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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京畿/仁川人, 仁川을 말한다] <12>강광 仁川文化財團 代表|東亞日報 </12>

[仁川/京畿/仁川人, 仁川을 말한다] <12>강광 仁川文化財團 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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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2年 3月 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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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 參與로 門會土壤 바꾸겠다”

강광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천의 문화가 척박한 이유는 예술인들이 시민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선홍 기자 sunhong@donga.com
강광 仁川文化財團 代表는 6日 東亞日報와의 인터뷰에서 “仁川의 文化가 瘠薄한 理由는 藝術人들이 市民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선홍 記者 sunhong@donga.com
강광 仁川文化財團 代表理事(72)는 스스로 재야 美術家라고 말한다. “仁川의 文化가 瘠薄한 것은 藝術人들의 責任입니다. 自己 領域에서 安住하다 보니 市民과 멀어졌지요. 一部 天才 藝術人이 文化를 代表할 순 없습니다. 後날 時代文化를 規定하는 것은 少數보다는 多數의 사람들이 어떤 것을 즐겼냐는 것이지요. 藝術人들이 좀 더 열린 姿勢로 市民들과 함께하는 文化活動을 펼치는 場(場)을 만들려 합니다.”

姜 代表는 咸鏡南道 北靑郡 胎生이다. 以北 出生인데 進步라고 불리는 理由를 물었다. 그는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6·25戰爭 直前에 南下해 서울에서 初等學校부터 大學(서울대 美大)까지 다녔습니다. 仁川과 因緣을 맺은 것이 1983年 인천대 敎授로 在職하면서부터입니다. 敎授는 經濟·社會的 待遇를 받는 職業인데 제가 保守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仁川大 紛糾 過程에서 學生들 便을 들고 北韓 住民 돕기에 積極的으로 參與했기 때문일 겁니다.” 敎授로 任用된 그해에 仁川大 總學生會, 仁川地域 人士들과 連繫해 選人學園正常化推進委員會를 構成하고 設立者 退陣 運動을 벌여 學院 내 初中高校는 公立化, 인천대와 專門大는 市立化를 主導했다. 以後 그는 仁川大 副總長을 지냈다.

그는 故鄕 北韓에 對한 鄕愁를 지울 수 없었다. 特히 北韓 어린이의 飢餓 問題를 注目했고 仁川 市民團體와 2004年 平壤을 訪問해 옥류동에 빵 工場과 齒科病棟을 建立하는 데 積極 參與했다 “當時는 美國의 對北 制裁가 本格化될 때였습니다. 平壤市內는 밤이면 暗黑天地였고 市內에서도 굶는 어린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韓民族으로 돕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韓半島 問題에 確固한 見解를 보였다. “後날 우리 民族史를 쓴다면 韓半島를 統一시킨 指導者를 가장 크게 裝飾시킬 겁니다. 우리는 同族끼리 싸운 悲劇的인 歷史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南北韓 指導者 누구도 分斷을 政治的으로 利用해선 안 됩니다. 葛藤을 助長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市民運動에서 政治性을 排除해 왔다. “仁川의 敎授, 醫師, 宗敎人 等이 地域問題를 苦悶하는 ‘목요회’라는 모임을 數十 年間 나갔지요. 專門家들이 모여 社會的 代案을 摸索하지만 徹底히 中立을 지킵니다.” 2007年에 ‘平和와 參與로 가는 仁川連帶’ 顧問을 맡았던 그는 仁川連帶가 仁川市의 支援 없이 會員의 會費만으로 運營되는 것을 보고 感動받았다고 말했다. 以後 굴업도 核 廢棄場 反對에 앞장섰다. 不法 是非가 일었던 國會議員 候補 落選運動을 펼쳤다. 그는 “落選 對象을 與野 區別 없이 選定했고 電源 落馬시켰다”고 말했다.

“仁川은 제 人生의 後半을 마무리하며 보내는 곳입니다. 仁川은 仁川 사람들이 꾸려 나가는 것입니다. 仁川은 南北韓을 하나로 모을 都市라고 생각합니다. 韓半島의 中心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仁川은 大邱나 釜山처럼 代表的인 文化商品이 없습니다. 文化藝術人부터 市民과 가까이 하기 위한 自己 革新과 體質 改善이 必要합니다.” 그가 일하는 文化財團 近處에 仁川 近代建築物 等을 買入해 리모델링한 ‘仁川아트플랫폼’이 있다. “文化는 1, 2年 만에 바로 變化하지 않습니다. 仁川아트플랫폼은 10餘 年 전 최기선 前 仁川市長 때부터 文化界와 市民들이 論議해서 場所를 잡은 곳입니다. 죽은 거리를 完全히 살려 文化가 꽃피는 아시아의 代表的인 文化空間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곳에는 市民 參與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作家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作家가 居住하면서 作業할 수 있는 空間을 提供하지요. 아시아 藝術人들은 30 對 1의 競爭을 뚫고 옵니다.”

個人展을 12回 열었지만 그는 多作 作家가 아니다. 그는 ‘愉快한 外道’를 많이 했다. 仁川大를 2005年 退任한 뒤 作品 活動에 沒頭하려고 江華島에 作業室을 꾸몄다. 하지만 그는 2010年 12月 仁川文化財團 代表理事라는 부름을 받았다. “作家로서 한 作品이 끝나면 바로 다른 作品을 構想하듯 文化財團 代表도 같습니다. 大衆이 없는 藝術은 博物館 收藏庫에 있어야지요. 文化는 華麗한 照明이 비추는 空間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하는 文化’가 또 다른 作品 活動입니다.”

박선홍 記者 su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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