봉주는 “只今 와서 생각해봐도, 내가 어떻게 그렇게 달릴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는다. 그 레이스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2009年까지 選手生活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抛棄하지 않는 不屈의 挑戰精神. 그것이 東亞마라톤을 통해 이봉주가 온 國民에게 力說한 바였다.

21日 열리는 2010서울國際마라톤大會 兼 第81回 東亞마라톤 大會에서 이봉주는 마스터스들과 함께 달린다. “食餌療法을 하지 않고 大會 나가는 것은 처음일 것”이라는 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餘裕. 하지만, “隱退는 했지만 名聲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다. 짬날 때마다 하루 10km 以上씩 꾸준히 訓鍊해 왔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17∼20km 程度를 뛸 計劃. “大會 直前에는 距離를 줄이고, 訓鍊의 强度를 높이세요. 에너지源을 蓄積할 수 있도록 炭水化物 爲主의 食單도 必要하고요….” 마스터스들에게 助言을 쏟아내는 그는 ‘天生 마라토너.’ 2010年 大會에서도 ‘東亞마라톤의 지킴이’ 이봉주의 변함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영조 ‘東亞마라톤은 내 人生의 처음이자 始作’

1991年 第62回 東亞마라톤大會. 韓國마라톤의 英雄 황영조(40·國民體育振興公團監督)는 彗星과 같이 登場했다. 페이스메이커였던 그가 元來 뛰기로 豫定돼 있던 거리는 20km. 黃 監督은 “그냥 先輩들과 步調를 맞춰주려 나갔었다는데 20km를 넘어서서도 지치지 않아 繼續 달렸다”고 回想했다. 突發變數는 있었다. 30km 地點. 황영조가 뒤 選手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致命的인 狀況에도 不拘하고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렸다. 1位는 김재룡(2時間12分34秒)의 차지였지만, 不過 1秒 差異로 3位. 生涯 첫 풀코스에서 거둔 奇跡이었다. 結局 그는 17個月 뒤 19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풀코스 完走 4番째 만에 金메달을 목에 걸었다.

工巧롭게도 天才의 마지막 레이스도 바로 東亞마라톤大會였다. 1996年 第67回 大會. 황영조는 26km 地點에서 발바닥이 찢어져 ‘걷다 뛰다’를 反復하다 結局 2時間 25分45秒의 低調한 記錄으로 決勝線을 通過했다. 1996애틀랜타올림픽 代表選拔戰을 겸한 大會였기에 衝擊은 컸다. 황영조는 “1等으로 달리다 不意의 負傷을 當한 것이라 더 안타까웠다”고 했다. 結局 太極마크를 다는 데 失敗한 황영조는 隱退를 宣言했다. “始作이 半이고, 또 마무리가 半이라고 했는데 데뷔와 隱退를 이 大會에서 했으니 東亞마라톤은 제 마라톤 人生의 全部라고 해도 過言이 아니네요.”

황영조는 現在 마라톤代表팀 總監督과 大韓陸上競技聯盟 마라톤部門 技術委員長을 兼任하고 있다. 代表팀은 東亞마라톤大會를 目標로 1·2月 濟州島에서 하루 40∼50km에 이르는 江 訓鍊을 消化한 狀況. 黃 監督은 “오서진(계명대) 等 次世代 젊은 選手들을 注目해 달라. 이番 大會를 통해 韓國마라톤의 現住所를 살펴보고, 2011大邱世界陸上選手權의 可能性 與否를 展望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영희 記者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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