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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記者의 사람이야기]황우석 博士 ‘그날’ 以後 5年 5個月만에 입 열다 <上>|東亞日報 </上>

[허문명 記者의 사람이야기]황우석 博士 ‘그날’ 以後 5年 5個月만에 입 열다 <上>

  • 東亞日報
  • 入力 2011年 9月 26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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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詐欺꾼-서울대 말만 들어도 온몸 굳어… 對人恐怖에 自殺생각도”

24일 오전 황우석 박사(왼쪽)가 경기 용인시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수술실에서 마취시킨 개의 배를 가르고 자궁에서 난소를 채취하는 수술을 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2008년 5월 세계 최초로 애완견 상업복제에 성공한 것을 비롯해 17편의 SCI급 국제학술지 논문도 발표했다. 용인=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24日 午前 황우석 博士(왼쪽)가 京畿 龍仁市 水癌生命工學硏究院 手術室에서 痲醉시킨 個의 배를 가르고 子宮에서 卵巢를 採取하는 手術을 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水癌生命工學硏究員은 2008年 5月 世界 最初로 愛玩犬 商業複製에 成功한 것을 비롯해 17篇의 SCI級 國際學術誌 論文도 發表했다. 龍仁=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황우석 博士와 어렵게 電話 連結이 됐지만 그는 “입이 열 個라도 할 말 없는 罪人이다. 國民에게 硏究 結果로만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鄭重했지만 斷乎한 인터뷰 拒絶이었다. 記者는 “한 番 만나나 달라”고 請했고 22日 만났다. 記者는 “國民은 博士께 硏究費를 支援했다. 하지만 國民을 실망시켰고 2006年 韓國 社會는 集團憂鬱症에 빠졌다. 只今도 國民들은 ‘줄기細胞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다. 最小限 硏究 近況을 알려주는 게 道理 아닌가”라고 說得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辨明에 不過할 것”이라며 頑固했지만 記者도 執拗하게 請을 넣었다. 마침내 23日 午後 11時 承諾 電話가 왔다.

이튿날인 土曜日(24日) 水癌生命工學硏究원에서 그를 만났다. 黃 博士는 實驗 犬(犬)에서 卵子를 採取하는 手術을 準備 中이었다. 記者는 手術을 보고 싶다고 했다. 能熟한 솜씨로 배를 갈라 卵巢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서 便安함과 自信感이 느껴졌다. 暫時 後 事務室에 마주 앉았다. 컴퓨터 옆에 靑年 時節 黃 博士가 황소 옆에서 밝게 웃으며 찍은 낡은 黑白寫眞이 보였다. 그 寫眞 위로 모든 것을 가졌다가 한瞬間 墜落한 只今 삶이 겹쳐졌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바깥消息을 接했다면 (견디기) 어려웠겠죠. 新聞 放送 인터넷 모두 독한 마음으로 끊고 살았습니다.”

―憂鬱症은 없었나요.

“自殺 생각 많이 했죠. 毒劇物을 注射할까, 목을 맬까, 藥을 먹을까, 具體的으로 計劃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憂鬱症 藥도 받았는데 안 먹었어요. 藥으로 支撐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不眠症은요.

“오래 앓았습니다. 사흘 내내 못 잔 적도 있고.”

―抗辯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나 같은 罪人이 國民께 무슨 더 할 말이 있다고 떠드는가, 廉恥가 없기도 했고…. 모든 사람이 뒤에서 나를 辱하지 않을까 甚한 對人恐怖症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矯導所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海外를 떠돌며 硏究하는 浪人生活을 할 때도 贖罪하는 마음으로 韓國 쪽 하늘을 보며 하루 네 番 108倍를 했다고 한다.

“流配者 心情으로 살았습니다. 多幸히 목숨은 救했으니 罪를 갚을 수 있는 機會를 얻어야 한다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처음엔 ‘서울大’ ‘MBC’ ‘詐欺꾼’이라는 말만 들으면 온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暫時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큰 罪를 지었구나, 國民에게 큰 傷處를 드렸구나, 괴로웠습니다. 母校에도 罪悚함이 앞섭니다. 結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硏究에 邁進해서 마지막 論文에 ‘母校 서울大와 敎授 學生 同窓들에게 이 論文을 바친다’ 이렇게 한 줄 쓰는 게 마지막 남은 懇切한 所望입니다.”

―돌이켜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科學者는 決코 陽地를 追求해서는 안 된다, 그게 (科學者의) 宿命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陽地란 뭐죠.

“社會的 名譽, 安樂함, (한마디로)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거죠. 그것은 科學者의 길과 兩立할 수 없다는 結論을 얻었습니다.”

―‘兩立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무 생각이 없었죠. 天地間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둥둥 떠다녔던 겁니다. 철이 없었던 거죠.” 그는 한때 잘나가던 時節, 두 사람에게서 들은 忠告가 只今도 생생하다고 했다.

“한 분은 兄弟처럼 親한 學校 先輩인데 어느 날 이렇게 말하더군요. ‘隅石아, 地位가 두 倍 높아지면 네 倍 謙遜해도 (남들한테) 얻어맞더라. 操心, 操心해야 한다’…. 두 番째는 김대중 大統領이었습니다.”

―DJ요?

“1年에 說하고 秋夕 名節에 동교동에 直接 우리 夫婦를 불러 點心을 待接해 주셨습니다. 이희호 女史께서 直接 料理를 해주시고…. 그런데 2005年 설에 大統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黃 敎授는 이제 自身을 保護하기 위해 講演 다니고 政治人들, 公務員들 안 만나도 되네. (그들이) 안 만나 준다고 (當身에게) 害를 끼칠 만큼 이제 弱한 位置가 아니네. 本分에 充實하소.’ 그리고 그해 11月, 事故(MBC PD手帖)가 터졌죠.”

―그런 助言들을 듣고 어땠나요.

“當時 저도 ‘에너지를 너무 밖에 쓰고 있다’ ‘다시 實驗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勇氣와 決斷을 내릴 수 있을 만큼 人性이 갖춰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그토록 期待와 希望이 컸던 國民을 背信하고 物議를 일으킨 것 自體가 道德的 無限 責任을 져야 하는 일이구나. 살아 보니 道德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모든 게 다 제 탓이었습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當時) 나는… 乾達이나 다름없었어요. 科學者가 아니었어요. 科學者는 實驗室에서 나오는 瞬間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實驗室 밖 世上은 좋던가요.

“터널(實驗室) 안에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배고팠어요. 그런데 그게 眞正한 幸福이란 걸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찾았습니다. 앞으로는 두 番 다시 그 달콤한 햇빛 近處에는 안 갑니다. 데어요. 火傷을 입습니다. 따뜻한 곳에는 恒常 불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1度 火傷이냐, 저처럼 3度 重火傷이냐 하는 程度의 差異지….”

―硏究者가 硏究費를 타내기 위해 東奔西走하고 講演活動을 하며 國民에게 成果를 알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그는 “굳이 핑계를 대자면 말이죠”라고 前提한 뒤 이렇게 말했다.

“前 마이너리티 學問을 했어요. 이른바 경기고등학교度 안 나왔고, 醫大도 안 나왔어요. 外國 學位도 아니고. (그런 狀況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硏究費를 나눠주는 權力의 끈을 잡고 싶었어요.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그 當時엔 우리 같은 사람 눈에 그건(권력) 敢히 넘볼 수 없는 領域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權力 앞에 硏究價値를 說明하고 이해시켜 同意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사이즈가 커지다 보니 社會的 影響力을 가진 사람들이 제게 (講演이나 만남) 要請을 하는 일이 많아졌고, 내가 그것을 拒絶하면 다시 那落으로 떨어져 硏究費를 못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記者는 暫時 質問을 잊었다. 地方의 名門高(대전고)를 나왔고 서울대를 나오고 複製 分野에서 世界的 權威를 가진 그가 ‘아웃사이더의 설움’을 이야기했다. 韓國 社會가 짐 지우는 學閥 差別과 줄 세우기가 이토록 질긴 것이었나….

―‘아웃사이더 콤플렉스’야말로 成就의 動力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博士님도 그런 境遇이고요.

“勿論입니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動力 삼아 뛰는 사람들보다는 到底히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더 많죠. 그들에게 障壁은 刑罰과 같습니다. 世上에는 그 障壁 뒤로 숨은, 潛在力 있는 人材가 너무 많아요. 機會均等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最小限의 機會가 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 제가 너무 理想的인가요?”

―어떻든 ‘마이너리티의 설움’을 克服하겠다는 博士의 熱情과 執拗함이 큰 成就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成就 以後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取(醉)한 것은 아니었던가요.

“바로 그거였습니다. 平素 賢明하게 自己省察을 잘해 온 사람이라면 빨리 狀況을 깨닫고 돌아가야 할 時點과 거리를 잘 알았을 텐데…. 전 그럴 能力과 意志가 不足했던 거죠. 그걸 깨달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韓國 社會는 아웃사이더인 나를 다시 버리는구나’, 이런 생각은 안 해 봤나요.

“全혀요. 이 社會는 저를 버린 적이 없어요. 제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갔기 때문에 뼈아픈 가르침을 주었으니 오히려 머리 숙여 感謝해야 할 일이지요.”

話題를 바꿨다.

―大統領이 줄기細胞 硏究를 積極 支援하겠다고 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뉴스를 안 보다 보니 저와 家族, 硏究員들에게 祝賀電話가 걸려 와서 發表 消息을 들었습니다. 저는 大統領께서 正말로 未來를 보는 賢明한 判斷을 하셨다고 봅니다. 政策 基調가 다음 政權까지 갔으면 좋겠고요.”

―黃 博士 硏究팀의 硏究 再開를 期待하는 電話도 많았겠군요.

“예…. (表情이 어두워지며) 前(前) 政權, 現 政權에 줄기細胞 硏究 承認을 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저의 삶은, 硏究人生은, 줄기細胞가 아니고는 없습니다. 이 硏究는 人類 歷史와 文化 社會까지도 바꾸는, 情報技術(IT) 革命에 버금가는, 아니 그 以上 가는 純機能的 役割을 할 수 있다고 確信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平生 動物을 利用해서 만든 줄기細胞를 언젠가 사람에게 適用해 보겠다고 確信을 갖고 매달렸어요. 모든 것이 무너진 狀態에서도 지난 6年間 海外를 떠돌며 硏究에 邁進했습니다. 그 結果 이제는 A에서 Z까지(복제에서부터 培養까지) 다른 機關의 協助 없이 純粹하게 우리 팀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段階까지 왔어요. 그런데… 機會가 없어요. 廉恥없는 일이겠지만 제게 다시 機會를 달라고 懇切히 國民들께 請하고 싶어요. 國民 稅金인 硏究費를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신다 해도 받을 面目이 없습니다. 우리 팀을 메인 팀으로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많은 훌륭한 팀을 키워 주시고 或如 末席에라도 機會를 주신다면…. 이제 황우석이도 6年 동안 反省했으니 깨달음이 있을 것이고 力量도 蓄積했을 터이니 한番 해봐라…그런 마음으로 機會를 주신다면 석고대죄하며 罪 사함을 받겠다는 心情으로 熱心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敢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끊겼다. 熱心히 메모하던 記者가 고개 들어 그의 얼굴을 보니 두 눈이 벌겋게 젖어들고 있었다.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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