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를 통해 본 大韓民國 近現代史/2部] <10>5·16 軍事政權에 맞서다|동아일보 </10>

[동아일보를 통해 본 大韓民國 近現代史/2部] <10>5·16 軍事政權에 맞서다

  • Array
  • 入力 2010年 9月 6日 03時 00分


코멘트

朴正熙 軍政延長 發言에 12日間 ‘私設없는 新聞’ 無言의 抗議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의장(앞)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당 및 사회단체를 해체하고 모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하는 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압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61年 5·16軍士쿠데타 以後 朴正熙 議長(앞)李 이끄는 國家再建最高會議는 政黨 및 社會團體를 解體하고 모든 出版物을 事前 檢閱하는 等 言論과 出版의 自由를 抑壓했다. 동아일보 資料 寫眞
韓國 民主主義 歷史의 里程標였던 1960年 4·19革命 精神은 1961年 5·16軍事政變으로 사그라졌다. 4·19革命은 오래도록 單純한 學生鬪爭에 따른 政治變動이 아니었냐는 論爭이 있었지만 동아일보는 4·19를 처음부터 一貫되게 ‘4月革命’으로 불렀다. 4·19부터 5·16 前까지 韓國은 人權이 保障된 名實相符한 民主主義 體制였기 때문이다. 5·16으로 軍事政權이 들어선 以後에도 동아일보는 軍政 當局에 맞서며 民主主義를 지키기 爲한 싸움을 벌였다.

1961年 5月 16日 午前 3時. 김윤근 准將이 이끄는 海兵 第1旅團 所屬 1000餘 名 等 서울 周邊에 駐屯하던 3600餘 名의 쿠데타 兵力이 市內로 進入했다. 이들은 第1한강교 北쪽에서 憲兵隊 50餘 名의 抵抗을 물리치고 2時間 만에 政府廳舍, 放送局, 新聞社 等을 掌握했다. 쿠데타 勢力이 國家의 心臟部를 모두 掌握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날 夕刊 1, 3面에 쿠데타 關聯 뉴스를 報道했다. 1面 머리記事의 題目은 ‘16日 새벽, 軍 쿠데타 發生’이었다. 이날 夕刊은 前面에 걸쳐 軍 檢閱을 받았으며 1面부터 記事가 削除돼 餘白을 남겼다. 쿠데타 사흘째인 18日 社會面은 톱기사가 削除된 채 新聞이 發行됐다. 檢閱 當局의 脾胃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場面 內閣이 5月 18日 辭退를 宣言하고 美國이 쿠데타를 認定하자 쿠데타 主導 勢力은 國家權力을 掌握하고 各界各層에 統制를 强化했다. 軍事革命委員會에서 이름을 바꾼 國家再建最高會議는 政黨 15個, 社會團體 238個를 解體하고 ‘言論·出版 檢閱方針’에 따른 報道禁止 9個 項目을 定해 모든 出版物을 事前 檢閱했다. 5月 27日 非常戒嚴이 警備戒嚴으로 代替되면서 出版物에 對한 事前檢閱은 形式上 撤廢됐지만 戒嚴統治 아래에서 言論과 出版의 自由는 源泉的으로 不可能했다.

軍검열로 기사 삭제된채 발행 동아일보는 1961년 5월 16일 석간 1면(왼쪽)에 쿠데타 소식을 보도했으나 군 검열로 일부 기사가 삭제돼 빈 곳이 생겼다. 쿠데타 사흘째인 18일 동아일보 사회면은 검열로 인해 톱기사가 삭제된 채 발행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軍檢閱로 記事 削除된채 發行 동아일보는 1961年 5月 16日 夕刊 1面(왼쪽)에 쿠데타 消息을 報道했으나 軍 檢閱로 一部 記事가 削除돼 빈 곳이 생겼다. 쿠데타 사흘째인 18日 동아일보 社會面은 檢閱로 因해 톱기사가 削除된 채 發行됐다. 동아일보 資料 寫眞
6月 3日 尹潽善 大統領은 쿠데타 뒤 첫 記者會見을 열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朝刊에 ‘尹潽善 大統領이 革命政府는 民間에게 速히 政權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記事를 실었다. 이 記事가 나가자 軍政當局은 이날 김영상 編輯局長과 政經部 조용중 次長, 이만섭 이진희 記者를 連行했다. 金 局長과 조 次長은 나흘 만에 釋放되었으나 두 記者는 한 달 넘게 陸軍刑務所에 收監됐다가 풀려났다. 이 事件은 5·16 以後 最大 新聞社의 編輯局 實務 責任者가 連行됐다는 點에서 國內外의 非常한 關心을 끌었다. 동아일보는 6日子에 ‘本社 金 編輯局長 이만섭 記者 連行, 尹 大統領 會見 記事와 關聯’이라고 連行 事實을 報道했다. UPI通信은 이와 關聯해 ‘韓國 警察에 韓國 最大의 新聞인 동아일보의 編輯局長과 記者 1名이 逮捕되었다’고 報道했다.

동아일보는 1962年 7月 28日子 ‘國民投票는 決코 萬能이 아니다’라는 社說을 揭載한 뒤 軍政下에서 苛酷한 試鍊을 겪었다. 軍事政府는 第3共和國 憲法의 基礎를 마련 中이었고 이것이 完成되면 國民投票에 부쳐 確定하려는 計劃이었다. 軍政은 동아일보 社說을 軍事革命의 權威에 挑戰하는 것으로 看做했다.

社說이 나가자 軍政은 이튿날 筆者인 황산덕 論說委員을 中央情報部로 連行했고 8月 2日에는 고재욱 主筆을 拘束했다. 金相万 發行人도 중정에 두 次例 召喚돼 調査를 받았다. 新聞 社說이 問題가 돼 新聞社 主筆이나 論說委員이 拘束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고 主筆과 黃 委員에게는 反共法 違反이라는 非常食的인 嫌疑가 適用됐다. 東亞日報 최두선 社長이 朴正熙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을 만난 뒤 故 主筆은 釋放됐지만 黃 委員은 軍法會議에서 네 番의 裁判을 받은 끝에 檢察의 公訴取消로 拘束 128日 만에 釋放됐다.

1962年 12月 6日 戒嚴令이 569日 만에 解除됐다. 戒嚴令 解除를 앞두고 軍政 當局은 民政으로 移讓하더라도 繼續 執權할 수 있는 터전을 닦으려고 했다. 中庭은 民間團體長, 言論社 幹部, 大學敎授 等을 끌어들여 再建國民運動本部를 만들고 各 地域에 下部 組織까지 構成했다. 하지만 與黨 役割을 맡게 될 民主공화당 創黨을 앞두고 쿠데타에 貢獻한 김동하 所長이 離脫했고 송요찬 前 內閣首班이 當初 革命公約臺로 政權을 民間에 넘기고 軍人들은 政治에 參與해서는 안 된다고 主張하고 나섰다. 軍事政府가 政治的 危機를 맞자 朴正熙 議長은 1963年 2月 18日 민정 不參을 宣言했다가 政治軍人들의 執拗한 要求를 받아들이는 形式으로 3月 16日 “過渡的 軍政 延長이 必要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는 ‘非常事態 收拾을 위한 臨時措置法’도 公布했다. 이 法에 따라 政治活動과 言論, 出版, 集會의 自由가 다시 얼어붙었다. 反對勢力의 손발을 묶어 大選에서 勝利하겠다는 計算이었다.

동아일보는 朴 議長의 軍政 延長 發言에 ‘社說 없는 新聞’을 發行하며 對抗했다. 社說을 싣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입을 닫겠다’는 無言의 抗議였다. 無言의 抗議는 3月 18日부터 29日까지 12日間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8月 8日 朴 議長의 大統領 選擧 不出馬를 慫慂하는 송요찬의 ‘朴正熙 議長에게 보내는 公開狀’이란 書翰을 3面 全體를 割愛해 싣기도 했다.

朴 議長은 이런 동아일보에 公開的으로 敵意를 드러냈다. 大選에 出馬한 그는 10月 大統領 選擧를 사흘 앞두고 김성열 동아일보 政經部長과의 單獨會見에서 “동아일보가 내 遊說場 參席 人員을 意圖的으로 縮小해 報道한다”고 말했다. 金 部長이 “航空寫眞을 細心하게 檢討해 報道한다”고 反駁하자 그는 벌게진 얼굴로 卓子 위 담배函을 집어던졌다. 單獨인터뷰는 不發로 끝났다.

다음 날 野黨은 朴 候補에게 一擊을 加했다. 1948年 旅順叛亂事件 뒤 關聯者 處罰을 위한 軍法會議에서 朴 候補가 無期刑을 宣告받은 事實을 暴露했다. 이날은 新聞을 發行하지 않는 日曜日이었지만 동아일보는 이 事實을 號外로 찍어 全國에 配達했다.

尹潽善 候補를 不過 15萬6000票 差로 누르고 아슬아슬하게 大統領에 當選된 그는 以後에도 자주 이 號外事件을 不快한 表情으로 言及했다고 한다. 軍事政權 아래에서의 동아일보의 險難한 앞날을 豫告하는 대목이다.

大選 當日에도 朴正熙 候補는 동아방송에 神經質的인 反應을 보였다. 동아방송 김남호 아나운서가 投票를 마치고 나오는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오늘 投票를 마치고 어떻게 消日할 것이냐”라고 묻자, 그는 “동아방송 거짓말이나 하지 마시오”라고 答했다. 이에 金 아나운서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事實을 公明正大하게 報道하는 것이 東亞의 生命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이 가시 돋친 問答은 東亞日報와 軍事政府의 葛藤을 象徵하는 代表的인 事件이었다.

민병선 記者 bluedot@donga.com

▼ 批判的 論調로 ‘3共의 言論테러’ 標的 ▼
軍將校들 社屋 亂入 亂動, 記者 집爆破-暴行 잇따라

1965년 9월 7일 오후 11시 45분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대리의 서울 이문동 집 대문이 폭파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65年 9月 7日 午後 11時 45分 東亞日報 변영권 編輯局長代理의 서울 이문동 집 大門이 爆破됐다. 동아일보 資料 寫眞
1963年 10月 第5代 大統領 選擧에서 朴正熙 候補의 當選으로 出帆한 第3共和國. 동아일보는 批判的 論調로 權力과 葛藤을 빚으면서 言論 테러의 標的이 됐다.

1964年 6月 韓日會談 反對 示威로 서울 一圓에 非常戒嚴令이 내려진 가운데 6月 6日 새벽 第1空輸特戰團長 최문영 大領을 비롯한 8名의 將校가 동아일보 光化門 社屋으로 闌入했다. 이들은 宿直 記者를 두들겨 깨운 뒤 40餘 分 동안 騷亂을 피웠다. 5月 같은 部隊 軍人들이 示威 學生에 對한 判決이 寬大하다며 法院에 集團으로 亂入한 事件을 동아일보가 猛烈하게 非難한 데 따른 報復이었다. 이 事件은 戒嚴 아래 事前檢閱 탓에 報道되지 못했지만 所聞은 霎時間에 퍼져나갔다. 結局 戒嚴當局은 6月 8日 동아일보社와 國民에 對한 謝過文을 發表했다.

동아일보는 걸핏하면 벌어지는 取材記者와 幹部에 對한 連行과 調査 等 言論 彈壓에도 不拘하고 當局에 對한 批判을 멈추지 않았다. 1965年 9月 7日 午後 11時 45分 東亞日報 변영권 編輯局長代理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집 大門이 爆破됐다. 門 앞에서 爆發物이 터져 大門 안壁이 허물어졌고 琉璃窓이 散散조각 났다. 이어 1時間도 채 지나지 않은 8日 0時 40分頃에는 東亞放送 조동화 製作課長(現 舞踊專門誌 춤 發行人)李 拉致돼 몰매를 맞았다. 怪漢 4名은 “市警에서 왔다”며 조 課長을 自宅에서 拉致한 뒤 뭇매를 때려 턱 가슴 옆구리 무릎 等에 甚한 傷處를 입혔다.

동아일보는 1966年 3月 25日부터 ‘獨走(獨走)’라는 題目의 시리즈를 始作하면서 최영철 記者의 ‘所信은 萬能인가’라는 記事를 통해 最高 權力者를 正面으로 批判했다.

“어떠한 所信일지라도 이를테면 大統領의 所信일지라도 그것이 絶對的일 수는 없다. …朴 大統領은 恒常 이렇게 말한다. ‘모든 責任을 내가 지겠다. 所信대로 하라.’ 그러나 無限責任은 바로 無責任과도 통하는 것이 統治의 世界다. 더구나 責任은 한 사람이 進茶해도 그로 인한 무거운 不幸의 멍에는 3000萬이 두고두고 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 記事가 나간 지 1個月 뒤인 4月 25日 午後 8時 10分頃. 歸家하던 崔 記者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自宅 附近에서 2名의 靑年에게 暴行당한다. 玄關 안쪽에서 發見된 흰色 封套에는 “최영철 펜대 操心하라. 너의 生命을 노린다-구국특공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한국기자협회는 “言論人 테러 事件의 眞相이 밝혀지기도 前에 또다시 崔 記者 被襲事件이 發生한 것은 民主言論의 暢達을 위해 不幸한 일”이라는 聲明을 發表하고 犯人을 索出해 그 眞相을 國民 앞에 밝히라고 促求했다.

7月 20日에는 권오기 政治部 次長이 歸家하다 崔 記者를 暴行한 怪漢들과 人相着衣가 비슷한 犯人들에게 다시 暴行을 當했다. 동아일보 記者들이 잇달아 테러를 當하자 엄민영 內務部 長官은 國會 內務委員會에서 犯人 逮捕에 懸賞金까지 걸었다며 犯人을 반드시 잡겠다고 公言했지만 이 事件들은 수수께끼로 묻혀버렸다. 같은 해 12月 29日에는 傷痍軍警會 會員 50餘 名이 동아일보社 編輯局에 亂入해 器物을 부수고 記者들을 暴行하면서 亂動을 부렸다. 前날 실린 ‘就職 미끼 300萬 원 詐取, 傷痍軍警會 두 幹部 拘束’ 題目의 記事에 不滿을 품은 것이다.

이에 동아일보는 12月 31日子 送年 社說을 통해 힘이 道義를 이기는 政治를 批判했다.

“言論에 對한 暴力의 報復이 얼마나 決定的인 民主秩序에의 挑戰인가 하는 一般論度 우리 現實에서 遙遠하기만 한 이야기다. …벌거벗은 힘이 道義를 이기는 政治, 돈의 液(額)李 法律을 비웃는 經濟,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社會, 이 모두가 暴力의 溫床이 아닌가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서의 暴力問題는 훨씬 깊은 데서부터 파헤치지 않으면 解決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김갑식 記者 dunanwor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